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청년 승현씨 "조선족은 2등 국민, 우린 불가촉천민"

입력 2018. 3. 2. 15:47 수정 2018. 3. 2.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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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탈북자 최초 '통일학 박사' 주승현

[한겨레]

“시끄럽지 않아요. 그 소리를 들으면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잠이 안 오거나 뭔가 힘든 일이 생기면 무작정 차를 몰고 여기 왔죠.” 서부전선 비무장지대에서 대남방송 요원으로 일하다 군사분계선을 뛰어넘어 남쪽으로 탈출한 주승현 전주기전대 교수는 남북 양쪽의 확성기 소리가 요란한 임진각 근처를 200번 넘게 찾아왔다고 말했다. 주 교수가 지난달 20일 임진각 너머 북한 땅을 바라보고 있다. 파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통일’은 빛바랜 깃발이다. 천만 이산가족 중에 생존자는 이제 6만1천여명뿐, 재회의 날을 손꼽으며 눈물 찍어내는 노인들의 모습을 볼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누구나 통일을 이야기하지만 누구도 통일을 보여주지 못했다.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공식회담의 물꼬를 튼 박정희 정권이 ‘평화통일 의지를 담아’ 내놓은 것은 유신헌법이었고, 통일 대비 기금을 모으자던 이명박 정부의 ‘통일항아리’는 일찌감치 ‘밑 빠진 독’이 되어버렸으며, ‘통일 대박’을 외치던 박근혜 정부는 개성공단을 폐쇄하고 남북교류의 문을 닫아걸었다. 많은 경우 통일은 포장지만 그럴듯한 ‘짝퉁’이거나 당첨번호 없는 로또 뭉치에 불과했다.

북한 삼지연관현악단과 소녀시대 서현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함께 부를 때 방송카메라는 뜨겁게 눈시울을 붉히는 중장년층 관객을 연신 비췄지만, 그 공감대는 세대의 벽을 뛰어넘지 못했다. 좀처럼 보기 드문 조합으로 이루어진 이날의 공연은 많은 젊은이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안겨주었지만, 그 감흥은 이전 세대와 같이 ‘민족의 염원’에 대한 가슴 뭉클한 격정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통일은 낯설고 불확실한 미래이고, 당장의 생존은 엄중하고 긴급한 현실이다. 대한민국 청년들에게는 일상이 살아남기 위한 전쟁이다.

“통일은 한때는 숙명이었고 한때는 금기였으며 한때는 열망이었다. 지금은 숙명도 금기도 열망도 아닌 헛헛한 유물처럼 치부되는 상처 입은 통일을 바라보며, 비로소 난 정색하며 묻고 싶었다. 우리의 소원이 정말 통일인가, 라고.”(주승현 저, <조난자들> 108~109쪽)

주승현(37)은 북한을 탈출해서 남한에 정착한 청년이다. 새로운 이산가족 세대인 그에게 분단은 잔인한 현재형이고, 각자도생을 강요하는 자본주의적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 역시 절박한 현재형이다. 출신성분과 계급성이 인생을 좌우하는 북한을 탈출해 넘어왔지만, 그를 맞이한 건 수저 색깔에 따라 미래가 규정되는 냉혹한 남한 현실이었다. 주승현처럼 남북한을 모두 경험한 청년들에게 대한민국의 민낯은 어떤 모습일까? 탈북민이 3만명을 넘어선 시대, 우리는 그들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분단의 상처를 문신처럼 품고 사는 탈북 청년들에게 진정한 통일이란 어떤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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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미터, 그 아득한 거리

지난달 20일 임진각에서 주승현을 만났다. 그는 2002년 비무장지대를 넘어 단신 월남했고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해 탈북민으로선 처음으로 통일학 박사학위를 얻었다. 전주기전대에서 군사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된 그는 올해 초 <조난자들: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들에 관하여>(생각의 힘)란 책을 냈다.

-임진각에는 자주 오세요?

“아마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많이 왔을걸요. 여기 와본 적 있으세요?”

