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기기 직구, 엄마들이 뿔났다

2018. 3. 14. 09:3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ㆍ복잡한 서류와 사업자등록증까지 필요… 식약처 ‘절차’는 현실적으로 어려워

올해 10살인 김미영씨의 아들은 ‘소아당뇨’로 불리는 1형 당뇨환자다. 생후 36개월에 1형 당뇨 진단을 받았다. 아이는 4살 때부터 혼자 혈당 체크를 했고 5살에는 자기 배에 주사를 놓았다. 아이가 안쓰러웠던 김씨는 해외 사이트에서 피를 뽑지 않고도 혈당 체크가 가능한 ‘연속혈당측정기’를 찾아 구입했다. 엔지니어 출신인 김씨는 혈당측정기에 스마트폰 앱을 연동시켜 원격으로 혈당을 체크할 수 있도록 개조했다. 같은 처지에 있는 부모들이 모인 소아당뇨병 환자 커뮤니티에 후기를 올렸더니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도움을 요청하는 환자 가족을 위해 김씨는 2016년 5월부터 28차례에 걸쳐 해당 기기를 공동구매했고, 측정기에 스마트폰을 연동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김씨의 ‘선의’는 미담으로 끝나지 않았다. 김씨는 지금 허가 받지 않은 의료기기를 수입해 부당이득을 챙긴 데다 불법개조를 한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김씨의 행위가 의료기기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판단했고, 세 차례 조사를 거쳐 지난 5일 검찰에 송치했다.

1형 당뇨를 앓고 있는 아이들이 김미영씨를 위해 쓴 탄원서. / 스타트업 법률지원단

식약처 설명에 분노하는 환자 가족들

식약처는 본인 혹은 가족의 질병을 치료할 목적, 자가용이라는 사실만 입증해서 절차를 밟으면 ‘해외직구’를 통해 얼마든지 해외 의료기기를 들여올 수 있다고 했다. 합법적인 방법이 있는 만큼 김씨의 행위는 불법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김씨를 비롯한 환자 가족들은 식약처의 설명에 분노했다. 김씨는 “사업자가 의료기기를 수입하기 전에 임상실험을 하기 위해 만든 제도를 갖고 도움이 필요한 환자를 위한 제도인 듯 포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환자 가족들이 식약처에 화가 난 이유는 해외 의료기기 사용제도의 맹점에 있다. 식약처가 말하는 ‘합법적’인 해외 의료기기 사용과정을 따라가보자. 개인이 치료 목적으로 의료기기를 사려면 먼저 관할지역 식약청에 ‘시험용 의료기기 등 확인서’를 받아야 한다. 확인서를 받기 위해서는 많은 서류를 사전에 준비해야 한다. 먼저 해당 제품의 모양과 성능, 용도를 확인할 수 있는 문서가 필요하다. 또 예정 사용기간을 미리 계산해서 상세한 사용계획서를 작성해야 한다. 아울러 해당 의료기기가 필요한 응급환자임을 입증하는 의사의 소견서나 진단서를 병원에서 받아다가 첨부해야 한다. 여기에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 내역과 같은 해외 당국의 허가 여부를 증빙할 내역도 제출해야 한다. 식약처가 요구하는 서류는 여기까지다. 서류를 내고 식약처의 심사 결과를 기다리면 된다. 하지만 ‘해외 의료기기 직구’를 위한 여정은 이제 시작이다.

