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적 리더십의 위대한 장군 더글라스 맥아더..리더는 '가라'고 하지 않고 '가자'고 한다

2018. 2. 28.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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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단을 오가는 평가의 주인공, 더글라스 맥아더. 그에 대한 세상의 시선은 태양과 어둠처럼 절대 공존할 수 없는 거리감이 있다. 이 같은 평가에 리더십 학자들은 “맥아더 리더십은 그 자체가 연구 대상이다”라고 할 정도로 맥아더는 20세기 가장 문제적 리더 중 한 명이다. 그럼에도 맥아더가 보여준 뛰어난 전공, 성적, 기록, 용병술, 군전략, 결단력, 지휘력 등을 종합해보면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카리스마를 갖춘 행동하는 천재형 리더’라고.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맥아더 (사진 Nutter(Army) by 위키미디어)

▶20세기 가장 위대한 장군이자 논쟁의 주인공

한 사람, 특히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사가와 대중들의 평가가 만장일치, 즉 모두의 박수를 받거나, 비난 일색일 수는 없다. 아무리 뛰어난 영웅이나, 리더도 그 화려한 공과 탁월한 리더십 뒤에는 그늘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보통의 평판’에 있어 호불호나 긍정과 부정의 비율이 어느 한 쪽으로 몰리는 것은 일반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에 대한 평가는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그야말로 양극단을 치닫는다. 그를 높이 평가하는 집단에서는 맥아더에 대해 거의 ‘신’과 동일시하는 찬사를 보내고 또한 그를 폄하하는 집단에서는 마치 ‘맥아더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듯한 평가를 내린다.

그에 대한 수식어만 보아도 그는 마치 야누스의 얼굴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맥아더는 ‘아메리칸 시저’이다’ ‘20세기 가장 완벽한 군인이다’ ‘지장, 용장, 덕장의 면모를 갖춘 유일한 장군이다’ ‘그는 탁월한 전략가이며, 리더이다’ ‘그는 왕관을 쓰지 않은 황제이다’. 그러나 ‘마마보이일 뿐이다’ ‘부하의 공을 가로챈 거짓말쟁이다’ ‘오만함 때문에 명령불복종으로 파면되었다’ 등 부정적인 여론 또한 만만치 않다. 이처럼 양극단 평가의 주인공,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맥아더에 대한 세상의 시선은 태양과 어둠처럼 절대 공존할 수 없는 거리감이 있다.

위키미디어
일부 리더십 학자들은 “맥아더 리더십은 그 자체가 연구대상”이라고 할 정도로 맥아더는 20세기 가장 문제적 리더 중 한 명이다. 그럼에도 맥아더가 보여준 뛰어난 전공, 성적, 기록, 용병술, 군전략, 결단력, 지휘력 등을 종합해보면 맥아더를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카리스마를 갖춘 행동하는 천재형 리더’라고.

맥아더의 군 경력은 화려하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38세의 젊은 나이에 장군이 되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에서 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넓은 지역을 작전지역으로 삼은 태평양 주둔 미군사령관, 16국의 연합군을 지휘한 유엔군 사령관으로서 공을 세웠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맥아더가 갖고 있는 기록들이다. 그는 육군사관학교를 수석 졸업했다. 당시 그의 성적은 육군사관학교 역사상 베스트3안에 드는 최고 성적이었다. 이후 그는 최연소 육군 소장, 최연소 육군사관학교 교장, 최연소 육군참모총장, 최연소 육군 원수를 역임하며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엘리트 코스를 거쳤다. 훈장만 해도 총 23개의 훈장을 받았고 필리핀 육군 원수에 임명되었으며 전후 일본에서 총독과 같은 존재로 군림했었다.