빙긋이 웃으며 그가 내게 되물었다. 내가 ‘한 20년 만에 온 것 같다’고 하자 그는 숙달된 관광가이드처럼 임진각의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제법 들뜬 목소리로 설명을 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적했는데 몇년 전부터 관광명소가 돼서 지금은 외국인이나 데이트족도 많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고 말할 때 그는, 외지인에게 자기 고향을 소개하는 사람처럼 자랑스러움이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몇 번이나 오신 거예요?

“못해도 한 200번은 넘게 오지 않았을까? 여름엔 텐트 치고 여기서 밤을 보내기도 해요. 저기(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나무 숲에서.”

서부전선 비무장지대 상급병사로
대남 ‘제압방송’ 조장으로 일하다
군관학교 입학 좌절된 데 실망해
철조망·지뢰구역 걸어서 통과
700미터 거리 남쪽 초소로 넘어와

-여기서 캠핑을 한다고요? 그게 가능해요?

“특별히 단속하거나 나가라고 하지 않아요. 밤이 되면 남북 양쪽에서 대북방송, 대남방송을 날이 새도록 왕왕거리면서 해요.”

-그렇게 시끄러운 데서, 왜 여기서 주무세요?

“시끄럽지 않아요. 그 소리를 들으면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잠이 잘 와요. 한국에 온 뒤 잠을 잘 못 잤어요. 잠이 안 오거나 뭔가 힘든 일이 생기면 무작정 차를 몰고 여기 왔죠. 제겐 제일 익숙하고 친근한 곳이 여기, 임진각이었어요. 저기 다리 건너, 산 보이시죠?”

그가 얼어붙은 임진강 너머를 가리켰다. 그곳이 개성시 진봉산인데, 그 산 아랫자락에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02년 탈북할 때까지 몸담았던 군부대가 있다. 주승현은 서부전선 비무장지대 상급병사(병장급)로 남한의 대북방송을 교란하고 대남방송을 확성기로 틀어대는 ‘제압방송’ 조장이었다. 비무장지대 근무 6년째가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직업군인이 되려고 지원했던 군관학교 입학이 석연찮은 이유로 좌절되면서 “무엇인지 모를 열망과 슬픔과 고독”이 그를 엄습했다. 그는 귀순을 결심했다. 700미터 떨어진 남측 감시초소까지는 뛰어서 5분 거리였지만, 1만볼트 고압전기가 흐르는 철조망과 지뢰구역, 철책선을 넘어오느라 25분이 걸렸다. 짧은 시간, 짧은 거리였지만 그에겐 생과 사를 넘나드는 아득한 여정이었다.

“북한에 대해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 보수일 거라고 대개들 생각하는데 탈북자들 내부를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도 않아요.” 주승현 전주기전대 교수는 2016년 겨울 촛불집회에 청년탈북자들이 참여한 것을 두고 “지금까지 탈북자의 다양성이 묻히고 획일적인 평가만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파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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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선을 넘어 또 다른 전쟁터로

-귀순 후 조사를 받으면서 ‘대북확성기와 전단지 속의 배려와 환대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직감했다’고 책에 쓰셨던데요. 기대했던 바와 달랐나요?

“귀순자라고 하면 직업을 알선해주거나 최소한 직업교육이라도 시켜주는 줄 알았어요. 대북방송에선 ‘넘어오면 집 주고 차 주고 취업시켜준다’고 했는데, 차라리 귀순자들이 어떻게 사는지 제대로 알려줬다면 마음의 준비라도 하고 넘어왔을 텐데… 지금은 탈북자를 위한 직업교육 프로그램이라도 있지, 제가 올 때까진 그런 것도 없었어요. 정말 당황했죠. ‘알아서 살라’는 건데, 어떻게 알아서 살아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는 거예요. 은행 가서 통장 개설하는 법도 몰랐으니까.”

