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민의 정치 인사이드]문 대통령은 '보스'가 아닌 '초당파적 지도자'가 될 기회를 맞았다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 2018. 3. 2.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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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전쟁과 스포츠와 정치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전쟁과 스포츠는 승리와 패배라는 본질적 속성이 같다. 미국남북전쟁 당시 남군을 이끌었던 로버트 에드워드 리 장군이 “전쟁이 참혹한 것은 좋은 일이다. 참혹하지 않으면 우리가 전쟁을 너무 좋아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듯이 죽지만 않으면 가장 재미있는 게임이 전쟁인데, ‘죽지 않는 전쟁’이 스포츠다.

정치도 승패를 다툰다는 점에서 본질이 같다. 정치는 스포츠와 전쟁 중간 어딘가에 있을 텐데 스포츠처럼 룰을 정해놓고는 전쟁처럼 싸운다. 전쟁, 정치, 스포츠 모두 전력·전략·정신력에서 승부가 갈린다. 전력이 압도적이면 전략과 정신력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마이크 타이슨이 유명한 말을 남겼다. “누구나 한 대 맞기 전까지는 그럴듯한 전략을 가지고 있다.” 반면 베트남의 전쟁 영웅 보응우옌잡은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미국, 중국과 싸워 이긴 뒤 전략에 대해 큰 영감을 주는 말을 남겼다. “나는 적이 원하는 시간에 싸우지 않았다. 적이 좋아하는 장소에서 싸우지 않았다. 적이 예상하는 방법으로 싸우지 않았다.”

상대를 대하는 태도는 전쟁과 스포츠가 크게 다른데 전쟁은 상대를 ‘적’이라 부르고 스포츠는 ‘경쟁자’라 부른다. 독일의 정치학자 카를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정치는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이라며 정치의 전쟁적 속성을 날카롭게 포착했다. 소크라테스 재판부터 프랑스혁명까지 전쟁, 혁명, 재판, 쿠데타, 사화 모두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를 결정하는 진검승부였기 때문에 승리한 자는 패배한 자를 죽이는 것이 목표였다. 아마도 19세기 이전의 정치적 투쟁이 ‘체제 안에서’ 싸운 것이 아니라 ‘체제를 둘러싸고’ 싸웠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 같은 정치의 시대가 끝나자 민주주의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상대를 ‘죽일’ 적으로 보지 않고 ‘이길’ 경쟁자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승리하면 여당이 되고 패배하면 야당이 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아담 쉐보르스키의 정의대로 민주주의란 ‘여당이 (평화적으로) 야당이 될 가능성을 열어두는 체제’인 것이다.

우리는 이긴 자가 진 자를 죽이는 ‘쿠데타’와 ‘혁명’을 동시에 폐기처분하고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가 가능한 체제를 1987년에 합의했다.

“신생 민주주의는 두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통해 공고화된다”는 새뮤얼 헌팅턴의 말을 상기한다면 불과 30년 만에 한국의 민주주의는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다. 1987년 광장에서 목숨을 걸고 쟁취한 ‘직선제 개헌’의 성과다.

전쟁과 스포츠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 전쟁은 (승자와 패자) 모두를 패자로 만들고 스포츠는 (승자와 패자) 모두를 승자로 만든다. 전쟁은 참혹하지만 스포츠는 감동을 준다. (평창 올림픽에서도 확인했듯이) 공정한 룰, 치열한 경쟁, 깨끗한 승복은 모두를 승자로 만든다. 정치가 배워야 할 교훈은 이것이다. 우리의 선택에 따라 모두가 승자가 될 수도 있고, 모두가 패자가 될 수도 있다.

1960년 4·19혁명은 이승만을 몰아냈지만 1년 뒤 쿠데타를 막지 못했다. 1979년 18년 독재가 막을 내렸지만 기다린 봄은 오지 않고 더 추운 겨울이 왔다. 2002년 노무현의 당선으로 세상이 확 바뀔 것으로 기대했지만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반면 1987년 대선에서는 군사 쿠데타의 주역인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한국 민주주의는 바로 그 선거로부터 시작되었다. 법과 제도로 패러다임을 바꾸지 못하면 ‘체제’라 이름 붙이지 못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광장’의 희망이 실망과 절망으로 돌변한 사례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2017년 ‘촛불혁명’은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에 비로소 생명을 불어넣었다. 서구가 시민혁명을 통해 ‘왕이 법’인 왕정의 시대를 끝내고 ‘법이 왕’인 공화정의 시대를 열었듯, 한국의 민주주의도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강한 국가는 법과 제도로 만드는 것이다. 지금이 매우 중요한 시간이다.

