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의 과학카페] 한 시대를 풍미한 과학자 스티븐 호킹을 기리며..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2018. 3. 14.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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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런던 장애인 올림픽 개막식에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 (대한장애인체육회 제공)

“나는 알차고 흡족한 삶을 살았다. 장애인은 장애가 걸림돌이 되지 않는 일에 집중하고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아쉬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 스티븐 호킹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자로 꼽히던 영국의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 14일 오전(현지시간) 76세로 타계했다. 근육이 굳어 말조차 할 수 없는 사실상 전신마비 상태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때로는 비난을 자초하는 돌출발언들도 내놓던 호킹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지금 한 시대가 저물었다는 느낌도 든다. 지난 2013년 출간한 자서전 ‘나, 스티븐 호킹의 역사’를 토대로 그의 삶과 업적을 되돌아본다.

스티븐 호킹. 1980년대 모습이다. - NASA 제공

시한부 선고 받고 삶을 진지하게 생각해

현대 물리학의 창시자인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죽은 1942년 1월 8일에서 정확히 300년이 지난 1942년 1월 8일 영국 옥스퍼드에서 태어난 호킹은 물리학자가 될 운명이었을까. 정작 그는 책에서 “그날 태어난 아기가 나 말고도 20만 명쯤은 될 것이다”라며 이런 견강부회를 일축했지만 말이다.

호킹의 아버지는 의사였고 역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당시로는 드물게 옥스퍼드대를 나와 직장생활도 경험했다. 2차세계대전 직후였음을 고려하면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음에도 명문 사학인 웨스트민스터 스쿨에 갈 형편은 안 되었기 때문에 장학생 시험을 쳤지만 보기 좋게 떨어지고 세인트 올번스 스쿨에 진학한다. 호킹은 수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강력히 반대하며 의학이 정 싫으면 화학을 전공하라고 회유했다. 1959년 옥스퍼드대에 진학한 호킹은 물리학을 택했다.

스스로 “공부를 등한시했다”고 평가한 대학시절이 끝나갈 무렵 호킹은 공무원에 지원했지만 필기시험 날짜를 깜빡해 실패했고 그 대안으로 1962년 케임브리지대에 진학했다. 당시 저명한 천문학자였던 프레드 호일을 지도교수로 삼고 싶었으나 받아주지 않아 데니스 시아마 교수 밑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당시 현대 물리학의 양 축인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은 대조적인 입장에 있었다. 즉 상대성이론은 1930년대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반면 양자이론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학부시절부터 우주론에 관심이 많았던 호킹은 상대성이론을 깊이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편 호킹은 옥스퍼드대 졸업반 때부터 몸놀림에 이상을 느꼈고 케임브리지에서는 숨길 수 없는 지경이 돼 종합검진을 받았는데 의사로부터 “이례적인 병”이라는 말을 듣는다. 딱히 해줄 게 없는 의사들은 대학에 돌아가 하던 연구를 계속하라고 위로해주는 게 고작이었다.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삶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즉 그동안 지루하다고만 여겨졌던 삶이 몹시 소중하게 다가왔고 사귀던 여자친구 제인 와일드와 약혼까지 했다. 결혼과 취직을 위해 빨리 학위를 받아야겠다는 ‘목표’가 생긴 호킹은 “난생 처음으로 노동하기 시작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대학에서 연구원직을 얻은 호킹은 1965년 제인과 결혼했지만 몸 상태는 점점 더 나빠져 걷기도 힘든 지경이 됐다. 1967년 아들 로버트가 태어났고 3년 뒤 딸 루시가 태어났다.

고등과학원 제공

호킹이 박사과정을 하던 시절은 프레드 호일의 ‘정상우주론’, 즉 우주의 평균 밀도가 일정하게 유지돼왔다는 이론이 주류였지만, 1965년 마이크로파 배경복사가 발견되면서 치명타를 입었다. 우주의 과거에 뜨겁고 조밀한 단계가 있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호킹은 “수축하던 우주가 높지만 유한한 어떤 밀도에 이르러 다시 팽창하기 시작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았고 이해 저명한 이론물리학자 로저 펜로즈가 증명한 특이점(singularity)에 주목했다. 특이점은 죽음을 맞이하는 별이 특정 반지름까지 수축하면 발생하는 공간과 시간이 끝나는 지점이다. 호킹은 우주의 팽창에 이를 역으로 적용해 시공이 시작된 특이점, 즉 빅뱅(big band)이 존재함을 증명했다. 1966년 호킹은 이 결과를 담은 박사학위논문을 썼고 대학에서 에덤스상을 받았다. 