미 육군 원수 정모, 선글라스, 콘 파이프 등 맥아더를 상징하는 것들이 있다. 흔히들 맥아더가 사령관이 되어 이런 자유스런 복장을 연출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맥아더는 제1차 세계대전의 총알이 빗발치는 전선에서도 철모를 쓰지 않고 이런 복장을 입었다. 게다가 그는 스카프나 머플러를 착용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병사들의 복장 군기에 대해 매우 엄했다. 이중적인 이런 기준에서 맥아더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맥아더의 리더십은 제왕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맥아더의 이러한 ‘연출’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그는 나이 차이가 많지 않는 병사들과는 거리감 없는 대면 리더십, 스킨십을 자주 사용했다. 병사들도 젊은 지휘관의 격의 없는 행동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며 그를 따랐다. 하지만 생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쟁에서 친밀감, 동료 의식만 강조된 리더십만으로는 승리를 얻고 생명을 보존하기 힘들었다. 맥아더의 선택은 ‘카리스마, 즉 권위’였다. 그는 친구 같은 리더십에 믿음을 바탕으로 한 카리스마를 장착해 병사들의 용기와 능력을 발휘하게 한 것이다.

맥아더가 만약에 후방 깊숙한 곳에서 전투를 지휘했다면 그의 명령을 따를 병사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맥아더는 최전선에 있었다. 심지어 어떤 전투에서는 돌격대처럼 행동해 부하들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그의 전투 지휘를 본 동료 장교들과 부하들이 “맥아더는 분명 군인으로서 출세할 것이다. 물론 그가 전사만 하지 않는다면”이라 할 정도로 그는 용장이었다.

또 하나는 그의 전략적 사고와 리더십이 교범적이고 원칙과 규율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엄격한 군기와 명령, 원칙으로 움직이는 군대에서 빠른 판단과 창의적 전술을 발휘했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맥아더가 바로 법이다”라고 긍정과 부정의 두 가지 시선을 동시에 그에게 보냈지만 맥아더는 정형화된 원칙, 관행, 규정의 두꺼운 방패 뒤에 숨지 않았다. 그는 ‘리더가 교범의 준수에만 매달린다면 비겁한 짓이다’고 생각한 깨어있는 리더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일본 주둔 미군사령관이 된 맥아더는 한국전쟁에서 또 다른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는 전쟁 발발 3일 만에 전선을 찾아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전략을 구상했다. 바로 인천상륙작전이다. 그는 낙동강 전선까지 몰린 연합군이 다시 전세를 역전해 북으로 진군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병사들의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파악했다. 그는 북한군의 허리를 자르는 작전을 시도했다. 그러나 참모들은 모두 반대했다. 워싱턴의 군부, 도쿄의 참모들이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확률은 5000분의 1”라고 하며 반대했지만 맥아더는 성공을 자신했다. 그리고 그 성공의 확률을 높이는데 주력했다. 그는 전세를 바꾸는 큰 흐름에만 주력하고 부분 전술 등은 부하들에게 위임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부하들이 ‘작은 일’을 ‘큰 일’처럼 중요하게 받아들이게 하는데 매우 능했다. 즉 맥아더는 카리스마의 리더십, 전세를 역전시키는 창의적 전략 리더십을 통해 부하들에게 힘과 용기를 심어 준 것이다.

물론 그 역시 실패와 패전의 기록이 무수히 많다. 특히 굴욕적인 필리핀 바탄 철수, 평양-원산 간의 새로운 전선 구축이라는 워싱턴의 정무적 판단을 무시하고 압록강까지 전선을 확대해 중공군의 참전을 유발했다는 비판에서는 자유스러울 수 없다. 더구나 문민 통치 미국에서 대통령의 명령을 거부했다는 것은 당시 트루먼 대통령의 개인적인 시선과 견제가 있다 하더라도 이 역시 맥아더에게 좋은 추억은 아니다. 1948년, 1952년 미국의 공화당은 맥아더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 했다. 열렬한 지지 세력이 있었지만 반대로 강력한 반대 집단도 있었다. 맥아더에 대해 사람들은 “맥아더의 뛰어난 능력, 성과는 모두 사실이다. 반대로 그에게서 발견되는 결점과 실패 역시 사실”이라고 말한다. 맥아더는 리더십에 대한 많은 교훈을 남겼다. 분명한 것은 그 교훈 중에서 맥아더는 조직의 승리를 위해 노력하고 공부하고 선두에서 행동한 리더라는 점이다.

