젠더 정치와 그 적들

이하늬 기자 2018. 3. 17.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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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젠더 정치를 가로막는 장벽, 가장 빠른 보완책으로 ‘할당제’ 꼽아

국회에서 처음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를 시작한 정모 비서관은 최근 잠을 이루지 못한다. 정 비서관은 피해사실을 알리기 전보다 최근이 심적으로 더 힘들다며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고발 이후 다른 이들의 고발이 이어지지 않아서가 아니다. 정 비서관은 “누가 선뜻 나서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은 진작에 했다”고 말했다.

지난 3월 4일, 제34회 한국여성대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미투운동을 지지하는 손팻말을 들고 성평등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정 비서관을 괴롭히는 건 2차 가해다. 정 비서관은 “‘정보공유 차원’이라는 명목으로 사실이 아닌 내용들이 정보지(지라시)로 만들어져 돌아다닌다”며 “이를 공유하는 것도 2차 가해인데 그걸 인지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나도 피해사실을 알려야겠다’ 고 생각할 수 있겠나. 정치권 미투는 분위기가 꽁꽁 얼었다”고 비판했다. 실제 최근에는 익명 글이 게재되던 ‘여의도 옆 대나무숲’도 조용하다.

비단 정 비서관만의 문제가 아니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를 고발한 김지은씨도 본인 및 가족과 관련해 온갖 음해에 시달렸다. 결국 김씨는 지난 12일 자신과 가족이 “무분별한 공격에 노출돼 있다”며 “악의적인 거짓 얘기가 유포되지 않게 도와달라”는 자필 편지를 공개했다. 피해자가 보호받기는커녕 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문제는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이런 행보가 우리 사회의 ‘바로미터’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국회의원은 물론이고 정부 부처 고위공직자, 국회 보좌진 등의 의식 변화가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정 비서관과 김씨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정치권의 젠더 감수성은 높지 않다. 국회 여성정책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보라 비서관은 “국회에서 1년에 한 번씩 성폭력 예방교육을 받지만 아무도 집중하지 않는, 행사를 위한 행사”라고 비판했다.

미투 2차 피해는 젠더의식의 민낯

‘펜스룰(Pence rule)’이 정치권에서 처음 언급된 점 역시 정치권의 젠더 감수성 수준을 보여준다. 국회에서 첫 미투가 터져나온 지 이틀 만에 ‘여의도 옆 대나무숲’에는 “우리 의원님은 성추행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잘못된 언행을 하면 반드시 지적해달라고 당부하셨던 분이다. 그런데 오늘 의원님이 ‘요즘 주변에서 여직원들 전부 자르고 남자들로만 고용하라고 그런다’고 농담을 하셨다”는 글이 올라왔다. 이런 젠더 감수성 위에서 젠더 정치는 실현되기 어렵다.

하지만 의식 변화에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이에 대해 여성가족부 모임인 ‘성평등 보이스’ 단장을 맡고 있는 김형준 명지대학교 인문교양학부 교수는 “의식 변화가 제도 변화로 이어질 수 있지만, 제도부터 바꿔서 의식을 바꾸는 방법도 가능하다”며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제도를 적용하면 사람들의 의식이 변한다. 이게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젠더 정치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뭘까. 전문가들은 가장 빠르게 도입할 수 있는 제도로 할당제를 꼽았다. 김 교수는 “국회뿐만 아니라 모든 정부 부처, 공공기관 고위직에 여성을 30%는 임명해야 한다”며 “지금 모든 곳에서 여성의 대표성이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여성계에서는 오래전부터 남녀동수제를 주장해 왔다. 미국에서는 30년 전부터 공공부문은 물론이고 민간부문에도 여성할당제를 도입하고 있다.

할당제가 필요한 이유는 수치가 말해준다. 현재 국회의 여성의원 비율은 17%다. 2016년 여성가족부 조사에 따르면 중앙행정기관 여성공무원은 49%에 이르지만 4급 이상 관리직 여성은 11%에 불과했다. 관리직보다 더 높은 고위공무원에 여성은 3.4%인 것으로 나타났다. 공공기관도 마찬가지다. 2016년 고용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여성은 37.31%지만 여성 관리자는 16.44%였다.

문제는 할당제 도입에 대한 반발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역차별’이라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박이은실 여성학자는 “감성적으로는 역차별이라고 느낄 수 있겠지만 여성 고위공무원이 3.4%라는 팩트를 들이댔을 때도 과연 역차별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며 “우리가 기울어진 운동장에 익숙하기 때문에 평평하게 만들려는 시도가 역차별로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역차별과 더불어 “능력도 없는 사람이 할당제 때문에 고위급을 차지하게 된다”는 주장도 나온다. 김 교수는 “이 역시 굉장히 기득권적인 사고”라며 “여성의 인력풀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여성이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남성 위주였기 때문이다. 20년만 기다려봐라. 여성 인력풀이 훨씬 늘어나고 좋은 젠더 정책들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의식을 바꿀 수 없다면 제도 바꿔야 여성을 아예 배제해야 한다는 펜스룰 역시 젠더 정치를 막는 벽이다. 박 여성학자는 펜스룰 현상에 대해 “대단히 큰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일반 남성’ 들도 현재의 기울어진 운동장 구조를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무서워서 여자랑은 일 못하겠다”는 말이 오히려 자신이 휘두를 수 있는 남성 권력을 인지하고 있는 증거라는 해석이다.

국제의원연맹(IPU)에 따르면 할당제와 같은 제도의 도입은 유효한 전략이다. IPU는 2016년 “20년간 할당제를 시행한 결과, 1995년 대비 각국 의회 여성의 진출은 세계 평균 2배 가까이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나아가 김 교수는 “미국 50개 주를 대상으로 여성 친화적인 정책 상관관계 연구가 진행된 게 있다”며 “여성 정치인이 많아질수록 여성 친화적 결과가 만들어진다는 보고가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7월 발표된 이진옥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의 ‘여성정책에 대한 국회의원 인식의 성차 분석’ 연구도 비슷한 결과를 보여준다. 20대 국회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여성의원은 여성 관련 법안에 남성의원보다 관심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대표는 “특히 여성, 노동, 복지에 대한 여성의원의 높은 관심은 이들이 일상적인 삶에 영향을 미치는 입법활동에 집중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고 평가했다.

박 여성학자는 미투 운동을 예로 들었다. 그는 “남녀 동수제가 마련돼 있었다면 이번 미투 운동에서도 젠더 감수성이 발휘될 수 있는 여지가 넓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국회 한 비서관도 “여성의원들은 미투 운동을 지지한다고 말하기 쉽고 실제로 말한다. 하지만 남성의원들 중에는 ‘미투 운동은 지지하지만’이라고 운을 뗀 다음 다른 말을 붙인다. 이는 사실상 지지가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나아가 전문가들은 젠더 정치가 ‘생물학적 여성이 하는 정치’로만 이해돼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한국여성민우회, 여성환경연대 등으로 구성된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지난 대선 당시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를 대상으로 심각한 혐오 표현 및 범죄 문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는 만큼 이들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게 젠더 정치”라고 규정했다.

<이하늬 기자 ha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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