고압선과 지뢰밭을 넘어오면 생명과 안전이 보장된 새 세상에 닿을 줄 알았다. 그게 착각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남한으로 넘어와 외롭고 적막할 때 차라리 그에게 위로가 되어준 것은 그에게 익숙한 비무장지대 확성기 소리, 낯익은 풍경, 바람소리, 물소리였다. 아무도 찾지 않는 임진각 귀퉁이에서 그가 밤잠을 청하게 된 내력이다.

-그래도 탈북민에게는 정착금이나 생활지원금이 나오지 않습니까? 일반적인 저소득층보다는 혜택을 받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일단 정착금 대부분은 임대보증금으로 묶입니다. 그나마 한 번에 주는 게 아니라 석 달에 한 번씩 나눠서 찔끔찔끔 주는데 돈에 대한 개념이 없다 보니까 이걸 어떻게 분할해 쓰고 모자란 부분은 어떻게 메워야 하는지 개념이 없는 거예요. 생활지원금도 당시에 월 40만원가량 나왔는데 정보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다보니까 턱없이 사기당하는 일도 많거든요. 저만 해도 핸드폰을 개설하러 대리점에 갔는데 말투를 듣더니 탈북자인 거 바로 알고 자상하게 잘해주더라고요. 생긴 것도 푸근하니 형처럼 대해주길래 권하는 대로 샀는데, 제일 비싼 핸드폰이었어요.(웃음) 나중에 알고 보니 겉모양만 새것이지 일련번호도 없는 비정상적인 제품이었고요. 거기다가 핸드폰비도 어마어마하게 나오는데….”

생활지원금 날리고 정착금 떼이기도
“탈북자들이 ‘알아서 살라’는 건데
어떻게 하는 건지 정말 모르겠더라”
“북한에선 굶어본 적 없었지만
남한에서 처음으로 굶어봤다”

-어이쿠, 비싼 요금 옵션에다 온갖 부가서비스를 다 넣은 모양이군요.

“그랬나 봐요. 사람 좋은 줄 알았는데… 완전 사기당했죠.”

-시장경제에서 거래하는 법에 익숙하지 않으니 사기당하기 십상이죠.

“북한에서 시장경제를 일부 도입한 게 2002년 7·1 경제조치부터예요. 그 이후에 온 탈북자들이나 중국을 거쳐온 이들은 시장에 대해서 직간접적인 경험이 있을 텐데, 저는 시장을 아예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까 아무것도 몰랐죠. 정착 초기에 탈북자 선배가 찾아왔는데 보험회사 직원이었어요. 제 입장에선 이 선배가 얼마나 근사해 보이겠어요? 직업도 있고 멋진 차도 몰고 다니고… 저더러 월 40만원짜리 상품을 권하면서 ‘너 이거 몇 년만 부으면 목돈이 그냥 생긴다’고 하길래 가입했는데, 수입이 변변찮으니 그게 유지가 되겠어요? 2년 만에 해지했더니 부었던 돈도 다 돌려주지 않더라고요.”

알량한 생활지원금은 세상물정을 몰라 흐지부지 날리고 목숨줄 같은 정착금마저 가족처럼 다정했던 다른 탈북민에게 빌려줬다가 그가 종적을 감추는 바람에 영문도 모르고 떼였다. 탈북자는 어딜 가도 일자리를 얻기 어려웠고 그는 수개월 만에 체중이 10킬로나 빠질 정도로 극심한 빈곤과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 사선을 넘어 남한으로 왔으나 이곳은 그에게 또 다른 전쟁터였다.

“목숨을 걸고 비무장지대를 넘어온 나는 곧바로 ‘잉여인간’으로 전락했다. 북한에서는 한 번도 굶어본 적이 없었지만 남한에서 처음으로 굶어봤다. 생활비라도 벌기 위해 주유소에 찾아가 면접을 봤지만 퇴짜 맞기 일쑤였다. 구인 공고가 실린 지역생활정보지가 집 한편에 켜켜이 쌓여갔지만 탈북민을 받아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같은 책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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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은 2등 국민, 탈북자는 불가촉천민?

