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말아주세요'..합판 위 붓질로 기록한 후쿠시마의 진실

2018. 3. 15.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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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작가 쓰보이 아키라 인터뷰-
원전사고 이후 벌어진 부조리
'비밀주의'로 쉬쉬한 일본 정부
후쿠시마에서 목격한 사실들
절제된 무채색 유화로 증언

반핵 전시 '핵몽2' 참가차 방한
대도시 부산 옆 고리원전에 충격
"촛불로 민주주의 지킨 한국인들
핵 문제엔 덜 민감한 느낌"

[한겨레]

‘스피디 문제와 모유’ 앞에 선 쓰보이 아키라.

‘왜 잊어버립니까?’

일본 작가 쓰보이 아키라(42)의 물음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부산 영주2동 부산민주공원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반핵·탈핵 전시회 ‘핵몽2’에 나온 쓰보이의 작품은 흐릿해져가는 후쿠시마의 기억을 소환하는 ‘회화 르포르타주’라고 할 수 있다. 비극적 현실을 회피하려는 인간의 나약함, 이기심과 대면하면서 “왜 알려 하지 않고, 왜 보지 않으려 하며, 왜 쉽게 인정해버리냐”는 고통스러운 물음표를 화폭에 담는 쓰보이를 12일 전시장에서 만났다.

‘원전사고 피난-제일 먼저 도망간 사람들’
‘원전사고 피난-제일 먼저 도망간 사람들’

2011년 3월11일 동일본대지진으로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도쿄에서 사회복지사로 평범하게 살던 쓰보이의 인생을 바꿔놨다. 같은 해 여름, 쓰보이는 정부가 방사능 농도가 매우 높은 지역에서 자원봉사자를 모집해 오염 토양을 치우려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일본 정부는 사건 초반 ‘비밀주의’로 일관하며 허둥댔다. 원전 사고 이후 방사능 물질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시스템(SPEEDI)을 갖추고 있었으면서도 주일미군에만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며 일반 국민들에게는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정부가 많은 것을 숨기고 있다”는 의심을 품은 그는 “현장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기 위해” 후쿠시마로 갔다. 원전사고 발생 직후 도쿄전력이 이웃 주민들에겐 입을 닫은 채 회사 직원·가족만 챙겨 버스로 피난시켰다는 증언을 들었고, 고향에 남을 것인가를 놓고 남편과 갈등을 빚다 이혼 위기까지 이른 한 여성이 혼자 출산을 했는데, 모유가 세슘 기준 수치를 훌쩍 넘어 아이에게 젖을 먹일 수 없었던 서글픈 사연도 들었다. 전학 간 학교에서 “더럽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한 후쿠시마 아이들, 보조금이 끊겨 어쩔 수 없이 위험한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가족들의 이야기도 전해들었다. 도쿄전력은 원전사고 수습 작업에 가난한 이주노동자·노숙인들을 대거 고용했는데, 폭력배(야쿠자) 조직과 얽힌 청부 인력업체들이 이 하청 노동자들의 급여를 90%까지 떼먹는 ‘착취의 사슬구조’도 알게 됐다.

‘2012년 8월22일에 죽은 하청 노동자’

본래 미술 전공자는 아니었지만 틈틈이 그림을 그려왔던 쓰보이는 분노와 절망 속에서 후쿠시마의 실화를 그림으로 담아냈다. 그는 ‘원전사고 피난-제일 먼저 도망간 사람들’ ‘원전사고 피난-옥내피난지역’ ‘2012년 8월22일에 죽은 하청 노동자’ ‘목구멍이 잘린 아이들, 3개 현의 갑상선 비교 조사’ ‘스피디 문제와 모유’ 등 마치 보고서 제목 같은 이름을 달고 있는 작품들을 일본 시내 곳곳에서 전시했다. 현장에서 길어올린 구체적인 팩트들을 값싼 베니어 합판에 정교한 필치로 풀어낸 무채색의 유화는 원전의 열기도 다 녹여 없애지 못한 ‘핵의 진실’을 증언한다. 유화물감을 사용했지만 표면이 거칠거칠한 갈색 합판 위에서 쓰보이의 그림은 절제된 동양화의 느낌을 풍긴다. 이 중 ‘3·11 지진과 원전, 당연히 없을 터였던 용을 본 소장’이란 작품은 대지진이나 해일의 원인을 땅속 깊이 사는 용의 뒤척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일본 설화를 바탕으로 한다. 반쯤 눈을 뜬 용은 곧 움직일 터이지만, 도쿄전력은 용의 경고를 무시하고 원전을 건설했다가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겪었다. 원전 건설의 대가로 받은 경제적 지원에 안락하게 살아갔던 후쿠시마 주민들, 위험을 예고하는 용의 역동적인 자태, 위험한 우라늄 채굴 노동에 희생된 아메리카 원주민 등을 힘차면서도 섬세한 필치로 표현했다.

‘3·11 지진과 원전, 당연히 없을 터였던 용을 본 소장’
‘고리, 부산, 한국을 위하여’

‘핵몽2’ 전시 준비를 위해 지난 1월 그는 일본의 직장을 그만두고 한국에 왔다. 월성·고리·영광 일대의 원전을 답사했고, 전시에 참가하는 작가들의 아틀리에를 돌아보며 끊임없이 그렸다. 무엇보다 350만명 이상이 사는 대도시 부산과 원자력발전소(고리) 거리가 30㎞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30㎞는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한 직후 대피 지시가 내려진 기준 거리였다. 이번에 첫선을 보인 작품 ‘고리, 부산, 한국을 위하여’엔 고리원전이 지어지기 전 마을 풍경 사진과 옛사람들의 사진이 등장한다. 그는 “촛불집회에서 보듯 한국인들은 민주주의 가치를 지켜내려 애썼고 정권도 교체했지만 핵 문제에 대해선 덜 민감하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그러나 앞으로 지방자치가 더 발전한다면 더 많은 한국인들이 핵의 위험에 대해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핵몽2’ 전시회는 쓰보이를 포함해 홍성담·정정엽·방정아·박미화·이동문·박건·정철교 등의 한국 작가가 참여했으며, 4월8일까지 민주공원에서 열린 뒤 4월12일~5월2일 광주 은암미술관에서 순회전을 연다. (051)790-7414. 부산/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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