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왜 연극계에 미투 폭로가 많냐고요? 잃을 게 없으니까.. 정치권은 더 썩었을 것"

박돈규 기자 2018. 3. 17.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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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돈규 기자의 2사만루]
배우 손숙이 본 미투 "가해자들에 놀랐고, 피해자들에 미안하고.. 한 달째 멘붕"
우리 젊었을 땐 속으로만 삼켜.. 이젠 미투가 세상을 바꾸네요
원로 배우의 눈물에는 성추행·성폭행 가해자로 지목된 연극계 동업자들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 피해자인 후배들을 돕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뒤섞여 있었다. 지난 7일 연극 ‘3월의 눈’ 공연을 앞두고 서울 명동예술극장 무대에서 텅 빈 객석을 바라보는 손숙. 그녀는 “아프지만 다 터져야 세상이 바뀐다”며 “이 태풍을 맑아질 기회로 삼자”고 했다. /이진한 기자

"황당하고 참담해요."

배우 손숙(74)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연극계에서는 지난달 중순부터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비명이 쏟아져 나왔다. 이윤택·조민기·조재현·오태석·윤호진·김석만·한명구·오달수·최용민·최일화·이명행…. 성추행·성폭행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은 이름난 연출가이거나 낯익은 배우였다. 경찰 소환을 앞둔 조민기는 지난 9일 피해자들과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손숙은 50년 넘게 연극을 중심으로 영화·드라마에서 숱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 배우다. 라디오 '여성시대'를 10년간 진행할 땐 편지로 들어오는 '조난신호'(SOS)에 응답했다. 정신적으로 이렇게 큰 충격은 그래도 처음이라고 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작업하며 친하게 지낸 동업자들 이름이 날마다 등장했어요. 놀랐고 배신감이 들었죠. 잠도 못 잤어요. 한 달째 '멘붕' 상태"라며 한숨지었다. 작심한 듯 말을 이었다.

"이 순간에도 악행이 폭로될까 봐 떨면서 인생을 돌아보는 사람들이 있겠지요. 아프지만 전부 다 터졌으면 좋겠어요. 죄의 경중에 따라 벌을 받아야죠. 무엇보다 남녀 편 가르기를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인간이 인간을 모독하고 짓밟은 데 대한 반성이 필요합니다. 피해자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자기 입으로 꺼낸다는 게 말이 쉽지, 우리 젊을 땐 그런 일을 당하더라도 속으로 삼켜야 했어요. 말하면 인생이 완전히 끝난다고 여겼으니까. 이제라도 용기 내줘 고마워요. 그분들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고 생각해요."

"잃을 게 별로 없어 용기 내"

늦겨울부터 초봄까지 그녀는 극장에 있었다. 연극 '3월의 눈'이 공연 중이던 지난 7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난 손숙은 "뒤숭숭했지만 무대에 오를 땐 현실을 잊을 수 있었고, 힘들어하는 후배들에겐 '이럴 때일수록 묵묵히 본분에 충실하자'며 다독였다"고 말했다. "연극 전체가 여론의 몰매를 맞고 있어 선배로서 미안하고 속상하다"고도 했다.

―'미투' 폭로는 영화·종교·정치·대학으로도 번졌지만 유난히 연극인이 많군요.

"(쓸쓸하게 웃으며) 연극계가 늘 앞서가기 때문 아닐까요. 우리 작업이라는 게 굉장히 자유롭고 남녀가 두세 달 동안 날마다 모이잖아요. 저는 사실 연극계엔 성차별이 비교적 적다고 생각했어요. 뒤집어보면 그렇게 자유롭고 앞서가니까 그런 용기도 생긴 것 아닌가 싶고."

―연극인들이 가난하고 잃을 게 없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는데.

"맞아요. 크게 잃을 게 없지요. 다른 분야라고 성추행·성폭행이 현저히 적을까요? 대동소이하겠죠. 영화든 정치든 잃을 게 많은 쪽에서는 '미투' 고백이 훨씬 어려울 겁니다. 특히 정치권은 더 썩었을 거예요."

―왜 그럴까요?

"남성 우월주의, 갑을 관계가 극심할 테니까요. 한국 여성들은 그동안 성차별을 당해도 참고 침묵했어요. 듣고도 '앞으로 인생 길다. 시집은 어떻게 갈 건가'라며 억눌렀죠. 그 부작용이 '미투' 현상으로 한꺼번에 폭발한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다 터져야 (상처가) 아물 테고 더 바람직한 사회로 갈 겁니다."

―한 피해자는 '이윤택은 내가 속한 세계의 왕이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연출가가 배우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게 말이 되나요? 구상은 연출이 해도 구현은 배우가 합니다. 배우를 아껴야 더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걸 모른다면 무능한 연출가예요."

―50여 년 무대에 섰는데 사나운 일을 경험한 적도 있는지요.

