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와人드] 김동주 "'그만하자'는 가족 말에 은퇴 결심"

김대령 입력 2018. 3. 8. 13:00 수정 2018. 3. 8.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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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김대령기자] '두목곰' 김동주는 2015년 1월 은퇴했다.

17년 동안 잠실벌을 지켰던 김동주는 화려했던 선수 시절을 뒤로하고 야구장을 떠났다. 은퇴 후 야구계를 완전히 떠났던 그를 둘러싸고 소문만 무성했다.

지난해 한 야구 웹툰을 통해 야구 레슨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다시 한 번 김동주라는 이름이 팬들 사이에서 거론되기 시작했다. 직접 만나본 김동주는 레슨장 대표를 넘어 더 큰 꿈을 꾸며 인생 2막을 그리고 있었다.

▲ 김인식 감독도 알아본 '투수 김동주'

배명고등학교 시절 투타를 모두 소화했던 그는 투수로서도, 타자로서도 모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고려대학교 시절 투수 인스트럭터였던 김인식 감독은 그에게 투수로서의 재능을 발견하고 투수전향을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타자였다. 당시 아쉬움은 없었을까.

김동주는 "투수는 처음부터 생각이 없었다. 오로지 타자만 생각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 선택은 결과적으로 자신을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3루수로 거듭나게 한 '신의 한 수'가 됐다.

그렇게 고려대를 거쳐 1998년 두산(당시 OB)에 입성한 그는 입단 때부터 특급 스타였다.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에 부담감도 있었을 터. "당시에는 대학야구에서도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했다. 프로에서는 나무 배트를 사용하기 때문이 이런 부분에서 걱정이 된 것도 사실이다. 두려움이나 긴장감보다는 기대감이 압도적으로 컸다."

부담감조차 덮어버린 기대감으로 신인 김동주의 배트는 데뷔전부터 불을 뿜으며 해태를 상대로 연타석 홈런을 터뜨렸다. 전설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데뷔 첫해는 100% 만족스러운 시즌은 아니었다. 그는 "매년 100경기 이상 소화해야 하는 상황에서 체력적인 준비가 덜 되어있었던 것 같다"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항상 훈련 2, 3시간 전에 미리 나와 운동을 했다"고 털어놨다.

▲ 투수들을 공포에 떨게 한 '우동수 트리오'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떡잎이 보이는 선수에게 꾸준히 믿음을 주는 김인식 감독의 신뢰는 여기에 날개를 달아줬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우동수(타이론 우즈-김동주-심정수) 트리오'다. 엄청난 화력이 불을 뿜던 1999년 두산은 투수들에게 공포의 존재였다.

김동주는 "우즈는 외국인 선수였지만 내가 직접 집에 데려다주기도 할 정도로 친했다. 나도 우즈에게 많은 것을 배웠고, 우즈도 내게 많이 배웠다. 우즈라는 선수가 없었다면 내가 없었을 수도 있다"라고 뒷이야기를 전했다.

양대 리그 체제 출범 첫해였던 1999시즌 두산은 소속된 드림리그는 물론 매직리그를 포함해도 1위에 해당하는 훌륭한 성적을 거두며 포스트시즌에 나갔다. 그러나 거짓말처럼 한화에 4연패하며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2000년 현대와의 한국시리즈에선 리버스 스윕을 목전에 두고 안타깝게 우승을 놓쳤다.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한 김동주에겐 더 아픈 순간이었다. 그는 "플레이오프 때 손가락을 다쳤다. 수술한 상태에서 수원을 찾았다"라며 아쉬움을 삼켰다.

▲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 2001년.

5년 만에 출전한 한국시리즈에서 쓴맛을 본 두산과 김동주는 절치부심해 2001년을 준비했다. 심정수가 현대로 이적했지만, 심재학이 빈자리를 완벽하게 대체하며 막강한 타선을 유지한 두산은 마운드의 약점을 딛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김동주는 "분명히 삼성이 훨씬 우세했다. 좋은 선수들이 많았다"고 인정했다. 이어 "그만큼 삼성은 부담감이 있었다. 우리는 열세 속에 비교적 편한 마음가짐으로 경기에 임했다"며 "이 부분이 우승의 결정적 요인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하다 보니 분위기를 타게 됐고, 우승을 차지했다"고 말했다. '우재주 트리오'를 앞세운 두산은 화끈한 화력전 끝에 6차전에서 네 번째 승리를 따내며 우승 반지를 손에 끼게 됐다.

이때를 기점으로 두산은 명실상부한 강팀 반열에 올랐지만, 은퇴 전까지 한 번도 가을야구의 주인공이 되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뭘까. 김동주는 "너무 우승에 목말라 있었던 것 같다"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는 "짜릿한 우승을 한 번 경험해보니 갈망이 너무 커졌다. 우승을 못한 시즌이 한해 한해 늘어갈수록 열망은 더욱더 커졌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조급해지고, 될 것도 안되게 됐다. 마음을 비우고 임했다면 한 번 더 우승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아쉬워했다.

