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기업인의 눈물]①"운전기사 있는데..유력 정치인, 차안서 성추행"

이승환 기자 2018. 3. 13. 06: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유명 기업인들도 피해 고백, "높은 사람 옆에 상납하듯 앉혀"
자금·판로 보복 두려워 '미투' 동참 못해..정부 문제의식도 '안일'

[편집자주]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사회 전반으로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경제계는 미투 열풍의 무풍지대다. 반면 <뉴스1>이 만난 상당수 여성기업인들은 "성희롱·성추행은 너무 빈번해 특별하지 않을 정도"라고 입을 모은다. 가해자는 정치인부터 투자자와 공무원까지 다양했다. 하지만 쉽게 입을 열 수가 없다. 자칫 회사 전체가 흔들릴 수 있어서다. 직원들의 생계를 생각하면 더 나서기 어렵다. 남 모르게 눈물 흘리고 있는 여성기업인들의 실상을 들여다봤다.

© News1 최진모 디자이너

(서울=뉴스1) 이승환 기자 = #1. "운전기사가 있는데도 '그 짓(성추행)'을 했습니다. 그것도 유력 정치인이란 사람이 말이죠"

중소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여성 기업인 A씨(40대)의 '고백'이다. 수 년 전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산업 현안 관련 회의에 참석해 그 '정치인'을 만났다. 그는 유력 야당에 속해 있는 현직 국회의원이다.

회의를 마치고 A씨는 그와 반주를 곁들인 저녁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정치인은 "인근까지 데려다 달라'고 요청해 A씨는 자신의 차에 그를 태웠다. 운전기사가 있는데 무슨 일이겠나 싶었다.

그러나 정치인은 A씨를 껴안으며 추행했다. A씨는 "'왜 이러냐'고 소리쳐 겨우 그를 떼어놓았다"며 "아무렇지도 않게 '그 짓'을 하는 걸 보니 상습범임을 확신했다"고 말했다. A씨는 그날 이후에도 한동안 그의 연락에 시달려야 했다.

#2. '1세대 여성 벤처인' B씨(50대)도 몇년 전 겨울 비슷한 경험을 했다. 중소기업 정책 담당 중앙부처 전직 고위 공무원을 포함해 공기업 직원, 교수 등이 참석한 저녁 모임이었다. 대여섯 명의 참석자 가운데 여성은 B씨가 유일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서 이들은 노래주점으로 향했다

B씨는 자신의 명성을 믿었다. 언론에서 '여성을 대표하는 기업인'이라고 소개하는 자신을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 차관급 공무원이 노래주점에서 B씨를 끌어당겨 껴안았다. B씨는 "강제로 블루스를 췄다"며 "너무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라 아무 저항을 할 수 없었다"고 당시를 설명했다.

B씨는 "지금도 수치심에 부들부들 떨린다"고 털어놨다. 나긋하게 말하던 B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는 그 사람의 얼굴을 평생 잊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그 짓’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아 더 화가 난다"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기업인마저도 성폭력 앞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들은 "성희롱·성추행은 너무 빈번해 특별하지 않을 정도"라고 한목소리를 냈다. 험한 꼴을 겪지 않은 기업인들은 "다행히 무사했다"고 회상할 정도다.

© News1 최진모 디자이너

윤소라 한국여성벤처기업협회 회장은 지난 12일 <뉴스1>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다행히' 안 겪었지만 협회 회원을 포함해 상당수 여성기업인이 성폭력 위험에 노출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기업인들은 정치인·공무원·학자·동료 기업인 등과의 인적 관계망(네트워크)에 많은 공을 들일 수밖에 없다. 민관 협력 사업이나 정부 지원 사업 참여, 판로 확대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는 네트워크를 만들려면 '술자리'가 필수다. 문제는 A씨와 B씨처럼 영향력있는 기업인이라도 술자리에선 '여자'로 취급받는다는 점이다.

B씨는 "가장 권력 있는 남성의 옆자리에는 늘 여성 기업인을 앉힌다"며 "배려라기보다 마치 상납 당하는 기분"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통업체를 운영하는 여성기업인 C(50대)씨는 "영업 사원이 가도 되는 제품 거래 현장에 '여자 사장이 오라'고 해서 당혹스럽기도 했다"며 "비즈니스를 위한 아무리 좋은 모임이라도 술 먹는 분위기면 아예 피했는데, 내가 남자였으면 지금 회사 규모가 몇 배 더 컸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 최고경영자(CEO)들이 '아직 한국 사회는 여성이 기업을 경영하기 힘든 환경'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비즈니스 만남 자체가 부담스럽기 때문에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정부의 문제 인식이 안일하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실제로 중소벤처기업부와 한국여성경제인협회가 4526개 기업을 조사해 작성한 '2017년 여성기업 실태조사' 보고서에는 성폭력 관련 질문이 빠져있다. 응답자 42.1%가 창업 준비 과정에서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답했다. 판로확보를 애로로 지목한 응답 비율도 28.8%나 됐다. 여성 기업인들은 성폭력 관련 질문이 있었더라면 설문조사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김은실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는 "남성이 지배하는 기득권 사회에서 여성기업인 같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여성은 남성과 경쟁하는 동시에 이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한다"며 "이 과정에서 남성이 여성의 성을 도구화해 성폭력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여성기업인이 가진 부·지위와 무관하게 그들이 속한 집단에서 성적 착취·억압을 당했느냐에 초점을 두고 성폭력 문제를 접근해야 한다"며 "여성의 성적 매력·외모에 가치를 두고 평가하는 남성 중심의 문화가 개선되면 여성 기업인들은 더 자유롭게 역량을 발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mrlee@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