▶미군 내 모든 ‘최연소의 기록’의 장군

맥아더는 1880년 위스콘신 주 리틀록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위스콘신 주 주지사를 역임했고 아버지는 남북전쟁, 미국스페인전쟁, 미국필리핀 전쟁에 참전한 장군 출신으로 필리핀 총독을 지냈다. 어머니 메리 하디 맥아더 역시 미국의 상류층 출신이다. 맥아더는 금수저급 ‘엄친아’였다.

맥아더는 군인 출신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신도 군인의 길을 가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 그는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한다. 맥아더에 대한 집안의 기대가 컸다. 특히 어머니는 아들의 교육에 전념하기 위해 집을 떠나 웨스트포인트 근처에 방을 얻어 맥아더의 뒷바라지를 했다. ‘미국판 맹모’인 셈이다. 맥아더가 미 육사에 진학할 때의 일화가 있다. 맥아더는 척추측만증이라 육사의 엄격한 신체검사에서 탈락할 수 있었다. 그는 당시 의사를 찾아가 모든 방법을 써서 이를 치료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훗날 의사는 “맥아더처럼 의사의 말을 잘 듣고 치료를 받은 환자를 본 적이 없다”라고 술회했다. 맥아더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힘든 과정과 고통도 감내해내는 굳은 의지의 인물이었다.

맥아더는 생도대장을 지내며 육사의 야구 선수로도 활약했다. 하지만 맥아더가 육사 시절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육사의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공공연히 행해지는 선배의 체벌이었다. 이 체벌은 정신교육과 군기확립을 넘어 생도들의 자퇴, 자살을 부를 정도로 가혹했다. 특히 권투 경기 형식으로 빈번히, 거의 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맥아더 역시 저학년 때 예외가 아니었다. 한 번은 선배들에게 가혹한 신고식을 당한 후 맥아더는 밤새 앓았다. 그때 맥아더는 동기에게 “내가 너무 신음 소리를 내 그 소리가 커지면 차라리 나를 기절시켜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동기는 훗날 맥아더의 이런 모습에서 ‘보통 사람과 다른 면모’를 발견했다고 토로할 정도로 맥아더는 인내심은 남달랐다. 그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결국 맥아더는 이를 양심에 따라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면서 가혹 행위를 일삼은 선배들을 지명한 것이다. 그러나 내부 고발의 후폭풍은 거셌다.

맥아더는 생도들 사이에서 일종의 왕따를 당하기도 하고 ‘문제 제기 생도’로 인식되는 불편을 겪었다. 겉치레에 치중하는 행동들을 혐오했던 맥아더의 육사 시절은 한마디로 친구보다 적이 많았다. 그래서일까, 그의 결혼식에 참석한 육사 친구들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맥아더는 육사를 졸업했다. 수석 졸업으로, 그의 점수는 역대 최고점인 98점이었다.

맥아더가 본격적으로 군인으로서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다. 그는 보병42사단의 참모장, 대령으로 유럽 전선에 참전했다. 당시 미군은 전투 경험이 일천했다. 맥아더는 영국과 프랑스군의 전투 전술을 공부했다. 그에게 ‘모르는 것을 알려는 노력’은 결코 부끄럽지 않은 행동이었다. 맥아더는 영국, 프랑스 장교들에게 물어보고, 배운 것을 실전에 응용하면서 적응해나갔다.

맥아더는 임무, 완벽, 목표 수행 등에 있어 거의 강박증에 가까운 책임감이 있었다. 그 책임감이 맥아더를 최전선에 서게 했다. 당시 미군의 규율은 지휘관이 최전선에 서는 것을 금지했지만 맥아더는 이를 무시했다. 그는 철모도 쓰지 않고 병사들과 적의 참호를 향해 돌격했다.

당시 미군 지휘부도 마찬가지지만 병사들 역시 맥아더의 이러한 리더십과 지휘력을 매우 독특하고 생소하게 받아들였다. 미군 지휘부는 군율과 명령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전술로 전투를 하는 맥아더가 못마땅했다. 병사들 역시 정모를 쓰고 심지어 승마용 채찍을 들고 지휘하는 맥아더를 보며 처음에는 혀를 내둘렀지만 그의 솔선수범과 함께, 모든 것을 병사들과 함께 하는 모습을 보고 리더로서 신뢰하기 시작했다.