“술자리에서 성희롱은 자주 있었어요. 사내들이 다 저렇지,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정도로요. 제가 모르는 성추행·성폭행도 있었겠지요. 다행히 저는 결혼하고 극단 생활을 시작해 험한 꼴을 겪진 않았습니다. 지난달 농반진반으로 연출가한테 묻고 후배들에게도 물었어요. ‘당신은 괜찮으신가요?’ ‘내가 너희들 성희롱한 적은 없니?’라고(웃음).”

―연희단거리패와 (경남) 밀양연극촌을 이끌던 연출가 이윤택과 작업을 많이 했는데.

“그 사람이 지랄 맞아요. 연습을 하다 배우에게 소리 지르고 난리 치는 모습도 봤지만 좀 지나면 돌아와 다시 연습하곤 했습니다. 감정 기복이 심했죠. 학벌 콤플렉스가 있었지만 예술가로서 능력을 의심하진 않았어요. 저는 몰랐는데 안마를 시키고 입에 담기 어려운 짓을 했더라고요.”

―널리 알려진 거장이 ‘괴물’은 아닌지 눈 씻고 보게 됩니다. 사건 터지고 연락해봤나요?

“전혀요. 하고 싶지도 않고. 제가 야단친다고 들을 사람이 아녜요. 저지른 일에 합당한 죗값을 받아야죠. 가해자 중 한 명은 제 단톡방에서 쫓겨났어요.”

―선생님 고향이 밀양입니다만.

“밀양연극촌이 만들어질 때 제가 산파(産婆) 역할을 했어요. 1999년 서울 정동극장에서 ‘어머니’(이윤택 작·연출)를 공연할 때 밀양시장이 찾아왔어요. 이윤택 연출은 ‘연희단거리패가 상주하며 창작할 공간이 필요하다’ 했고, 밀양시장은 ‘폐교를 내놓겠다’ 해서 제가 다리를 놓았지요. 한국을 대표하는 연극촌, 연극제로 성장했는데 이번 일을 당해 밀양시민들이 큰 상처를 받았을 겁니다.”

박일호 밀양시장은 지난 8일 손숙을 만났다. 연극계 자산이 된 밀양연극촌을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가 강했다고 한다.

연극 ‘3월의 눈’은 마지막 장면에서 눈이 내린다. 손숙(오른쪽)은 친구이자 오현경(왼쪽)의 아내였던 배우 윤소정이 지난해 갑자기 별세했을 때 “질척거리지 않고 떠난 모습이 역시 윤소정답다”는 조사(弔辭)를 했다. 연극계를 뒤흔든 ‘미투’ 파문에 대해선 “세상이 무서워 죽겠어. 소정이가 부럽네. 이런 더러운 꼴 안 보고 갔으니”라고 말했다. /국립극단


한국 뒤흔든 ‘미투’ 운동의 의미는?

‘여성시대’를 진행하던 1990년대 말, 그녀 앞으로 한 애청자가 유서를 보냈다. IMF 외환 위기로 사업이 갑자기 무너졌는데 너무 힘들어 살 수 없다는 말과 함께 가족에게 띄우는 마지막 편지라고 했다. 손숙은 “그 사연에 30분을 할애하며 위로도 하고 울먹였다”며 “10여 년 지나 대구 공연을 가서 그분을 실제로 만났다”고 했다.

―뭐라 하시던가요.

“그때 제가 들어준 게 위로가 돼 최악의 상태에서 벗어났답니다. 편지 쓸 때 딸이 초등학생이었는데 그새 대학생이 됐더라고요. 그날 무척 감동했어요. 제가 라디오에서 매일 두 시간씩 별말을 다했을 거 아녜요. 어떨 땐 책임 없이 던진 말도 있을 테고. 그런 게 누구의 인생을 구할 수 있구나, 또 누구의 인생을 못쓰게 할 수도 있구나, 절감했어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요.”

―말 한마디가 그렇게 위중하군요.

“엄청나다는 걸 알았어요. 무섭기도 하고. 그날 많이 울었어요.”

―미투 피해자 중에는 아직도 꼭꼭 숨기고 괴로워하는 분이 있을 겁니다. 죽고 싶은 심정일 수도 있고요.

“안 돼요, 안 돼. 털어야 치료가 돼요. 그래야 벌을 줄 수 있고 사과도 받아낼 수 있습니다. 용서하고 싶다면 그것도 가능해지고요. 묻어두지 말고 요즘처럼 같은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 많이 나설 때 용기를 내야 해요.”

