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호의 시시각각] 대북 특사 파견, 독배 될 수 있다

남정호 2018. 3. 6.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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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없으면 미 강경파 목소리 커져
조급함에 잘못된 당근 내놔도 문제
남정호 논설위원
외교 최전선에서 북한을 상대했던 조셉 윤 미국 국무부 대북 특별대표. 그는 미 강경파들 사이에서 ‘몽상가(夢想家·dreamer)’로 불렸다. 평화적 대화로 북핵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황당한 꿈처럼 들렸던 것이다.

10세 때까지 이 땅에서 살았던 윤 대표는 여전히 한국어에 능하다. 외교관이 된 뒤에는 두 번이나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일했다. 북한과의 핵심 대화 통로인 뉴욕 채널을 맡은 것도, 지난해 5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북한 외교관들을 상대한 것도 모두 윤 대표였다. 이렇듯 한국과의 인연이 깊은 그였기에 한반도 전체를 전쟁의 불구덩이로 밀어넣을 군사적 옵션을 누구보다 싫어했을 게 틀림없다.

그의 사퇴는 또 다른 군사행동 반대론자인 빅터 차 주한 미국대사 내정자의 낙마와 겹치면서 더 큰 울림을 냈다. 두 사건 모두 대북 대화파의 몰락으로 비쳤던 까닭이다.

그런 윤 대표가 지난달 국내의 한 싱크탱크를 찾아와 한국 측 전문가들과 토론한 적이 있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이 남북관계를 다루면서 겪은 고충을 털어놨다고 한다. 그중에는 “북한 측에서 미국은 절대 못 칠 거로 믿고 행동하는 게 가장 짜증스러운 일이었다”는 실토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북한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국 측도 군사행동은 안 할 거로 여기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고 윤 대표는 덧붙였다고 한다. 결국 남북한 정책 결정자 모두 미국의 공격 가능성을 무시하나 이는 치명적인 착각이라는 게 그의 경고였던 셈이다.

이런 가운데 어제 대북 특사가 평양에 도착했다. 평화의 사절이 갔으니 탈 없이 북핵 문제를 풀 수 있다는 분홍빛 기대가 부푸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워싱턴 분위기는 싸늘하다. 팔짱을 낀 채 “대화를 꼭 하겠다니 한번 해봐라”는 식이다.

현 정권은 특사 파견으로 축배를 들게 됐다고 좋아할지 모르나 이는 자칫 독배가 될 수 있다. 별 소득이 없으면 “거봐라, 대화해 봐야 아무 소용 없다”는 미국 내 매파 목소리가 커질 게 뻔하다. 속 빈 강정 같은 남북대화는 군사적 공격의 정당성만 키워 줄 뿐이다. 게다가 대표적 매파인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주한미군 사령관으로 올 것이라는 이야기가 돈다. 실현되면 대북 공격 가능성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성과에 집착해 잘못된 당근을 제시해도 문제다. 이번 특사 방문에서 남북 간에 중대 제안이 오갈 것이란 관측이 많다. 한·미 연합훈련 연기나 취소는 물론이고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관광 재개가 검토됐다는 설도 나온다. 자칫 대북제재 스크럼에서 한국이 빠지려 한다는 오해를 살 판이다. 한국을 운전석에 앉혀 놨더니 낭떠러지로 달려간다는 악평이 나올 수밖에 없다.

옛날엔 평화적 해결의 기미가 짙어지면 미국이 당근을 주곤 했었다. 2006년에는 영변 핵시설 가동을 중단하겠다는 말을 믿고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묶여 있던 북한 자금을 풀었다. 1991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94년의 제네바 협정, 그리고 98년 4자회담 성사 때도 선뜻 제재를 늦춰 줬다.

하지만 지금 분위기는 딴판이다. 북한이 앞에선 도발 중지 등을 약속하고도 뒤로는 몰래 미사일 기술을 내다 팔거나 핵무기를 개발했던 탓이다. 지금 워싱턴에는 더는 북한에 속지 않겠다는 강경 분위기 일색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비유했듯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식”의 조급함으로 책임지기 힘든 공수표를 남발했다간 안 가느니만 못한 꼴이 된다. 그러니 북한 제재를 주도하는 미국이 연합훈련 연기 등 당근 주기를 거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남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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