맥아더는 승전을 거듭했다. 맥아더는 한 손에 카리스마를, 다른 손에는 형같은 친숙한 리더십으로 조직을 이끈 것이다. 병사들은 맥아더를 ‘승리의 불사신’ ‘전쟁터의 멋쟁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특히 1918년 코트드샤티용 전투에서는 고지를 두고 무려 4일간 육탄전을 벌여 끝내 승리를 쟁취했다. 그의 탁월한 전술과 무공은 연합군에 널리 알려졌고 영국과 프랑스는 맥아더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맥아더는 1918년 육군 준장으로 승진해 42사단장이 되었다. 당시 38세, 유럽 주둔 미군 장군 중 최연소였다. 성과가 있는 곳에 포상이 따르는 법. 맥아더는 3개의 수훈십자훈장, 7개의 은성무공훈장 등 총 15개의 훈장과 포상을 받았다. 맥아더의 승전이 의미 있는 것은 그가 이끈 42사단의 특수함 때문이다. 당시 미군은 각 주 단위 출신 병사로 사단을 구성했지만 그 부작용을 막기 위해 42사단은 미국의 여러 주에서 차출한 병사로 구성했다. 유대감, 단결력에서 미군 중에서도 약체에 속했다. 오죽하면 다양한 병사들이 모여 있다 해서 42사단을 ‘레인보우 사단’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맥아더는 이런 이질적인 병사들을 하나의 목표, 하나의 조직으로 만들어내는데 성공한 리더였다. 그 절대적인 비결은 자신이 먼저 병사들과 하나가 되는 것이었고 그 방법은 그들에게 지시나 명령보다는 먼저 행동하고 모범을 보이는 것이었다. 솔선수범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강력하고 기본이 되는 리더십임을 다시 한 번 증명한 것이다.

하지만 맥아더의 이런 리더십을 당시 미국 유럽 원정군 사령관 존 조지프 퍼싱 장군은 낮게 평가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맥아더는 퍼싱을 존경했다. 훗날,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을 지휘한 맥아더에게 트루먼 대통령이 5성 장군인 원수를 뛰어넘는 6성 장군 승진을 제안했다. 맥아더로서는 미국 최초의 6성 장군이라는 명예를 얻을 기회였다. 하지만 맥아더는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대통령 각하, 미국에서 6성 장군이 될 수 있는 분은 초대 대통령이신 조지 워싱턴 장군과 제1차 세계대전을 지휘한 존 조지프 퍼싱 원수님 외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전쟁 몽타주 (사진 위키미디어)
▶‘개구리 작전’으로 승전을 얻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맥아더는 1919년 자신의 모교인 웨스트포인트 교장으로 취임했다. 일화가 있다. 맥아더가 산책을 하는데 총을 든 강도가 나타났다. 그는 돈을 내놓으라 했지만 자존심이 강한 맥아더는 이를 듣지 않고 강도에게 대항했다. 강도가 총으로 위협하자 맥아더는 “나를 죽이려면 맘대로 하라”고 말한다. “나는 장군 맥아더이다. 만약 네가 날 죽인다면 미국의 장군을 죽인 너를 경찰은 끝까지 추격해 잡을 것이다. 차라리 일대일로 나와 싸우자.” 그 소리를 듣고 강도가 갑자기 총을 내리고 머리를 숙였다. “장군님, 죄송합니다. 저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장군님이 지휘하던 42사단에 근무했습니다.” 맥아더의 강한 기운과 사단장 시절 유연하고 신뢰받는 리더십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맥아더는 1925년 육군 최연소 소장이 되고 1930년 후버 대통령에 의해 육군참모총장으로 취임했다. 그의 나이 50세였다. 맥아더는 1935년 육군참모총장을 사임하고 아버지 때부터 인연인 있는 필리핀으로 건너가 필리핀 정부 최고 군사 고문에 임명되었다. 2년 뒤 맥아더는 필리핀 육군 원수로 추대되며 무려 34년간 몸담았던 군대를 떠났다. 특히 맥아더의 필리핀 근무는 아버지 대부터 이어지는 맥아더 가문의 필리핀 영향력을 더욱 증대시켰다.