―한국 사회는 그동안 지나치게 남성 위주로 굴러갔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삶의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30년 전만 해도 남녀가 평등하지 않았는데,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한 거예요. 40~50대 이상 남성은 정도 차이만 있을 뿐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할 거예요. 배려 없이 갑을 관계로 대하거나 ‘저 여자는 내가 희롱해도 괜찮아’ 같은 태도는 없어져야죠. 여성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방어해야 합니다. 당당하게 거절하고 ‘옳지 않다’ 지적하고. 이 변화를 못 따라가는 남성은 또 추한 꼴을 볼 겁니다. 여성은 성희롱·성추행·성폭행을 더 이상 참거나 묵인하거나 묻어두지 않을 테니까요.”

―요즘 연극인들 만나면 무슨 얘길 하나요.

“후배들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파요. 우리가 쟤네들을 보호해 줘야 하는데, 연극이 얻어먹을 게 뭐 있어요? 그 먼지 구덩이에서 돈이 생겨요? 그럼에도 연극 하겠다고 기를 쓰고 온 애들한테 왜 이런 험악한 걸 덧씌우는지…. 피해자들 돕는다고 해서 후원금을 보탰어요.”

―미투 불길은 고은·이윤택·박재동에 이어 정치권으로 번졌는데 지목된 가해자는 (안희정·민병두·박수현·정봉주 등) 여권과 좌파 인사가 많습니다. 정치 공작설까지 나왔습니다만.

“성추행·성폭력에 좌우(左右)가 있을까요. 잘 모르겠어요.”

정치인의 성추문을 폭로한 여성들은 가해자의 지지자나 열성 팬, 활동을 함께했던 ‘동지’인 경우가 많다. 여성 문제에 진보적인 줄 믿었다 발등 찍혔다는 배신감, 우파 못지않게 위선적이고 부도덕하다는 실망감, 투사 이미지를 악용한 데 대한 복수심도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함정

손숙·오현경이 주연한 연극 ‘3월의 눈’은 찬란하게 내리지만 금방 녹아버리는 봄눈을 우리 인생에 빗댄 이야기다. 손숙은 “마지막 장면에 무대 위로 날리는 종이 눈을 볼 때마다 아등바등 욕심내고 누군가를 미워할 게 뭐 있나 생각한다”며 “소멸해야 뭔가 또 생성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꾼들이 문짝과 마루를 쿵쾅쿵쾅 뜯어내는 대목에서 가슴이 서늘해졌어요. 해체돼 흩어지는 집처럼 어차피 다 비우고 가는 인생,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저는 현재에 충실하려고 해요. 오늘 최선을 다해야 내일이 오는 거고. 더 갖겠다고 악다구니 쓸 필요 없어요. 나이가 들수록 비우고 내려놓아야죠.”

―연극은 권력자의 횡포와 부패를 고발하고 민낯을 드러내 ‘이러면 안 된다’고 알려줘야 하는 예술인데, 요즘엔 초상집 같습니다.

“거꾸로 연극이 그렇게 됐으니 민망하죠. 이불을 들춘 셈인데, 나이 든 선배로서 참담해요. 가해자도 어쨌든 우리 동지였으니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 않아요.”

―혹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라면.

“가해자 가족까지 싸잡아 비난하는데, 연좌제도 아니고 아버지가 죄인이면 자식도 죄인인가요?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 가족도 보호해줘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공연엔 배우와 스태프가 100명쯤 붙어 있어요. 그들이 두세 달씩 시간을 바친 작품인데 죄인 한 명 때문에 막을 못 올린다는 게 너무 안타까워요. 죄인과 선의의 피해자는 구분해야죠.”

―한국 사회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요?

“우리 민족이 대부분 훌륭한데 배려랄까 역지사지(易地思之)가 부족해요. 이웃과 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습니다.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심, 물질 만능주의를 좇다 생긴 후유증 아닐까 싶어요.”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가정과 학교에서 어릴 때부터 새로운 성교육이 필요해요. (4월 말부터 방영되는) 드라마 ‘슈츠’ 대본을 받아봤더니 맨 앞장에 ‘작업 중에 해서는 안 될 일’ ‘잘 모르고 저지르는 성희롱·성추행’에 대해 적혀 있더라고요. 다 같이 숙지해야죠. 연극계도 비슷한 규정을 만든다고 합니다.”

―이 태풍 또한 지나갈까요?

“맑아질 기회로 삼아야죠. 연극인들이 다 죽어 없어질 순 없잖아요. 태풍 피해를 복구하고 잔해도 치우고 ‘우리가 오만하지 않았나’ 처절하게 반성하며 기다려야죠.”

‘세일즈맨의 죽음’ ‘시련’의 극작가 아서 밀러는 일찍이 말했다. “비극에도 희망의 불꽃이 있어야 한다”고. 자세를 꼿꼿이 고쳐 앉으며 손숙이 호응했다. “현실이 어려울수록 더 그렇죠. 미투 운동은 가히 혁명이에요. 이게 끝나면 더 나은 세상이 옵니다. 당장은 참담하지만 저는 어떤 경우에도 체념하거나 절망하지 않아요. 바람직한 사회로 가는 진통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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