빈곤과 외로움보다 탈북자에게 더 가혹한 시련은 차별과 편견이다. 2014년 통일부와 하나재단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탈북민의 주당 근로시간은 한국인 평균보다 3시간 더 많지만, 월평균 소득은 146만원으로 노동자 평균소득의 절반에도 못 미치고 실업률은 평균보다 4배가 높다. 2002년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조사한 탈북민의 범죄피해율은 한국인 평균의 5배, 자살률은 3배에 달한다. 북한 주민의 인권문제를 제기하는 이들도 탈북자의 인권에는 놀랄 정도로 무심하다.

-탈북자들이 일부러 조선족인 척하고 다니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정도로 탈북자에 대한 차별이 심한가요?

“탈북자들은 어떻게든 탈북자인 걸 숨기려고 합니다. 고향이 속초, 강원도라고 둘러대는 게 첫번째고요, 더 둘러댈 게 없으면 조선족이라고 해요. 탈북자는 취업이 안 되어도 조선족이라면 받아주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조선족 동포가 2등 국민이라면 탈북자는 불가촉천민이다’라고 쓰셨군요. 근데 왜 그럴까요? 조선족과 달리 탈북자는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내국인인데요.

“기본적으로 탈북자에 대한 의심과 경계, 불신이 있는 거죠. ‘걔들은 게으를 거야’ ‘걔들은 일을 못해’ 하는 무의식이 저변에 깔려 있어요. 근데 탈북자들이 게을러서가 아니라 그들이 한국 사회에서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이나 기술을 습득하기가 어려운 거예요. 북한에서 뭘 했던 사람이든 탈북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종은 주로 3D 업종으로 제한되어 있으니까.”

-그래서 대학에 진학하셨나요? 새로운 탈출구를 찾기 위해서?

“한국은 내가 선택한 ‘자유의 땅’인데 나는 여기서 정말 ‘버러지’ 같은 거예요. 아는 것도 없고 이 사회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기반도 없는 무지렁이. 이런 상황을 유일하게 바꿀 수 있는 게 공부라고 생각했어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수업을 따라가는 건 결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북한 학교에서 영어와 러시아어 중 러시아어를 선택했던 그에게 영어교재를 쓰거나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은 깜깜절벽이었고 국사나 세계사도 기본 시각 자체가 달라서 모든 걸 원점에서부터 새로 공부하다시피 해야 했다. 등록금 마련을 위해 붕어빵 장사부터 엑스트라, 관광가이드, 치킨집 배달, 건설현장 노가다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 천신만고 끝에 대학을 졸업했으나 탈북민 신분으로 좁은 취업문을 통과하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일과 같았다.

붕어빵 장사에서 건설 노가다까지
힘들게 대학 졸업했으나 취업 막혀
취업 면접날 연평도 포격사건 터져
“‘너네가 한 거 어떻게 생각하냐’에
얼떨결에 ‘죄송합니다’ 그랬다”

-명문대 졸업장을 가져도 탈북자에 대한 편견을 돌파하기 어렵단 얘깁니까?

“어떤 때는 ‘북한 애들 거지 같아. 오청성처럼 옥수수만 먹고 기생충만 많은 애들 아냐?’ 하고, 어떤 때는 간첩사건 같은 게 터지면 ‘니네도 간첩 아냐?’ 하고, 북한에서 핵 도발 같은 게 있으면 ‘니네 북한은 왜 그러니?’ 하고 물어요. 예측할 수 없는 방향에서 서로 다른 성격의 비난과 혐오가 동시에 쏟아지는데, 그 모든 걸 한 사람이 계속 맞닥뜨려야 하는 형국이죠.”

-불쌍하고 동정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가 혐오와 적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단 말씀이군요. ‘너희 북한은 왜 그 모양이니?’라고 할 때 뭐라고 하셨어요?

“제가 취업 면접을 보던 날이 마침 북한의 연평도 폭격이 있던 날이었어요. 오전부터 면접대기 하느라고 무슨 일이 터졌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면접관 한 사람이 대뜸 그러더라고요. ‘니네 북한에서 연평도에 폭격한 거 어떻게 생각하냐?’고요. 난 연평도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니네 북한’이라는 말에 당황했지만, 얼떨결에 ‘죄송합니다’ 그랬어요.”