그리고 맥아더가 다시 군복을 입게 되었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 맥아더는 현역으로 복귀해 바로 필리핀 주둔 미국 극동군 사령관이 되었다. 하지만 맥아더는 체계와 준비를 갖추지 못한 군대로 일본군을 상대할 수 없었다. 그는 바탄에서 쫓겨나다시피 철수했다. 물론 “나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1942년 맥아더는 태평양 방면 연합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 정예병은 없었다. 당시 미국의 중심전력은 유럽 전선에 투입되었다. 맥아더는 신병들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었다. 당시 일본군은 실전 경험이 풍부한 최강의 군대였다. 그들은 남태평양의 모든 섬과 제도를 점령해 태평양을 지배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새로운 작전을 구상했다. 그것은 일명 ‘개구리 전법’이었다. 미국 서부와 하와이에서 일본 본토까지 당시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섬들을 모두 공격한다는 것은 거의 무모한 작전이었다. 시간, 물자, 병력 손실을 각오해야 했다. 맥아더의 작전은 기발하면서도 효과적이었다. 그것은 마치 개구리가 펄쩍 뛰듯 징검다리처럼 섬을 점령하면서 일본 본토로 향하는 것이었다. 특히 일본군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요새를 구축한 섬들은 우회해 비교적 세력이 약한 섬들을 공략했다. 자연히 일본의 병참선은 길어졌고 이를 미 해군이 중간에서 차단했다. 특히 일본군은 라바울을 중요하게 여기고 이곳에 철벽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맥아더는 이를 건너 뛰어버렸다. 일본군은 전투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며 자멸하고 말았다.

1944년 맥아더는 육군 원수가 되었다. 미군 역사상 육군 원수는 율리시스 그랜트, 윌리엄 테쿰세 셔먼, 셰리던, 존 퍼싱 등 4명 뿐이었다.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명예대원수로 추대되었기 때문에 맥아더는 미 육군의 5명뿐인 원수에 오르는 영광을 안았다. 1945년 초, 맥아더는 비참하게 철수했던 필리핀을 다시 점령하고 일본의 목줄기를 노리는 오키나와까지 진출했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은 원자폭탄 두 발을 맞고 항복했다.

맥아더는 일본주둔군 사령관이 되었다. 실질적인 일본의 통치자가 된 것이다. 당시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맥아더를 ‘왕관만 쓰지 않은 황제’ ‘GHQ막부의 장군’ ‘집정관’이라고 불렀다. 맥아더는 일본을 지배했다. 그는 일본의 구심점이자 신격화된 천황을 인간의 위치를 격하시켰다. 맥아더는 일본 천황과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고 “일본의 천황은 인간이다”라는 발언을 했다. 일본의 정서를 알고 있으면서도 일본을 확고히 지배하기 위한 의식적 발언이었다. 그는 일본의 군국주의를 타파했다. 신격화, 신화 교육을 금지했고, 재벌 해체, 전범과 공동책임을 물어 공무원 2만 여명을 퇴직시켰다. 즉 일본을 다시는 전쟁을 할 수 없는 나라로 만든 것이다.

맥아더와 히로히토 천왕 (사진 Lt. Gaetano Faillace by 위키미디어)
▶정치가와 군인의 시각 차이를 드러낸 장군

1950년 6월25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졌다. 북한군이 일제히 38선을 넘었다. 한국군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3일만에 수도 서울이 적의 수중에 넘어가고 정부는 부산으로 옮기면서 한국군은 낙동강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맥아더는 6월29일 비행기를 타고 수원 인근 전선을 살폈다. 그리고 워싱턴에 즉각적인 군사 개입과 지상군 증파를 요청했다. 그리고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8군 소속 제24사단을 한국 전선으로 이동시켰다. 당시 미 8군 사령관은 워커 중장이었다. 맥아더는 곧바로 연합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맥아더는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것은 한반도의 허리를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즉 38선을 넘어 남쪽 깊숙이 진격한 북한군의 긴 병참선을 중간에 절단해 남쪽의 북한군을 고립시키는 전략이었다. 바로 인천상륙작전이다.

