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g당 70원으로 떨어졌어요" 78살 폐지 할머니의 한숨

2018. 3. 8.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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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폐지 수집 10여 년 안인식 할머니 영등포구 115명 전원 방문상담 눈길

지난 2월20일 오후 영등포구 도림고가 아래에서 안인식 할머니가 모아놓은 상자 더미를 손수레에 옮기고 있다.

지난 2월20일 오후 4시께 서울 영등포구 도림고가도로 아래. 새벽녘의 혹한은 물러가고 오랜만에 영상의 기온을 보이는 날씨지만, 안인식(78) 할머니는 두툼한 외투에 모자, 마스크로 온몸을 중무장한 채 쌓아놓은 상자를 손수레에 바쁘게 옮기고 있었다. 새벽에 나와 오전 내내 20kg 정도 폐지 상자를 주워서 단골 고물상으로 가져갔지만, kg당 80원 하던 시세가 70원으로 떨어졌다며 값을 후려쳤다. 오전 중 안 할머니의 벌이는 겨우 1400원. 그래도 몸을 부지런히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모아놓은 폐지를 다른 폐지 수집 노인들이 몰래 집어가 낭패를 보기도 한다. 때로는 다른 주민들에게서 폐지 상자를 치워달라는 민원을 받기도 한다.

할머니는 쉬는 날도 없이 날마다 폐지를 모은다. 일하는 시간은 대중없지만 8~9시간쯤 일한다. 이렇게 일해서 “많이 할 때는 30~40kg쯤 한다”고 한다.

폐지 수집으로 한 달에 얼마쯤 벌까? “10만원 조금 넘을 때도 있고 그래요.” 하루 8시간 꼬박 일해도 최저임금에도 턱없이 못 미치는 수입으로 살아가는 할머니는 그래도 “놀면 뭐해요”라며 인터뷰 내내 조용조용 말을 이어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국가 중 노인빈곤율이 가장 높은 한국에서도 맨 밑바닥 삶을 살아야 하는 폐지 수집 노인의 실태는 안 할머니의 사례에서 속속들이 드러난다.

폐짓값은 2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변함없다. 폐지 수집 노인 실태를 다룬 <한겨레> 1996년 12월9일치 기사를 보면 “1년 전인 1995년 신문짓값은 1kg당 100원, 골판짓값은 1kg당 70원이었으나 1996년 들어 신문짓값은 40원, 골판짓값은 30원대로 떨어”진 것으로 보도됐다.

일하면서 가장 속상한 일이 무엇이냐고 묻자 “애써 모아놓은 폐지를 남이 가져갈 때”라는 답이 돌아왔다. 경쟁자들이 늘어난 탓이다. 안 할머니는 “(내 주변에) 폐지 줍는 사람이 10명이 넘는 것 같다”고 한다. 경쟁자 때문에 힘들겠다는 질문에 “다 먹고살려고 하는 건데, 경쟁자는 아니에요. 다 좋아요”라며 선하게 웃는다.

폐지 수집 어르신의 가장 큰 위험 요소는 교통사고다. 경쟁자보다 먼저 폐지를 모으려고 새벽부터 손수레를 끌고 나서는 어르신들이 많은데다, 대부분 연로해 위험 차량에 대한 방어력이 떨어지는 탓이다.

안 할머니도 사고를 당하지 않기 위해 “(손수레를 끌고) 다닐 때 한쪽으로만 다니고, 항상 많이 살피고 다닌다”고 했다. 올겨울처럼 살갗을 파고드는 한파가 극심한 것도 위협 요소다.

“견디기 힘들 만큼 추울 때는 3~4시간만 일하고 집에 가요. 폐지 모으는 일을 10년 이상 했는데 올해가 가장 추운 것 같아요.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차라리 더운 게 나아요. 너무 더우면 그늘에서 쉬면 되니까요.”

안 할머니는 30대 때 남편과 사별한 뒤 험난한 세상 풍파를 견뎌왔다. 젊었을 때는 오랫동안 공장일, 청소일을 하다가 기운이 떨어진 뒤에는 10년 넘게 폐지를 모아 생계를 도모하고 있다.

그렇게 고생했건만 방 한 칸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서울살이는 혹독했다. 지금 살고 있는 방도 조카딸이 마련한 전셋방을 빌려 월세를 내며 살고 있다.