-뭐가 죄송해요? 탈북자가 연평도 폭격과 무슨 관련 있다고?

“한국 사회 잘 모르는 것도 죄송합니다, 탈북자인 것도 죄송합니다, 그런 순간들이 많다니까요.”

탈북민 중 한국에 와서 대학이나 대학원을 졸업한 사람이 1800여명에 달하고 주승현처럼 박사학위를 얻은 이도 적지 않지만 고학력 탈북자들도 차별과 편견에서 예외가 되지 못했다. 북한 교사 출신의 탈북민은 식당 주방보조로, 연구자 출신의 탈북민은 이삿짐을 옮기는 일로 생계를 이어간다. 북한에서 의사였던 한 탈북자는 한국에 온 뒤 일거리를 찾지 못해 고층빌딩 유리창을 닦다가 추락해 숨졌고, 김책공대(북한의 명문 공대)를 나와 한국에서 경영학과를 졸업한 탈북자는 번번이 취업에 실패한 끝에 자신의 임대아파트 화장실에서 목을 매고 자살했다.

-수많은 탈북자단체들은 뭘 합니까? 극우세력 들러리 설 때만 이용되나요? 탈북민 현판을 달고 있다면 탈북자가 차별받지 않도록 권익보호에 앞장서야 마땅한 거 아닙니까?

“대부분이 단체를 민주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경험이 없고, 자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기반이나 전문성도 없습니다. 탈북자의 권익보다는 반북활동을 통한 단체운영과 생계유지에 급급한 형편이죠. 수년 전에 제가 아는 지인 한 분이 탈북자들의 직장 내 차별에 대응하기 위해서 조합 같은 걸 만들려고 시도한 적 있었는데 여기저기서 달려와서 만류하고 포기시키더라고요.”

-왜요? 그런 걸 만드는 게 무슨 해가 되나요?

“우리나라 국민들이 어떤 권익활동을 하면 민주주의의 발전이라고 보지만 탈북자들이 그런 걸 하면 정부나 국가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사람들은 탈북자들이 보수우익 집회만 따라다닌다고 뭐라고 하지만, 탈북자들이 진보를 표방하면 바로 ‘빨갱이 집단’으로 매도돼요.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빨갱이로 몰리면 방어하고 보호해줄 수 있는 데가 거의 없어요. 그러니 저부터도 발언하기가 조심스러워지고 두려움이 많죠.”

그러나 시대의 변화일까. 탈북자 사회에도 새로운 주체들이 형성되고 있다. 주승현은 그 희망의 징조를 지난 촛불집회에서 발견했다.

탈북자 출신으로 ‘통일학 박사 1호’인 주승현 전주기전대 교수가 지난달 20일 임진각 입구에 걸려있는 다양한 손팻말과 리본을 살펴보고 있다. 파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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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든 탈북청년들

-박사님 책에서 읽고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지난 촛불집회에 참석한 청년 탈북자들이 많았다고요? 언론에도 보도된 적 없는 일 같아요.

“저도 제가 아는 탈북청년들 페이스북을 보고 알았어요. 촛불집회 같이 갈 사람을 모으고 집회에 나간 사진을 올리고 하더라고요. ‘탈북자여서 촛불집회 가자’거나 ‘탈북자니까 가지 말자’거나, 탈북자임을 전제로 하는 그 어떤 거리낌이나 망설임도 없이 ‘국민으로서, 청년으로서’ 촛불집회에 나가는 거예요. 저는 분단사를 연구한 사람으로 분단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알죠. 그래서 두려움도 크고. 근데 이 친구들은 저보다 훨씬 용감하고 당당해요. 그 모습에 정말 깜짝 놀랐어요.”

-탈북자들 내에서, 특히 20~30대 젊은 층에서 정치적이고 사상적인 스펙트럼이 훨씬 다양해지고 있다는 의미군요.