하지만 워싱턴의 합참은 물론이고 도쿄의 맥아더 참모들조차 이 작전을 반대했다. 심한 조수간만의 차, 깊고 넓은 갯벌로 이루어진 인천은 상륙작전의 성공 가능성을 무려 5000분의 1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워싱턴은 군산 상륙을 주장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나는 지금도 돌아가는 운명의 초침소리를 듣고 있다. 당장 행동하지 않으면 우린 다 죽는다. 이 작전만은 내 고집대로 하겠다”라고 주장하며 인천상륙작전을 지시했다. 1950년 9월15일, 210여 척의 함정, 7만 명의 병사들이 인천에 상륙했다. 맥아더의 예상은 딱 들어맞았다. 인천-서울 지역을 수복한 유엔군은 북한군을 고립시켰다. 낙동강 전선에서는 유엔군의 지원을 받은 국군이 전열을 정비하고 반격을 시도했다. 북한군은 백두대간의 험한 루트를 타고 북한으로 철수했고 상당수의 북한군은 지리산 등으로 숨어들었다.

맥아더가 이끄는 유엔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했다. 개성, 평양을 점령하고 의주까지 진출해 중국 국경과 마주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트루만과 합참은 ‘만약에’라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자칫 중공과 소련의 참전, 이어 한국이 제3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될 것을 걱정한 것이다. 중공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넘었다. 유엔군은 후퇴를 거듭했다.

1951년 4월19일, 맥아더는 워싱턴으로 날아가 상하양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했다. 그는 강력한 응징을 주장했다. “중공군이 참전했다. 우리는 더욱 강한 카드로 이 전쟁을 종식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전쟁을 유발할 것이다. 나는 제안한다. 첫째, 압록강을 넘어 중공군의 군수기지가 있는 만주를 폭격하자. 둘째, 중공에 대한 강력한 연안 봉쇄를 시도해야 한다. 셋째, 타이완 국민당 군대에 대한 제한을 풀어 그들이 중공 본토로 상륙할 수 있게 허가를 하자. 이 같은 나의 제안은 전쟁을 확대하자는 것이 아니다. 나는 군인이다. 전쟁을 종결시키고 승리를 얻는 것은 바로 군인의 사명이다.” 이 연설을 들은 트루만과 워싱턴은 깜짝 놀란다. 맥아더는 이번 기회에 공산주의를 전멸시키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그는 만주에 원자폭탄을 투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맥아더는 “승리하겠다는 의지가 없는 전쟁은 무의미하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트루만과 워싱턴의 정치가들은 그런 맥아더를 ‘매우 위험한 인물’로 인식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승리는 최우선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지지 않는 것’ 즉 현 상태의 종전, 빠른 해결이 최고의 목표였다. 그런 의미에서 맥아더는 불필요하고, 골치 아픈 존재였다. 또한 맥아더는 정치적으로도 이미 트루만의 경쟁자가 되어 있었다. 이 전쟁 영웅을 대통령 후보로 영입하기 위한 물밑 작업이 워싱턴의 공화당 강경파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1951년 4월11일 새벽 1시, 트루만은 맥아더를 명령 불복종으로 해임했다. 훗날 맥아더는 자신의 회고록에 “어떤 사환도, 어떤 하인도 이처럼 무례하게 해고당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맥아더의 미국 국민의 환영 속에 귀환했다. 그리고 의회에서 그 유명한 연설을 남겼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맥아더는 1952년 레밍턴랜드 이사회 회장을 역임하고 이내 은거했다. 그리고 1964년 워싱턴 D.C에서 사망했다. 그의 나이 84세, 20세기 최고의 전쟁 영웅이 사라진 것이다.

▷#리더십 | 리더는 ‘가라’고 하지 않고 ‘가자’고 한다

샤를 드골 대통령, 영국의 몽고메리 원수가 감탄했던 맥아더. 그는 완벽한 전략가이며 위대한 장군이었지만 결국 문민통치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군복을 벗었다.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맥아더의 군인으로서의 리더십은 지금 봐도 탁월하다. 단지 그가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23개의 수훈을 받았다거나, 2번의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의 무용담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맥아더에 대한 인간적인 평가는 극단을 치닫는다. 매우 귀족적이지만 교양을 갖추고 있으며 다정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평과 냉정하고 고압적이며 제왕적 취향을 가진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평이다. 즉 시기와 혐오 그리고 존경과 추앙이 공존하는 인간인 것이다. 맥아더가 일본 군정사령관 시절 일화다. 그와 만난 기자는 면담이 끝나고 맥아더를 이렇게 평가했다.

