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영의 사회심리학] 누가, 왜 피해자를 비난할까?

2018. 3. 17.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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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를 비난한다니, 언뜻 들으면 잘 이해되지 않는 말이다. 가해자가 버젓이 있는데 왜 피해자를 비난할까? 하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사건에 따라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입장에 더 많이 공감하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성폭력 사건에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GIB 제공

다음의 문항들을 살펴보자.

-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성관계를 갖도록 강압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용납될 수 없다 VS 어떤 상황에서는 용납된다

- 성폭력 사건의 잘잘못을 판단할 때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과거 행적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VS 가해자보다 피해자의 과거를 살펴보는 게 더 중요하다

- 강간은 가해자에 의해 발생한다 VS 피해자에 의해 발생한다

- 왜 어떤 남자들은 힘을 이용해 성관계를 가지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VS 이해할 수 있다

- 법정에서 피해자가 느낄 고통과 수치심에 공감할 수 있다 VS. 법정에서 가해자가 느낄 고통과 수치심에 공감할 수 있다

- 성폭력을 저지르지 않았음을 입증할 책임은 가해자에게 있다 VS. 성폭력이 일어났음을 입증할 책임이 피해자에게 있다

- 피해자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강간이 일어날 수 있다  VS 피해자가 정말 열심히 저항했다면 강간은 일어날 수 없다

- 결혼 관계에서도 성폭력이 일어날 수 있다 VS 결혼했다면 여성은 자신의 호불호와 상관없이 남편의 성욕을 충족시켜줘야 한다

이는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둘 중 어느 쪽에 더 공감하는지를 묻는 문항들이다. 성격 및 사회심리학지(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에 실린 한 연구에 의하면, 같은 성폭력 사건을 접해도 피해자의 입장에 더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가해자의 입장에 더 크게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다 (Deitz et al., 1982).

피해자의 입장보다 가해자의 입장에 더 잘 공감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같은 성폭력 사건을 보아도 이것은 성폭력이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성폭력이 피해자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Hamilton & Yee, 1990; Norris & Cubbins, 1992). 또한 이미 유죄로 판결난 사건에 대해서도 가해자에 대해 더 낮은 형량을 선호하는 반면 피해자의 책임을 크게 해석하기도 했다 (Check & Malamuth, 1985).

여성의 고발은 거짓?

성폭력 가해자에게 더 잘 이입하는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믿음에는 크게 두 가지가 나타난다고 한다. 하나는 여성의 성폭력 고발은 거짓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위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성에게만 성폭력이 일어나며, 따라서 성폭력은 가해자보다 피해자의 책임이라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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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여성의 성폭력 고발은 거짓이라는 믿음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우선 성폭력 무고 건수는 다른 종류의 범죄보다 적거나 비슷한 수준임을 지적한다.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된 사건들 역시, 실제 성폭력이 없었다기보다 경찰의 수사 의지가 부족했음을 반영한다는 지적들도 있다. 다른 범죄들에 비해 성폭력은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가 엄청난 2차 가해의 고통을 안게 되며 따라서 가해자의 처벌을 이끌어내더라도 피해자가 ‘이득’을 볼 만한 지점은 거의 없다는 점도 지적된다 (Lonsway & Fitzgerald, 1994).

‘여성은 감정적이고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고정관념도 문제다. 실제로 똑같이 ‘화’를 냈을 때 남성이 화를 내면 남녀 모두에게 있어 ‘열정적’이고 ‘진정성’ 있어 보인다는 평가를 받지만, 여성이 화를 내면 역시 남녀 모두로부터 ‘감정적’이고 따라서 ‘믿을만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연구가 있었다(Salerno & Peter-Hagene, 2015). 여성을 향한 편견이 깊게 숨쉬고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가해자

또한 학자들은 성폭력 무고 건수보다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피해를 입고서도 어디에도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 피해자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 또한 고발을 해도 성폭력 가해자가 실제 처벌을 받을 확률은 현저히 낮으며 따라서 성폭력을 저지르고서도 멀쩡하게 살아가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가해자’(undetected rapist)의 수가 압도적임을 꾸준히 지적하고 있다.

