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쌤, 반말하면 안 돼요~"..'태움 반대' 배지 만든 간호사들

홍상지 2018. 3. 15.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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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신촌 세브란스병원 노동조합이 제작해 간호사들에게 배포한 태움방지 배지. 김정연 기자
지난 13일 오후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의 한 병동에서 6명의 간호사들이 쉴 새 없이 병실과 근무실을 돌아다니며 일하고 있었다. 간호사들의 근무복 왼쪽 가슴에 분홍색의 둥근 배지가 달려 있었다. 배지에는 '반말 금지''인격모독 금지' 등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9년 차 간호사 이은이(37)씨는 "배지 단 지 10일 됐다. 이거 보고 못 받은 직원들은 '어디서 났느냐'며 '나도 하나 달아야겠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이 배지는 지난달 말 세브란스병원 노동조합이 간호사들에게 배포한 '태움 반대' 배지다. '태움'은 '영혼이 재가 되도록 태운다'는 데서 나온 은어로 선배 간호사가 신임 간호사를 교육하는 과정서 벌어지는 간호사 집단 내 괴롭힘을 의미한다. 노조는 '욕설 금지''태움 금지''상호존중''반말 금지''귀한 자식' 등 다양한 문구가 담긴 배지를 제작했다. 세브란스병원 소속 간호사가 약 4000명(정규직·비정규직 포함)인데 지금까지 1200개의 배지를 병원 구내식당 앞에서 간호사들에게 나눠줬다.

김은희 세브란스병원 노동조합 노동안전국장은 "태움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다 같이 젖어있는 관습이었다. 배지에 적힌 문구를 보면서 서로 조심하자는 취지"라며 제작 이유를 설명했다. 노조는 지난달 15일 숨진 고 박선욱 간호사를 애도하는 의미에서 검은색 배지도 만들었다. 실제로 박 간호사의 사망 이후 유족들은 그의 죽음이 직장 내 '태움' 때문이라고 주장했고 경찰은 수사를 진행 중이다.

13일 신촌 세브란스병원 간호사들이 '반말금지' 문구가 적힌 태움반대 배지를 달고 있다. 김정연 기자
현장 반응은 긍정적이다. 6년 차 간호사 한모(27)씨는 '반말 금지'배지를 달고 있었다. 한씨는 "여기는 병동 분위기가 원래 나쁘지 않았지만, 바쁘고 예민할 때에는 말이 날카로워지기도 한다"며 "병동 내에서 이야기하다가도 장난처럼 배지를 내밀면서 '쌤, 반말하면 안 되는데~'라고 한다"고 들려줬다. 그는 "신규 간호사들한테는 일부러 '태움 근절' 배지를 달아주기도 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배지의 여러 문구 중 가장 인기가 많은 건 '반말 금지'라고 한다. '인격모독 금지'가 그다음이다. 간호사들끼리 경각심을 갖는 효과 외에도, 환자나 환자 보호자에게 보여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근무 6개월 차 간호사 김모(24)씨는 "나이가 어려 보호자들에게 반말을 많이 듣는데 '반말하지 마세요'라고 직접 말은 못해서 늘 속상했다"며 "'반말 금지'를 달고 나서 보호자 분들의 반말 횟수도 줄어든 것 같다"고 했다. 환자 보호자로 병원에 있던 정영란(37) 씨도 배지를 보며 "간호사분들에게 말을 걸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순천향대학교 부천병원 노동조합도 병원 측과 협력해 태움 반대 배지를 제작했다. 1800명 직원에게 800개를 배포해 현장 반응을 지켜보고 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시각적 자극 자체가 사람을 한 번 더 생각하게 한다"며 "그 뜻에 동감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일종의 '선언 효과' 때문에 참여의식이 높아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대한간호협회 측은 "다른 병원 간호사들도 함께 '배지 달기'에 동참한다면 그 의미가 더 커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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