1970년 호킹은 블랙홀로 관심을 돌렸는데 당시는 블랙홀에 대한 관찰 증거가 전혀 없던 시절이다. 1975년 호킹은 양자이론과 상대론을 결합해 블랙홀도 전자기파(빛)를 방출한다는 놀라운 결론을 얻었다. 오늘날 호킹복사(Hawking radiation)으로 불리는 이 현상의 발견으로 호킹의 시대가 시작됐다. 그런데 블랙홀 복사가 일어나면 에너지가 빠져나가 결국은 블랙홀이 증발돼 사라진다. 이때 블랙홀의 정보도 사라진다면 이는 양자이론을 위배하는 일이고 따라서 ‘정보역설’이라고 부른다. 

이를 두고 호킹과 (중력파 연구로 지난해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킵 손은 1997년 미국 칼텍의 존 프레스킬과 내기를 했고 30년 가까이 지난 2004년 호킹은 정보가 사라진다는 자신의 주장이 틀렸다며 프레스킬에게 야구백과사전을 선물했다. (자세한 내용은 ‘과학동아’ 2004년 9월호 76쪽 ‘호킹은 왜 자신의 블랙홀 이론을 수정했나’ 참조.)

호킹은 왜 자신의 블랙홀 이론을 수정했나 - 과학동아 2004년 9월호 제공

호킹은 1979년 아이작 뉴턴과 폴 디랙의 뒤를 이어 케임브리지대 루카스 수학교수에 선출되는 영광을 누렸다. 참고로 호킹복사는 디랙의 반물질 개념을 블랙홀 표면에 적용해 얻은 결과다. 이 해에 셋째 팀이 태어났다.

이런 중에도 호킹의 상태는 조금씩 나빠졌고 1985년 폐렴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 기관절개 수술을 받고 기적처럼 회복됐다. 그러나 수술로 발음이 불분명하나마 할 수 있었던 말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됐다. 그 뒤 호킹은 특수장치로 뺨을 움직여 문장을 만들고 우리도 한두 번은 들어본 적이 있는 음성 합성기로 ‘말했다’.

한편 오랜 세월 남편을 간호하던 제인이 지쳐감에 따라 서로 사이가 멀어졌고 결국 이혼을 하기에 이르렀다. 호킹은 간호사 일레인과 1995년 재혼했다. 그리고 일레인 역시 오랜 간호로 소진돼 2007년 이혼했다.

‘시간의 역사’로 대중 관심 한 몸에 받아

일반인들이 호킹 하면 떠오르는 건 루게릭병과 그의 저서 ‘시간의 역사’일 것이다. 호킹은 “우주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어디까지 이르렀는지를 내가 느끼는 대로 설명하고 싶었다”는 동기와 함께 “돈을 벌어 딸의 학비를 대자”는 것도 이 책 집필의 이유라고 쓰고 있다. 1984년 초고가 완성됐지만 숱한 우여곡절을 거쳐 1988년에야 출판됐는데 즉시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40개 언어로 번역돼 천만 부 넘게 팔렸다. 이 현상에 대해 호킹은 “내가 장애를 딛고 이론물리학자가 되기까지의 흥미로운 사연이 책의 판매에 도움이 되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인정했다. 그 뒤에도 호킹은 대중 과학서를 몇 권 더 썼고 딸 루시와 함께 작업하기도 했다.

A Brief History of Time (1998)

호킹은 일반인들이 관심을 가질 주제에 대해 의견을 내는 걸 주저하지 않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시간여행이다. 호킹은 자서전에서 “시공의 배경에서 일어나는 양자요동은 미시 규모의 웜홀과 시간여행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도 “거시적인 물체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고 시간여행은 영원히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고 쓰고 있다. 

호킹은 2012년 런던 장애인 올림픽 개막식에서 연설하는 행운까지 누렸다며 “나는 알차고 흡족한 삶을 살았다”고 자평했다. 호킹은 “장애인은 장애가 걸림돌이 되지 않는 일에 집중하고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아쉬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고 담담히 말했다. 이런 마음가짐이었기에 1963년 21살의 나이에 루게릭병 진단을 받고 나서도 50년 넘게 기적적으로 삶을 지속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그동안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겼다). 

평창 패럴림픽 폐막식 때 호킹을 기리는 시간이 마련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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