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최정화 현대미술가] "역발상으로 뻔한 것도 새롭게 쓰레기와 예술, 차이 어딨겠냐"

조상인 기자 2018. 3. 16.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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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동계패럴림픽 개폐막식 설계
못·깨진 병·녹슨 식기 등
예상치 못한 소재로 작품
쓰던 것·사용하는 물건은
한국의 오늘과 내일 보여줘
[서울경제] 달도 둥글고 태양도 둥글다. 성화가 타오르는 백자 항아리도 둥글고 오륜기의 오륜도 둥글고 휠체어의 바퀴도 둥글다. 전통 환영무 추는 무용수의 옷자락이 원을 그렸고 빙글빙글 도는 꽃잎이 겹겹이 원을 이뤘고 똑똑 떨어진 물방울의 파문 같은 원이 끝없이 펼쳐졌다. 손 맞잡은 강강술래처럼 당신의 마음도 둥글다. 모든 대립하는 것들이 둥근 원 안에서 하나 되고, 공존했다. 지난 9일 강원도 평창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패럴림픽 개막식은 ‘열정이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는 주제 아래 그렇게 동서와 남북을,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허물어 하나 된 감동을 전했다. 이날 개막식에서 원과 구의 이미지가 공존, 화합, 평화의 시각적 이미지를 구현하기까지 그 뒤에는 이 사람, 현대미술가 최정화(57) 미술감독이 있었다. 이문태 총감독과 고선웅 연출이 이끄는 평창동계패럴림픽 개·폐막식 감독단에서 최 작가는 미술감독으로서 행사 전반의 개념을 설계하고 시각적 구현방식을 이끌어냈다.
대표작 ‘알케미’ 앞에 선 현대미술가 최정화. /사진=송은석기자
“개막이 임박했는데 몇 날 며칠간 눈이 너무 많이 오는 거예요. 눈 치우느라 리허설할 시간이 없을 정도였어요. 다행히 개막일에 눈은 그쳤지만 행사 30분 전까지 안개가 자욱해 조마조마했습니다. 습기를 머금은 안개 때문에 영상과 조명이 제 색을 낼 수 없거든요. 그런데 개막식이 시작되자 서서히 안개가 걷히더라고요. ‘아 하늘이 돕는구나, 됐다’ 싶었습니다.”

패럴림픽 개막식을 마무리한 직후 강원도에서 잠시 서울로 넘어온 최 작가를 그의 개인전이 한창인 은평역사한옥박물관에서 만났다. 자신의 작품 하나 없이도 ‘최정화 색’을 고스란히 드러낸 그는 2년 가까이 준비한 개막식이 열리기 직전까지의 긴장감과 결과에 대한 만족감을 함께 드러냈다.

“전통과 현대가 어떻게 조화롭게 만나느냐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신명과 흥이 강조됐습니다. 감독단 전체의 일치된 마음이 꽃을 피운 것이죠. 환영무로 시작해 강원도가 자리 잡은 동해안의 울산 반구대 암각화로 이어졌어요. 원시 문화가 있는 한반도 그곳에서 아이들이 겨울 놀이를 즐기면서 장애와 비장애가 서로 돕고 똬리를 틀며 원심력과 구심력이 조화를 이룬 회오리를 만듭니다. 과거부터 현재가 단숨에 엮이죠. 오륜의 바퀴는 바큇살 있는 휠체어를 떠올리게 할 수 있겠지만 인연법의 법륜이기도 합니다. 만다라·단청·꽃문양이 돌면서 원을 이루고 물방울이 떨어져 이루는 듯한 파문은 공연 내내 관객을 몰입하게 만들죠.”

해·달·오륜기·휠체어 바퀴··· 모든 대립, 둥근 원에서 공존 장애·비장애 똬리 틀며 협력 패럴림픽 개막식 조화에 초점 18일 폐막식은 더 놀라울 것

전통과 현대 사이에 지속적으로 흐르는 정신. 이것은 작가 최정화의 작업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별스러울 것 없는 일상의 재료로 눈길을 끄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조형 능력으로 이미 1990년대부터 한국 미술계의 주요 작가로 불려 왔다. 대중적인 작품으로는 서울 종로구 공평동의 삼성밀레니엄타워 뒤에 우뚝 솟아 있던 요란한 금빛 10층탑 ‘세기의 선물’이 있다. 바로 옆 탑골공원에 자리 잡은 국보 제2호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보호를 명분으로 유리상자 안에 갇힌 것부터 경천사지 10층 석탑이 국립중앙박물관 내부로 이전한 상황을 풍자하며 작가는 진짜보다 훨씬 생생하고 화려한 ‘가짜’를 만들었다. 종로구의 명물이던 이 작품은 현재 호암미술관으로 옮겨갔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서소문 본관에서 정동길로 이어지는 조각공원에 놓인 커다랗고 빨간 플라스틱 꽃다발 ‘장밋빛 인생’, 국립민속박물관 내 오촌댁 안뜰에 박혀 있는 거대한 무 등은 일반인들이 오가며 볼 수 있는 최정화의 작품들이다.