일례로 1882명의 일반인 남성들을 조사했을 때, 120명 정도 (약 6%)가 법률상으로 인정되는 성폭력을 저질렀으며, 이 120명이 1225건에 다르는 강간, 폭력, 아동학대 등을 저질렀음이 드러났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다 (Lisak & Miller, 2002).

많은 가해자들이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라거나 성폭력을 ‘무용담’ 정도로 취급하고 함께 웃어주는 사람들 속에서, 여전히 자신은 나쁘지 않다 믿으며 오늘도 내일도 또 다른 폭력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성폭력이 만연한 사회를 가능하게 한 것은 다름아닌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따뜻한 관심과 보호라는 것.

현실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범죄보다 특히 성폭력에 있어 눈 앞에서 고통받고 있는 피해자보다 ‘혹시라도 억울할지도 모르는 불쌍한 가해자’에 더 크게 이입하는 것은 스스로가 성폭력 피해자보다 가해자측에 더 가깝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Kahn et al.,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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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도 뭔가 잘못했겠지

성폭력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탓이라고 보는 사람들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성차별의식이다. 일례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은 따로 정해져있으며 여성의 역할은 조신하게 정서적, 성적으로 남성에게 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성차별주의자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가해자의 고통에 더 큰 관심을 두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여성에게 대놓고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남성과 여성의 역할은 따로 있다고 믿는 우호적 또는 온건한 형태의 성차별주의자들(예, 여성이 부드러워서 육아에 딱이죠)은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여성상에 해당하는 여성들에게는 우호적이지만 그렇지 않은 여성, 예컨대 술을 마신다던가 노출이 있는 옷을 입었다던가, 평소 다양한 남성과 성관계를 맺었다던가 하는 여성에 대해서는 성폭력을 당해도 싸다는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Grubb & Turner, 2012). “성폭력은 나쁘지만 이건 좀 다르죠. 이 경우는 여성분도 잘못이…”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성폭력 책임을 피해자에게 묻는 것은 ‘후견지명(hindsight effect)’의 양상을 띠기도 한다. 예컨대 빨간 옷을 입었지만 아무런 일이 없었다면 아무도 그 빨간 옷에 주목하지 않지만, 이 여성이 만약 성폭력을 당했다면 갑자기 ‘그 빨간 옷이 문제였다’고 뒤늦게 원인을 갖다 붙이는 식이다. 이렇게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 피해자의 어떤 사소한 행동에서도 귀책사유를 찾아내어 무조건 피해자가 잘못했다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편향된 판단이 유독 성폭력 사건에서 자주 나타난다 (Janoff-Bulman et al., 1985).

성폭력의 원인을 찾는다면서, 여성이 어떤 옷을 입고 몇시에 어떤 장소에 있든 그런 여성을 타겟으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가해자가 없었다면 분명 성폭력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가장 중요한 사실을 무시하는 게 흥미로운 부분이다.

피해자의 귀책사유를 찾는 데만 특화된 이러한 인지적 편향은 성범죄자에게 ‘내가 이러이러해서 성폭력을 저질렀다고 하면 사람들은 내가 아닌 그 여성을 비난할 것이다’는 메세지를 주어 성범죄자로 하여금 높은 자신감과 당당함을 유지하게 돕는다.