영등포구청이 지난해 조사한 폐지 수집 노인 실태조사를 보면 안 할머니는 영등포구에서 폐지를 모으며 사는 115명 가운데 전형적인 삶에 속한다.

두 아들이 있지만 부모 봉양할 처지가 안 돼 월세 쪽방에 홀로 사는 홀몸어르신이다. 월세 내려고(52명),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88명), 활동 일수 5일 이상(68명) 등 가장 많은 응답이 있는 항목에 안 할머니의 경우는 모두 해당된다.

그래도 안 할머니는 기초자치단체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최악의 상황은 면한 듯하다. 2007년께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지정돼 매월 48만원의 생활비 지원을 받고 지병인 고지혈증과 고혈압 치료도 적은 돈을 내고 받는다.

“누가 그러더라구요. 폐지 줍는 것보다 동사무소(동주민센터)에 이야기하는 게 낫다고요.” 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로 지원받는 돈과 폐지 판 돈으로 월세, 가스비, 수돗세 등을 내고 “그냥저냥 살아요. 솔직히 저금은 못하고…”라고 말한다.

도림주민센터의 복지담당자도 딸보다 나을 정도로 할머니에게 살갑게 대한다. “담당자가 뭐라도 챙겨주려고 해요. 그전에는 이렇게 관에서 챙겨주는 일이 드물었거든요.”

배문경 도림동주민센터 우리동네 주무관은 “가끔 안부전화 드리고 오다가다 만나면 안부 여쭙는 정도예요. 할머니가 뭐 좀 달라는 말씀을 거의 안 해서 더 챙겨드리고 싶은 마음이에요”라고 말했다.

할머니의 온화한 성품과 어려운 형편을 잘 아는 주변 사람들도 폐지와 옷가지를 모았다가 안 할머니에게 전하곤 한다. 한옥순 통장도 그중 한 사람이다. 할머니와 이웃에 사는 한 통장은 지난달 20일 도림동 고가 밑에서 할머니가 폐지 상자 정리하는 것을 보고 신발·옷 등이 담긴 봉지 2개를 가져가 건넸다.

“할머니가 고달프게 살지만 선하시고 욕심을 부리지 않아요. 당신이 가진 게 있으면 나누고 사실 텐데 너무 없으니까….” 한 통장은 폐지를 모아놓았다 시간 있을 때마다 전해드리고, 춥거나 더우면 입맛 다실 것도 드린다고 했다.

영등포구는 5일부터 구내 폐지 수집 어르신 115명에게 본격적인 지원을 시작했다. 야광조끼, 야광밴드, 야광스티커 등 교통사고 예방을 위한 안전장비 지원은 다른 구에서도 많이 하고 있지만, 영등포구는 노인상담센터의 노인상담사들이 폐지 수집 어르신들의 집을 방문해 심리정서 상담을 하는 등 맞춤형 서비스를 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어르신 일자리 사업에 참여할 의사가 있는지 확인하고, 조건이 맞으면 시니어클럽 등 일자리 수행기관과 연계해 생활 안정에 도움이 되는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게 영등포구의 계획이다.

지난해 폐지 수집 어르신의 비참한 처지가 사회문제가 되면서 서울시가 각 구청에 실태조사를 의뢰해 각 구청에서는 폐지 수집 어르신 실태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상태다. 그러나 이를 바탕으로 복지지원 정책으로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다.

영등포구 관계자는 “폐지 수집 어르신에 대한 가정방문 서비스는 지난해 말 어르신복지과에서 실태조사 결과를 본 뒤 지원사업을 논의해보자고 제의해서 이뤄진 것”이라고 귀띔했다.

그러나 대다수 구청에서는 폐지 수집 어르신 지원 정책과 관련해 안전장비 지원 차원에 머무르고 있는 게 현실이다. 자치단체에서 실태조사 뒤 드러난 폐지 수집 어르신들의 현실에 개입해 노인 복지 사각지대를 줄여나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 구청의 관계자는 “복지 사각지대 발굴 차원에서 정확한 실태조사가 이뤄진 뒤 드러난 과제를 복지행정으로 연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글·사진 김도형 기자 aip209@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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