“작가의 역할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관객에게 경험시키는 것이죠. 저는 전통에 관심이 많지만 궁중 전통이나 상류층의 전통이 아닌 민속·민화 같은 생활 속의 전통, 배제된 것들에 더 관심을 둡니다. 잊히고 버려지고 때로는 우리가 놓아버리고 가치를 주지 않았던 것에서 다시 가치를 되찾는 것이 내 작업이죠. 그래서 내 작업은 미술관보다 생활사 박물관에 더 잘 어울릴지 모릅니다.”

청소도구를 소재로 한 설치작품 ‘청소하는 꽃’ 앞에 선 현대미술가 최정화. /사진=송은석기자
최정화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알케미(Alchemy·연금술)’는 싸구려 플라스틱 그릇, 소쿠리, 못, 솔, 깨진 병 등 예상치 못한 소재로 제작되지만 눈부시게 아름답다. 천박하고 야하게, 때로는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그의 작품을 두고 ‘키치의 미학’이라는 평이 종종 따르고는 한다. “쓰레기와 예술의 차이가 어딨겠냐”고 반문하는 최 작가는 “나는 쓰레기가 더 좋지만 예술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수습했다.

은평역사한옥박물관은 이번에 공공미술프로젝트로써 은평한옥마을 전체를 전시장처럼 활용하며 공사장·공터·산책로 등 곳곳에 그의 작품을 선보였다. 마을 초입에 크기가 다른 개집 10개를 층층이 쌓은 ‘새집’에서부터 웃음이 터져 나온다. 세계 각국의 청소용구를 모아 꽃꽂이하듯 담아놓은 ‘청소하는 꽃’도 예리한 감각이 돋보인다. 아른아른 속이 비치는 밥상보를 층층이 연결해 나무 위에 걸어둔 ‘바람탑’은 바람이 불 때마다 운치 있게 나부낀다. 형광분홍색의 플라스틱 꽃들을 앙상한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은 ‘겨울꽃’은 계절을 앞섰다. 작품 재료는 하나같이 버려진 것 아니면 시장에서 산 것들이다. 신작은 쓰다 버리는 그릇으로 만들 참이다. 현대차의 후원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 형식으로 열리는 ‘MMCA현대차 시리즈’의 올해 작가로 선정된 최 작가는 ‘모이자 모으자’를 외치며 쓰임이 다한 식기를 소재로 한 ‘민들레:민(民)들(土)레(來)’ 프로젝트를 예정하고 있다.

“기억을 채집하는 일입니다. 쓰던 것, 사용 중인 물건은 한국의 오늘을 보게 하고 내일을 만들어줄 것입니다. 생활이 예술보다 중요하니까요. 버려질 물건들로 꽃을 만들어 민들레 홀씨처럼 다시 ‘당신들’에게 날아가 씨앗이 되게 하는 것이 계획입니다.”

현대미술가 최정화 /사진=송은석기자
모이고 화합해 공존과 평화를 모색하는 최 작가의 작품 저변에는 두 동강 난 한반도의 상흔과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깔려 있다. 두 개의 총을 총구를 맞붙여 액자에 넣은 작품 등이 대표적이다. “두 총이 떨어져 마주하면 ‘전쟁 중’이지만 맞붙어 쏠 수 없는 상황은 ‘전쟁이 멈춘 것’이니까”라는 작가의 설명은 결코 가벼이 들리지 않는다. “하하하(下下下) 허허허(虛虛虛) 낮추고 낮추고 비우고 비우고”라는 아재개그 식 그의 주장을 허투루 들을 일이 아니다.

서울에서의 일을 얼른 마무리 짓고 다시 평창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최 작가가 “폐막식은 개막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놀라울 것”이라며 “꼭 봐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빠듯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지치기는커녕 한껏 신난 그에게 ‘새로운 것을 보여주는 게 그토록 재밌느냐’고 물었다.

“기존에 있는 것들, 뻔한 것 갖고도 새롭게 보이게끔 하는 일인걸요. 사뮈엘 베케트(1906~1989)가 ‘낡은 나사의 새로운 회전’을 이야기했죠. 나는 버려진 쓰레기, 옛사람들의 유물, 동양사상의 근본···그런 것들만 들여다볼 뿐입니다. 폐막식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봄맞이가 될 거예요.”

우문에 현답한 그가 준비한 평창동계패럴림픽 폐막식은 18일 오후8시부터 평창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열린다. /글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사진 송은석기자

He is···

△1961년 서울 △1980년 대신고 졸업 △1987년 홍익대 회화과 학사 △1987년 중앙미술대전 대상 △1997년 제5회 토탈미술상 △1998년 상파울루비엔날레 △2005년 제7회 일민미술상 △200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200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올해의 예술상 △2013년 세토우치트리엔날레 △2014년 후쿠오카트리엔날레 △2018년 평창동계패럴림픽 개·폐막식 미술감독 △2018년 9월 ‘MMCA 현대차 시리즈’ 전시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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