그 사람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

실제로 많은 성범죄자들의 레파토리가 ‘내가 아니라 여성이 나쁘다’이다. 성범죄자들의 경우 다른 종류의 범죄자들에 비해 다른 사람들에게는 친절하고 따뜻하더라도 유독 여성, 특히 성폭력 피해자들, 특히 자신이 저지른 성범죄의 피해 여성에 대해서는 낮은 공감능력과 공격성을 보인다는 연구들이 있었다(Marshall & Moulden, 2001). 성범죄자들 다수가 동조자들의 옹호 속에 ‘저 여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꽃뱀이다. 본인이 자초한 일이다.’라고 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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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에게는 공격성을 보이지 않고 남성 피해자에 대해서는 일반인 수준의 안타까움을 갖지만, 여성에 한해서만 선택적으로 높은 공격성과 낮은 공감능력을 보이므로, 성범죄자들에 대해 주변 남성들로부터 ‘저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주변 남성들은 해당 범죄자가 여성에 한해 내보이는 폭력성을 볼 일이 없었기 때문, 또는 알고 있었더라도 ‘남자가 좀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고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자들은 다른 범죄들과 조금 다르게 성범죄자들은 음침한 싸이코패스 같이 딱 봐도 범죄자일 것 같은 사람이 아니며, 학교에서 직장에서 이웃들로부터 ‘좋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평범한 듯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이야기 한다(Fernandez & Marshall, 2003). ‘저런 사람이 성폭력을 저지를 리가 없다’는 말은 성범죄의 특성을 모르고 하는 무의미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강간 포르노

강간을 포르노 정도로 생각하거나 각종 ‘성적 무용담’에 환호하는 분위기 역시 성범죄자를 양산한다. 성범죄자들의 경우 일반인 남성들에 비해 강간 장면이 담긴 영상에 유난히 높은 신체적 흥분도를 보인다는 연구가 있었다 (Murphy & Coleman, 1986). 합의하에 하는 성관계 장면에는 일반인 남성들과 비슷한 수준의 흥분도를 보였다. 몰카의 소비를 허용하는 문화 역시 예비 성범죄자들을 양산하는 훌륭한 토양이 될 것으로 보안다. 미디어에서 피해자를 비난하고 가해자를 옹호하는 듯한 컨텐츠를 내보내는 것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가해자를 옹호하게 만들 수 있다는 연구도 있었다 (Franiuk et al., 2008).

성범죄는 동조자의 역할이 큰 범죄이다. 범죄자를 옹호하고 피해자를 단죄하는 사회의 분위기가 이들로 하여금 치밀한 범죄 후에도 그저 ‘실수’였을 뿐이라고 떳떳한 태도를 보이게 만든다. 누군가 ‘성범죄는 나쁘지만 이건 좀 다르지. 피해자도 잘못했네. 한 순간의 실수로 가해자가 안 됐네’라고 한다면 당신 덕분에 오늘도 성범죄가 늘어간다고 이야기해보자.

[1] Check, J. V. P., & Malamuth, N. M. (1983). Sex-rolestereotypingand reactions to depictions of stranger versus acquaintance rape.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45, 344-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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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Deitz, S. R., Blackwell, K. T., Daley, P. C., & Bentley, B. J. (1982). Measurement of empathy toward rape victims and rapists.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43, 372-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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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Franiuk, R., Seefelt, J.L., & Vandello, J.A. (2008). Prevalence of rape myths in headlines and their effects on attitudes toward rape. Sex Roles, 58, 790-801.

[6] Grubb, A.R., & Turner, E. (2012). Attribution of blame in rape cases: A review of the impact of rape myth acceptance, gender role conformity and substance use on victim bla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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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Lisak, D., & Miller, P. M. (2002). Repeat rape and multiple offending among undetected rapists. Violence and Victims, 17, 73.

[12] Lonsway, K. A., & Fitzgerald, L. F. (1994). Rape myths. In review. Psychology of Women Quarterly, 18, 133-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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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Murphy, W. D., Coleman, E. M., & Haynes, M. R. (1986). Factors related to coercive sexual behavior in a nonclinical sample of males. Violence and Victims, 1, 255-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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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소개
지뇽뇽. 연세대에서 심리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과학적인 심리학 연구 결과를 보고하는 ‘지뇽뇽의 사회심리학 블로그’ (jinpark.egloos.com)를 운영하고 있다. 과학동아에 인기리 연재했던 심리학 이야기를 동아사이언스에 새롭게 연재할 계획이다. 최근 스스로를 돌보는 게 서툰 이들을 위해 <내 마음을 부탁해>를 썼다.

[ parkjy021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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