해외 의료기기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수입신고가 필요하다. 개인 치료 목적으로 의료기기를 들여오더라도 개인 명의로는 수입이 불가능하다. 먼저 사업자등록을 하고 사업자번호를 받는다. 다음은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에 가입해 표준통관 예정보고 절차를 밟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관세청을 통해 통관 고유부호도 발급 받는다. 각종 수수료는 물론 세금 신고 등 개인이 처리할 몫이다. 우여곡절 끝에 의료기기를 손에 넣는다고 해도 끝이 아니다. 사용 후에는 관할 식약청에 종료 보고를 해야 한다. 종료 보고는 사용 종료일 10일 이내로 해야 하는데, 사용계획서에 명시한 대로 사용했는지, 사용한 뒤 폐기는 어떤 방식으로 했는지 등을 작성해 내야 한다. 식약처 말대로 ‘합법적’인 절차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개인이 해외직구로 의료기기를 구입하기는 쉽지 않다. 한 소아당뇨환자 부모는 “의료기기를 구하기 위해 사업자등록까지 받았다가 포기했다”며 “수입과정이 너무 어려워 개인이 접근하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성춘일 변호사는 “일반인들은 구입하려는 의료기기가 허가대상인지 신고대상인지도 파악할 수 없다”며 “수입절차도 상세히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식약처가 무리한 법 적용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다보니 실제 식약처로부터 개인이 자가용을 목적으로 ‘시험용 의료기기 등 확인서’를 받는 사례는 거의 없다. 한 광역시 소재 지방식약청 관계자는 “지난해 자가용으로 시험용 의료기기 등 확인서를 신청한 사례는 2건”이라며 “올해는 아직 신청한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해외 의료기기 구매를 위해 관할식약청에 제출해야 하는 시험용 의료기기 등 확인서.
정식 수입품은 해외보다 5배 비싸기도

의료기기업체가 정식 허가를 받고 들여온 의료기기 역시 사용하기가 녹록지 않다. 같은 제품이라도 국내 판매가격은 해외 사이트보다 비싸다. 많게는 5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 특히 의료 소모품이 꾸준히 필요한 홈케어 가정에서는 의료비를 감당하기 어렵다. 일부 품목은 해외 구입비가 국내 수리비보다 저렴하다. AS를 포기하면서까지 해외직구 사이트를 찾는 이유다.

온라인에서는 해외직구를 원하는 환자와 의료기기 수입업체 간 갈등이 끊이질 않는다. 일부 업체에서는 해외직구 자체가 불법이라며 여론전을 벌이기도 한다. 개인 블로그나 커뮤니티에 의료기기 구매 후기를 올렸다가 의료기기 업체로부터 신고를 당해 감독기관으로부터 제재를 당하는 사례도 빈번하다. 홈페이지에 해외 의료기기에 대한 구매정보를 올렸다가 국민신문고를 통해 신고를 당한 한 블로그 운영자는 “호주와 미국에서 정식으로 판매되고 있는 제품을 해외구매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조차 법적으로 문제 삼는 건 조금 억울하다”는 뜻을 밝혔다. 특히 “해당 제품의 국내 판매가격이 왜 해외 판매가격보다 2~3배 비싼지 의문스럽다”고 덧붙였다. 식약처는 의료기기에 대한 구매정보를 공유하는 행위 자체를 불법으로 판단하고 있다. 식약처 관계자는 “의료기기에 대한 후기는 어떻게 보면 광고행위가 될 수 있다”며 “건강기능식품도 복용 후기를 쓰는 건 광고행위로 본다”고 말했다.

까다로운 건강보험급여제도 역시 환자 가정의 의료비 부담을 키우는 데 한몫 한다. 뇌병변 장애인들에게 흔히 발생하는 척추측만증 예방을 위해 사용하는 자세유지보조기구도 중증·중복 뇌병변 장애인 부모회에서 5년 동안 투쟁한 끝에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중애모 초대 회장이었던 엄해경씨는 “자세유지보조기구는 1대 1 맞춤제작이어서 상당히 비싸다”며 “건강보험급여 품목에 넣기 위해 부모들이 오랫동안 힘든 싸움을 했다”고 말했다. 이후 엄씨는 다른 부모들과 함께 장애인을 위한 기능성 제품을 만드는 회사를 세웠다. 엄씨는 “아픈 아이들은 필요한 제품이 많지만 비싸거나 국내에 없는 게 대부분”이라며 “정부에 건의도 하고 업체에 아이디어도 전달했지만 바뀌는 게 없어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 주간경향 (weekly.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향신문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Copyright © 주간경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