민주공화국은 ‘국민주권주의’ ‘법치주의’ ‘민주주의’의 세 기반에 서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은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헌법기관이 (헌법제정권력인) 국민의 뜻을 따름으로써 국민주권주의를 확인했다.

그러나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는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법’과 ‘제도’로 촘촘하게 채우지 않으면 민주공화국의 ‘약한 고리’로 전락한다. 비록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개헌’(법)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제도)가 도입되었기 때문에 (쿠데타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는) ‘불가역적인’ ‘1987 체제’가 성립된 것이다. 금융실명제도 불가역적이다.

(법치가 아닌) ‘인치’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선진 정치와 후진 정치는 ‘제도’에 의한 운영인가 아니면 ‘사람’에 의한 운영인가에서 갈린다.

선진 정치는 사람의 실수로 문제가 발생해도 그것을 계기로 법과 제도라는 시스템을 바꾸는 능력이 뛰어난 반면, 후진 정치는 시스템에 구멍이 뚫리는 중대한 문제가 발생해도 결국은 사람 탓으로 돌리고 만다. ‘리스트 공화국’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언론은 온갖 ‘이름’만 써대기 바쁠 뿐 누구 하나 나서 법과 제도를 개선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사법, 행정을 포함해) 정치는 도덕군자가 하는 것이 아니다.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고 저급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시스템에 의해 통제될 수 있어야 한다. 사회 전 분야에서 그러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정치가 할 일이다. 사회가 개인의 감정이나 판단 혹은 도덕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 움직여야 미래를 안정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 예컨대 검사나 판사의 정치적 성향이나 그날의 감정에 따라 처벌이 달라진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불법을 저지른 사람에게는 예외 없이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하지만 죄다 감옥에 보낸다고 적폐가 청산되는 것은 아니다. ‘대기번호표’와 같이 ‘특권’을 주지 않고 ‘공정’하게 기회를 주는 시스템을 만들어 (정치, 행정, 사법 등의) 사회 전 영역에서 ‘공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진정한 적폐청산이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저지른 권력의 사유화를 통한 사익 추구, 권력기관의 불법과 비리가 문재인 정부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신뢰를 (이명박, 박근혜 지지자들에게도) 얻어야 한다. 결국은 법과 제도의 문제다. 촛불보다는 투표가 힘이 세고, 투표보다는 제도가 힘이 세다.

“이게 나라냐”는 질문은 시민의 몫이지만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 책임은 문재인 대통령의 몫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이 약속했지만 이루어내지는 못한)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을까. 시민의 기대와 응원은 여전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야당이 반대하면 (개헌을 포함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국회 의석도 답답한 조건이다. 한국 정치는 1990년대 이후 대통령의 힘은 빠지고 국회와 사법부의 힘은 커진 ‘과두’적 상황에서 (누구도 결정할 힘은 갖지 못하고) 상대 정파의 정책과 주장을 모조리 거부하는 ‘비토크라시(Vetocracy)’의 늪에 빠져 있다.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전쟁의 암운이 어른거리는 한반도의 안보 상황도 문재인 대통령이 국내 정치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든다. 검찰과 여당은 “나오는 대로 수사한다”는 원칙론으로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와 사법처리를 압박하고 지지자들도 구속을 강하게 요구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으로서는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 가는 상황도 편치만은 않을 것이다. 원하지 않는 정치에 불려와 전쟁 같은 정치를 한복판에서 겪은 문재인 대통령이다. 나에게 일어난 일은 남에게도 일어나고 남에게 일어난 일은 나에게도 일어나는 권력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안다.

시간은 문재인 대통령의 편이 아니다. 조건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대통령에게 주어진 책무다. 국회의원들이야 적폐세력의 저항 때문에 아무런 개혁도 못했다고 남 탓으로 돌리면 그만이지만 대통령은 그럴 수 없다. 아무리 많은 시민이 광장에서 촛불을 들어도 대통령만 바뀔 뿐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면 시민들은 더 이상 촛불을 들지 않을 것이다. 시민의 요구에 대통령은 결과로 답해야 한다. 결과를 만들어내려면 ‘하나만 달라도 적으로 보는’ 태도를 버리고 ‘하나만 같아도 동지로 보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정치를 옳음과 그름, 정의와 불의, 선과 악의 관점으로 접근하면 상대를 적으로 보게 된다. 정치에서는 견해만 있을 뿐 정답은 없다. 민주주의는 ‘생각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다.