우승 여부와 별개로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2006년 불운이 찾아왔다.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아시아 예선 대만과 경기에서 1루에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다가 어깨에 큰 부상을 입은 것이다.

이미 아시안게임 우승으로 병역 혜택을 받은 상황에서도 부상을 무릅쓰고 몸을 던지는 모습은 당시 선수들에게 경종을 울렸던 사건으로 회자되지만, 자신에게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고된 시간이었다. "몸을 정말 잘 만든 시기였다"고 아픈 기억을 떠올린 그는 "컨디션이 좋다 보니 너무 의욕이 앞섰다. 가장 좋을 때 가장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며 자신을 탓했다. 후배들에게 "부상도 실력이다. 스스로 관리해야 한다"라는 조언을 전하기도 했다.

이 부상은 선수 생명까지 위협했다. 현지에서는 재활에 2년이 필요하며, 야구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진단까지 받았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놀란 김동주는 미국에서 이를 악물고 재활에 매진했고, 엄청난 회복 속도로 5개월 만에 다시 타석에 복귀했다.

그는 "치료가 끝나자마자 바로 폼을 끌어올리기 위해 합숙했고, 1주일 만에 바로 출전했다. 지금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모했다"라고 회상하며 "당시 손과 발이 되어줬던 홍성대 트레이너에게 정말 고마웠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감사의 메시지를 남겼다.

▲ 두목곰의 은퇴

2011시즌에도 17개의 홈런은 물론 리그 5위의 출루율(.393)을 기록하며 탄탄한 기량을 유지했던 김동주는 2012년 부상 이후 갑작스러운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 그는 "한화와 경기 중 햄스트링이 왔다. 다치는 순간 큰 부상임을 직감했다. 걸을 수도 없을 정도로 다리가 아파서 한 달 넘게 쉬었다"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부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지만, 김동주는 좀처럼 1군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다. 팬들은 팀을 오랜 기간 이끈 핵심 선수가 경기에 나오지 않자 의문을 표하기 시작했다. 그는 "물론 여러 차례 보도가 됐듯이 구단과 안 좋은 관계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선수가 잘했어야 한다. 지금 와서 이야기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 같다"며 "어린 선수들을 좋아하는 감독이 있는 반면 베테랑을 좋아하는 감독도 있다. 선택은 결국 감독 몫"이라고 조심스러워했다.

다만 "2군에서 후배 선수들보다도 더 열심히 했고, 실제로 좋은 성적을 내기도 했다. 몸상태에는 문제가 없었다. 만약 1군에 올라갔어도 잘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은 있다"고 덧붙였다.

2014년 말, 김동주는 오랜 줄다리기 끝에 두산과 작별했다. 그는 "팀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떠나게 됐다. 뛰고 싶지 않은 선수는 없다. 누구라도 당시 상황에는 그런 결정을 내렸을 것 같다"고 회고했다.

이후 kt 위즈 입단을 타진했지만, 최종적으로 무산됐고 2015년 1월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어려운 선택을 내린 가장 큰 이유는 가족이었다.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더라. 그래서 깔끔하게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했다"고 은퇴 결심의 배경을 설명했다.

성대한 은퇴식도 치르지 못한 채 전설이 퇴장한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표한 팬들도 많았다. 정작 자신은 초연했다. "내가 원해서 구단을 나간 것이다. 은퇴식에 대한 아쉬움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 야인 김동주, 새로운 꿈을 꾸다

은퇴 후 김동주는 야구계를 완전히 떠났다. "쉬고 싶었다"라고 털어놓은 그는 "야구와 떨어져 살고 싶어 야구 중계도 보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언론 노출이 거의 없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평생 야구만 해온 그에게 야구는 다시 한 번 그의 마음을 건드렸다. 지난해 레슨장의 대표가 된 김동주는 또 하나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즐거운 야구'를 가르치는 것이다.

초·중학교 선수들을 대상으로 하는 야구단의 창단을 준비 중인 그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다. 야구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즐거운 야구'를 알려주고 싶다"라며 웃었다.

그는 "'유소년 야구 선수'라고 하면 전문적인 선수를 일컫는다. 그런 개념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면 '될 선수'와 '안 될 선수'를 나누게 되고, 교육에 차별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성적이나 선수 육성의 개념으로 접근하고 싶지 않다. 아이들의 기량이 아닌 개성에 맞춰 교육하며 온전히 하나의 스포츠로서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팀을 만들 계획"이라는 꿈을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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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ㅣ김대령기자 daeryeong@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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