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보기] 태극기를 게양하는 이유

손이상 2018. 3. 16.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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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애국심이라는 개념은 멀쩡한 지성인이라면 꺼리는 것이 되었다. 이름에 애국을 붙인 몇몇 단체들이 명예라고는 모르는 행위를 너무 자주 저지른 탓이다. 지난 삼일절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희망촛불’ 조형물을 때려부수고 불을 질렀다. 나는 그날 광화문에 들렀다가 현장 근처를 지나게 되었는데, 대낮에 공공조형물을 부순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었다.

부끄러움은 점잖은 사람만이 느끼는 감정이다. 한 저명한 진보인사를 만난 일이 있다. 그는 내가 국경일마다 태극기를 내건다고 말하자 깜짝 놀라며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유를 여쭈었다. 태극기 하면 그 숱한 자칭 애국자들의 무교양과 무질서가 자동으로 떠오른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런 이미지가 부끄러움을 만든다. 태극기를 내걸면 자신이 그들과 동류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젊고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애국의 가치를 낮게 보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수 있다. 3년 전 리서치앤리서치가 발표한 국민의식조사에 따르면, 국민통합을 위해 노력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장년층은 애국심을 많이 꼽았지만, 젊은 세대로 내려갈수록 그 비율이 줄어들어 20대는 고작 6.2%였다. 또한 학력이 높을수록 애국심을 꼽는 비율은 현격히 떨어져, 대졸 이상에서는 7.5%에 불과했다. 아예 애국심에 거부감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애국심이 고양감 대신 반대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애국심이란 소속의 감정이다. 자신이 속한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애국심의 원천이다. 나라란 하나의 큰 사회공동체일진저, 이 공동체에 동의하지 못하고 환멸을 느낀다면 각각의 구성원이 애국심을 가질 리 만무하다. 이렇게 의식이 변하니 담론도 바뀐다. 몇 해 전부터 ‘헬조선’이라는 하나의 유령이 한국을 배회하고 있다. 소속감 없는 개인으로 흩어진 사람들 사이에 국가적 문제를 관조하는 태도가 스며들었다.

모래알 같은 개인들은 힘이 없다. 국가로부터 거리를 두고 냉소하고 비웃을 뿐, 그것을 더 나은 공동체로 만들려는 정치적 힘을 갖지 못한다. 그렇다면 애국심이 희박해져 가는 현상을 마냥 긍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분명 과도한 애국심은 지난 세기 세계전쟁의 배경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문명의 퇴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증오범죄와 인종차별 또한 자국 중심주의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흩어진 개인들의 사회 역시 문제점이 있다. 개인들의 사회는 서로가 서로에게 비교대상이자 경쟁자가 되어 끊임없이 갈등이 일어나는 사회다. 갈등을 조절하고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사람들은 어딘가에 소속되기를 희망한다. 그런 가짜 소속감은 상상 속에만 있는 ‘좋았던 옛 시절’을 불러와서 잘못된 과거를 반복하거나, 일제가 박았다는 쇠말뚝이나 잠실 아래에 있다는 북한 땅굴과 같은 미신을 통해 유지된다.

애국심은 악마적 측면만 가진 것이 아니다. 애국심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공통의 정체성을 갖게끔 하여 사회연대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조지 오웰은 애국심을 보수주의의 반대라고 생각했다. 변화를 위한 헌신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중요한 것은 애국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 없는 대상을 향해 바치는 봉건적 맹목성이나 국가로부터 강제되는 전체주의적 사고로부터 진정한 애국심을 떼어놓는 것이다.

내가 국경일마다 거르지 않고 태극기를 게양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 깃발은 1960년 권력자의 동상을 끌어내린 자리에 나부꼈던 깃발이며, 1980년 총칼로 무장한 계엄군 앞에 선 시민들이 들었던 깃발이기 때문이다. 또한 1987년 독재자를 물러나게 만든 평화행진 대오를 이끌던 깃발이며(그 유명한 사진은 고명진 당시 한국일보 기자가 촬영했다), 1988년 주안 7공단 노동자들이 사망한 여공 송철순의 유해 위에 덮은 깃발이기도 했다.

손이상 문화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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