물론 정치인은 자기를 규정하는 정체성이 있다. 그러나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정체성을 뛰어넘어 (외연확대를 위해) 생각이 다른 사람과 ‘선거연합’도 해야 한다. 김영삼(3당합당), 김대중(DJP연합), 노무현(정몽준과 후보단일화) 모두 선거연합을 통해 대통령이 되었다. 모든 대통령은 정책의 실패나 야당의 공격 때문에 지지율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선거연합을 깨고 자기의 정체성에 집착할 때 위기가 찾아왔다. 정치에서는 지지기반을 넓히면 살고 좁히면 죽는다. 예외가 없다. 그나마 노련한 김영삼, 김대중 두 대통령은 2년 정도는 선거연합을 유지하면서 개혁을 밀어붙였지만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은 집권 초에 선거연합을 깸으로써 위기를 자초했다.

선거연합을 넘어 국정운영을 위해 ‘통치연합’의 범위를 넓힌 대통령은 놀랍게도 노태우뿐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군사 쿠데타의 주역, 36.6%의 낮은 지지율로 당선, 여소야대라는 약점을 일거에 해소하기 위해 3당합당을 결행했다. 반면 (정통성에서 자신감을 가진) 김영삼을 비롯한 이후의 모든 대통령은 상대를 ‘청산’의 대상으로 인식했다. 최초의 문민 대통령인 김영삼은 ‘군부독재청산’, 최초의 정권교체라고 자부한 김대중은 ‘수구보수청산’, 최초의 서민 대통령인 노무현은 ‘기득권청산’, 보수로의 정권교체에 성공한 이명박은 ‘좌파청산’,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박근혜는 ‘종북청산’이라는 역사적 소명에 사로잡혀 법과 제도를 바꿀 수 있는 ‘통치연합’의 확장에 실패함으로써 구조개혁의 골든타임을 놓치고 말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촛불혁명이 요구한 ‘적폐청산’의 골든타임을 제대로 인식했다면 국민들에게 약속한 ‘나라다운 나라’,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해 ‘탄핵연대’를 유지할 수 있는 구상과 전략이 있어야 했다. ‘네이션 리빌딩’ 정도의 담대한 개혁을 하려면 명분, 세력, 동력, 타이밍, 전략이 모두 중요한데 명분과 동력이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세력, 타이밍에 대한 전략적 고려가 부족하여 안타깝게도 골든타임을 놓친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도 결국 ‘비토크라시’의 늪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한국의 대통령은 ‘초당파적’ 국가원수와 ‘당파적’ 행정부 수반이라는 모순적 지위를 동시에 갖게 되는데 모든 대통령이 (국민통합을 위한) 국가원수 역할보다는 (적과 동지의 이분법에 사로잡혀) 당파의 보스 역할에 더 치중함으로써 국민적 지지를 좁히는 우를 범한 것도 실패의 큰 이유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국가원수의 이미지를 강화할 좋은 조건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생존해 있는 전직 대통령 네 명의 영향력이 거의 없고, 여야 모두 강력한 대권주자가 보이지 않는 조건에서, 안보 이슈가 핵심 의제로 부각된 상황이라 유일한 초당파적 지도자로서 이미지를 부각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초당파적으로 다뤄야 할 ‘국정교과서’ 이슈를 당파적 이슈로 부각시켰다가 몰락을 자초한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야당 지도자들이 안보 이슈를 당파적으로 다루는 상황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야당의 주장에도 충분히 귀기울이면서) 국가원수의 입장에서 초당파적 자세로 접근한다면 지지율이 급락할 가능성은 낮다. 국민적 지지를 유지할 수 있다면 ‘2018 체제’를 만들 기회는 아직도 있다.

▶박성민 1991년 설립한 정치컨설팅그룹 ‘민’의 대표이자, 한국의 대표적인 정치컨설턴트다. 30년 이상 선거를 치르면서 익힌 감각과 예리하고 독창적인 시각을 평가받고 있다. 정치게임에서 승리하는 법칙을 담은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긴다> <정치의 몰락> 등을 썼다.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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