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미투'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장면

2018. 3. 8. 00:3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나는 특별하니까' '그럴 만하니까'..
엇나간 특권의식과 오만 키운 사고방식
우리 사회 곳곳을 골병들게 하고 있다
이학영 논설실장

성(性)추행 논란에 휩싸인 고은 시인이 영국 출판사를 통해 내놓은 ‘해외 성명서’의 몇 구절이 눈에 밟힌다. “내 행동이 초래했을지 모를 의도하지 않은 고통에 대해 이미 뉘우쳤다” “나 자신과 아내에게 부끄러운 어떤 짓도 하지 않았다” “상습적으로 추행했다는 비난은 단호히 부인한다”…. 성추행 피해를 호소한 문단후배들은 국내에 있는데 ‘국제 해명’부터 내놓은 것도 그렇거니와, ‘남들이 뭐라 하든’ 철저하게 본인 관점의 주장을 강변해 되레 큰 역풍을 맞았다.

고씨의 성명서가 해외언론에 보도된 직후, 그의 행적을 더 구체적으로 고발하는 목격담이 나왔다. 여성들이 합석한 자리에서 그가 저질렀다는, 차마 옮기기 민망한 증언은 고씨가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는다는 시 ‘자작나무숲으로 가서’의 구절들을 비현실적으로 만든다. ‘슬픔에는 거짓이 없다. 어찌 삶으로 울지 않는 사람이 있겠느냐. 오래오래 우리나라 여자야말로 울음이었다.’ 여성의 슬픔을 달래주는 시로 애송해 온 사람들이 느꼈을 황당함과 배신감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치열하게 반성하고 성찰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그가 ‘내려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라는 시의 작자라는 사실도 곤혹스럽다.

어떤 형태의 권력이건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특권’으로 여기는 것도 용납될 수 없지만, 자신의 생각과 관점으로만 행동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게 더 큰 문제다. 그런 사람은 ‘나는 특별하니까’라든가 ‘내 행동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으니까’ 따위의 자기합리화를 고착화시켜 문제를 증폭시킨다. 그러다가 문제가 터지면 “본의는 그게 아니었다”는 말로 ‘면피’를 시도한다. 요즘 우리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권력형 성추행·폭력 사건(#미투)의 가해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본의 아니게 피해자가 고통받았다면 유감”이라는 가해자들의 판박이 말이야말로 이들의 병증(病症)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확인시켜준다.

‘#미투’를 성공가도를 달리며 승승장구하던 사람의 흉한 민낯을 비난하고, 추락에 속시원해하는 이벤트로만 흘려보내서는 곤란하다. 우리 사회가 각성하고 한 단계 발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그 속에 담긴 교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미투’의 가해자들이 거의 예외 없이 오만과 자아도취에 빠져 권력을 휘둘렀고, 문제가 곪아터진 뒤에도 ‘수용자 관점’의 이해력을 보여주지 못했음은 그런 점에서 중요하게 관찰해야 할 문제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적지 않게 우리 사회의 각계를 이끌고 있다는 현실이다. 자기가 생각하는 동기(動機)와 의도, 명분만을 행동의 기준으로 삼는 행태는 즉각 드러나지 않을 뿐, 사회적으로 엄청난 낭비와 피해를 초래한다. 성폭력 말고도 우리 사회를 골병들게 하는 각계 권력자들의 ‘공급자 관점 증후군’이 여러 형태로 작동하고 있는 모습들을 눈 부릅뜨고 살펴봐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정치·경제·사회·교육·문화 등 각 분야 정책들이 ‘공급자 관점’으로 입안되고 강행돼 빚어지는 문제가 심각하다. 요즘 중요한 화두(話頭)로 떠오른 4차 산업혁명 관련 정책이 전형적인 예다. 얼마 전 열린 정책 토론회에서 전문가들은 “정부 당국자들이 드론 로봇 인공지능 자율주행 등 중점 육성분야를 특정하고 연구개발 등의 예산 수립과 집행권한을 틀어쥐는 것이야말로 전형적인 공급자 관점의 폐해”라고 입을 모았다.

산업정책만 그런 게 아니다. 영세 자영업자와 중소기업가들을 곤경 속으로 몰아넣은 가파른 최저임금 인상과 획일적인 근로시간 단축 정책도 ‘공급자 관점’ 사례로 꼽힌다. 경제적 약자들의 소득과 삶의 질을 높여주겠다는 명분에 집착한 나머지 실제 집행됐을 때 일어날 문제들을 짚어보고 정책을 다듬는 일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치열한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경쟁의 세계에서 살아남고 도약하는 개인과 기업들의 공통점은 어떤 성취에도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수용자 관점에서 변신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미투’는 그럴 듯해 보이는 명분이나 적당한 성취가 눈을 가릴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haky@hankyung.com

[한경닷컴 바로가기] [글방] [모바일한경 구독신청]
ⓒ 한국경제 & hankyung.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한국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