“북한에 대해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 보수일 거라고 대개들 생각하는데 탈북자들 내부를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도 않아요. 이 사람들이 한국 사회에서 살면서 습득한 경험과 태도, 민주주의 의식은 여기서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 마인드하곤 사뭇 다르죠.”

-한국의 보수와는 다르다?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에서 그간 단편적으로 진보와 보수를 구분해왔던 잣대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죠. 그런 잘못된 잣대 때문에 지금까지 탈북자의 다양성이 묻히고 획일적인 평가만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한 가지 더 주목할 사항은 탈북청년들이 통일에 대해서 가지는 조심스러운 시선이다. 주승현은 그의 책에서 ‘통일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히는 탈북청년들의 목소리를 인용한다. “통일이 된 뒤 탈북민이 겪고 있는 것과 같은 차별을 그들의 고향사람들이 받을 것을 생각하면 통일이 반갑지만은 않으며 북한이 남한에 값싼 노동력과 자원을 제공하는 곳이 되길 원치 않는다”는 논지였다. 그들에게 ‘북한인권’과 ‘평화공존’과 ‘민주주의’는 절대로 배치되는 개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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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3만명에서 시작하는 통일

-아시다시피 이번 평창올림픽의 남북단일팀 구성에 대한 한국 청년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전세버스 타고 와서 북한 선수단이나 응원단 앞에서 ‘돌아가라’고 고함치는 극렬 시위대도 있었고요.

“통일문제 연구자로서 보자면 이래요. 옛날에는 통일문제, 남북문제는 정부의 고유영역과 같았어요. 정부가 국가적 당위를 가지고 하는 일에 국민들이 토 달면 안 되는 거라고 여겼는데, 이제는 달라진 거죠. 워낙 분단이 오래되고 통일에 대한 시각도 다양해지다 보니까, 통일담론을 국가가 단독적으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봅니다.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로 가면서 국민들 생각의 다양성, 표현의 다양성이 넓어졌다는 건 좋은 일이죠. 동시에 ‘국민적 차원에서’ 통일에 대한 논의가 모아지지 않으면 굉장히 많은 마찰이 있을 수 있겠구나 싶어요.”

탈북자 15%가 다시 ‘탈남’하는 현실
“탈북자들이 얻고자 하는 자유는
자존감과 자부심을 공유하는 곳”
“탈북자 잘 정착하도록 돕는 것은
통일준비능력을 검증하는 실험대”

-우리 사회에서 통일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가능할까요?

“통일 문제를 둘러싸고 진보와 보수가 충돌하면서 통일정책에 일관성과 연속성이 결여되다 보니까 늘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행보였죠. 지금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통일국민협약’을 만들려고 시도하고 있잖아요. 독일의 동방정책처럼 정권이 어떻게 바뀌든 장기적인 통일전략을 정하고 일관되게 추진하자는 거죠. 독일이 동방정책을 발표한 건 69년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 총리 때인데, 그 후 기민당에서 사민당, 다시 기민당으로 정권이 넘어가는 동안 일관되게 지켜졌어요. 진보인 사민당이 만든 동방정책을 그대로 계승해서 보수인 기민당이 통일을 이뤘죠. 우리도 이런 게 필요합니다. 5년 지나면 무조건 엎어버리고 밟아버려서는 통일정책이랄 수가 없어요.”

-북에도 살아보고 남에도 살아보셨죠. 북에서만큼 남에서도 적지 않은 상처를 받고 절망하기도 하셨습니다. 휴전선을 넘을 때 희망을 여기서 찾으셨습니까?

“탈북자들이 한국 사회에서 겪는 일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절망스럽습니다. 탈북자에게 특별한 배려나 환대를 요구하는 건 아닙니다. 경제적인 지원, 그런 거 안 해줘도 괜찮아요. 동등한 국민으로 받아들여주기만 한다면, 남한 주민보다 가진 건 없어도 같은 국민으로 적응하고 자기 능력껏 살 수 있을 테니까요.”