“맥아더를 만나게 되면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천재’ ‘위대한 장군’ 등을 중얼거리게 된다.”

또 있다. 유럽 주둔 미군사령관을 지낸 장군 그룬터는 평소 맥아더에 대해 비판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룬터는 맥아더를 만나고 나서 지지자로 돌변했다. 그는 “맥아더가 나를 그의 지지자로 만드는 데 불과 30분도 걸리지 않았어”라고 맥아더의 리더십에 감탄했다. 이 같은 일화의 종합판은 바로 맥아더 전기 <아메리칸 시저>를 쓴 작가 윌리엄 맨테스터이다. 그는 “맥아더의 리더십은 제왕적이라는 비난이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 대한 숭배를 강요하지 않았다. 또한 맥아더는 목표를 잊지 않았다”라고 평가했다.

맥아더는 “목표를 달성하려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해내고야 말겠다는 절박함, 그것 말고 대안은 없다”라고 말했다. 이는 그의 강박적인 책임의식으로 반영되었고, 자신의 몸과 행동이 수단이 되어 조직에게 영향을 끼쳤다. 맥아더는 뒤로 숨지 않았다. 문제에도, 전투에서도, 규정에서도 그는 관행과 전통, 원칙을 주장하기보다는 행동으로 리더의 보여준 인물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맥아더는 규율을 지배한 리더’라고 평한다. 그 지배는 매우 능동적이며 현실적이었다. 즉 그는 교과서와 경험에서만 정답을 찾지 않고 현장에서 답을 찾은 것이다.

“맥아더는 철두철미했다. 전쟁에서도, 사적인 영역에서도 그는 자신의 목표와 책임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 나가는 방법을 알고 있는 리더이자 한 인격체였다.” 이것은 맥아더 전기 작가 윌리엄 맨체스터의 술회이다. 그는 원래 맥아더 찬양자가 아니었다. 더구나 맥아더 전기를 쓰면서 맨체스터는 객관적인 시각을 갖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맨체스터 역시 맥아더의 자필 원고를 받고는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맥아더가 쓴 초고는 무려 원고지 수 천매. 맨체스터는 그 수 천매의 원고에서 단 한 자의 오자는 물론이고 고쳐 쓴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소름 끼치는 완벽주의자의 모습을 본 것이다. 맥아더가 갖고 있는 책임감에 대한 무거움과 엄중함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 맥아더의 리더십이 돋보이는 것은 조직원에 대한 맥아더의 태도이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부하들을 사지로 몰아넣지 않았다. 오히려 격려하고 칭찬하고 그것으로 부하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했다. 더구나 맥아더는 뛰어난 인재를 아끼고 중용했다. 그러기 위해 인종, 출신을 가리지 않았다. 그 자신의 지적 능력, 풍부한 경험 앞에서 작아질 수 있는 부하들의 존재를 부각시켰고 그들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격려한 것이다. 그리고 맥아더는 자신의 생각과 다를지라도 그들의 의견을 존중했다. 이는 단순히 맥아더의 넓은 마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조직원 모두의 재능과 능력을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맥아더의 리더십 중 가장 존경받는 부분은 그가 안락한 곳, 생존이 보장된 곳에서 우아하게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부하들에게 ‘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함께 가자’고 말한다”는 것이 맥아더인 것이다. 이 위대한 군인은 맨 앞에 서서 부하들의 손을 잡고 함께 한 것이다. 리더십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시대의 리더가 바로 맥아더이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위키미디어, 픽사베이 인용 및 참조 <맥아더의 승리하는 리더십> 디어도어 키니·도너 키니 공저 / 김현 옮김 / 북코리아 펴냄, <영혼을 지휘하는 리더십> 에드커 퍼이어 지음 / 이민수·최정민 옮김 / 책세상 펴냄, <맥아더> 리처드 B 프랭크 지음 / 김홍래 옮김 / 플래닛미디어 펴냄]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18호 (18.03.0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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