-그게 안 되어서 탈북민 상당수가 다시 ‘탈남’을 하거나 심지어 ‘재입북-재탈북’을 반복하는 경우도 있다면서요. 박사님 책에서 탈북자의 15%가 탈남을 한다는 얘길 읽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들이 그렇게 여러 차례 국경을 넘나들며 찾으려는 건 뭘까요?

“‘자유’죠. 그들이 얻고자 하는 자유는 단순히 억압당하지 않는 자유뿐만 아니라 자존감과 자부심을 공유하고 그걸 지키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곳을 뜻할 거예요.”

-대한민국이 그런 나라가 될 수 있다고 보세요?

“희망은 계속 존재해왔다고 봅니다. 87년 항쟁부터 촛불… 너무 절망스럽다 싶으면 ‘우리가 바꿀 수도 있다’는 역사적 사례를 계속 남기고 있잖아요. 그건 결국 북한이 가질 수 없는 대한민국의 저력이자 제도의 우월성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다만, 남북한 공히 이념의 문제로 사람을 매장시키거나 안보를 이유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폐단은 분단 상황을 넘어설 때만 가능한 거죠.”

-과거 수십년간 우리 사회에서 국가안보와 민주주의는 대립되는 개념인 것처럼 인식되어왔습니다. 민주주의와 분단극복은 동전의 양면이란 말씀이군요.

“우리 사회 민주주의가 발전할수록 탈북자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달라지는 걸 느낍니다. 탈북자는 한국 사회 최하층 계급이자 아웃사이더니까요. 탈북자가 공동체에 잘 적응하고 정착하도록 돕는 것은 우리 사회의 통일준비능력을 검증하는 실험대가 될 거라고 봅니다.”

박근혜는 ‘통일 대박’이라고 했고 이명박은 ‘통일은 도둑같이 한밤중에 올 수 있다’고 했지만, 통일은 한밤중에 굴러들어오는 갑작스런 횡재수가 아니다. 정상 간의 밀담으로 요술처럼 뚝딱 만들어지는 호박마차도 아니다. 나와 다른 이들을 나와 동등한 존재로 존중하고 공동체 구성원으로 함께할 의지를 내는 것, 그것이 통일로 가는 긴 여정의 출발점이자 종착역이라고 주승현은 말한다.

“통일은 한밤중에 얻는 ‘대박’보다는 시나브로 작은 통일이 모여 결실을 맺는 끈기와 인내의 열매여야 한다.”(같은 책 115쪽)

녹취 이수현

주승현을 만든 시간들

‘고난의 행군’ 시기 대기근은 중·고교 시절 나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사진은 인천 강화군 양사면 철산리 평화전망대에서 강 건너편에 바라보이는 북한 들녘. 박종식 기자
15일 오후 경기 파주시 장단면 도라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개성시 일대. 북녘 기정동 마을 한복판에 대형 인공기가 펄럭이고 있다. 파주/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2014년 탈북민 학생들과 함께.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부산으로 내려가 탈북민 청소년 대안학교에서 사감 겸 교사로 지냈다. 학생들이 온전히 치유받을 수 있게 함께 바다며 산이며 다녔던 기억이 있다.
2017년 러시아 여행. 시간이 날 때마다 북한과 인접한 나라들을 다니며 외부에서 한반도 분단을 바라본다.
다시 대학원으로. 북한에선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한국에서는 공부를 해야만 했다. 대학원 엠비에이(MBA) 과정에 입학해 경영학 공부를 하고 있다. 남북통일 시 경제 통합이 가장 어려울 것으로 생각됐기 때문이다.

▶이진순 풀뿌리정치실험실 '와글' 대표, 언론학 박사. 새로운 소통기술과 시민참여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연구하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다. 사람 사이의 수평적 그물망이 어떻게 거대한 수직의 권력을 제어하는지, 평범한 사람들의 따뜻함이 어떻게 얼어붙은 세상을 되살리는지 찾아내는 일에 큰 기쁨을 느낀다.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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