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관음보살이 은진미륵으로 둔갑한 이유는?

김명진 기자 2018. 2. 25.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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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툼한 입술에 퍼진 코, 째진 눈. 얼굴은 사다리꼴인데 그 위엔 버거워 보이는 긴 보관이 얹혀졌습니다. 충남 논산의 은진미륵입니다. 정식 이름은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입니다.

이 미륵보살상이 국보로 승격된다는 소식에 20여 년 만에 다시 찾았습니다. 일주문과 천왕문, 비탈길 따라 다시 석문을 통과하자 불쑥 눈앞에 나타납니다. 높이 18.12m, 건물 6층 높이 국내 최대 석불입니다. 그런데 기억 속의 크기보다는 좀 작습니다. 너무 오랜 세월 고층 건물에 갇혀 살았나 봅니다.
 

[SBS 뉴스 사이트에서 해당 동영상 보기]


이 미륵보살상엔 단골로 따라다니는 표현이 많습니다. '투박하다' '비례가 안 맞는다' '기이한 생김새''… 잘 봐줘도 그저 '토속적' '소박하다'는 정도죠. 한마디로 못났다는 얘기입니다. 하긴 200년 앞서 만들어진 통일신라시대 불상과 견줘 보면 꼭 견습공 작품처럼 엉성해 보입니다.
이런 평가를 사찰 측은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혜광 주지스님의 이야기입니다.
 

[SBS 뉴스 사이트에서 해당 동영상 보기]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처음엔 2등신으로 보이더니, 머리 위 보관 부분을 빼니 그럭저럭 비율이 맞습니다. 투박하다고요? 물론 투박하죠.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듭니다. 불상이 투박하면 안 되나요? 꼭 잘 생겨야만 하나요?

많은 절, 많은 박물관에 가봤지만 솔직히 기억나는 불상이 몇 점 없습니다. 석굴암 석가모니불을 포함해 손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잘 아는 미륵 반가사유상만 해도 국보 78호, 83호를 나란히 놓으면 당장 헷갈립니다. 내가 본 불상이 어느 쪽이지?

금동반가사유상 78호 (좌) 금동반가사유상 83호 (우)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그런데 이 미륵보살은 한번 보면 절대 잊히지 않습니다. 큼직한 돌덩이에 보관(寶官)과 얼굴, 큼직한 손, 불상이 갖춰야 할 요소만 두드러지게 강조됐습니다. 제작자인 혜명 스님이 의도했든 안 했든, 모양이 단순하니 기억하기 쉽습니다. 그만큼 쉽고 편하게 중생의 마음속에 들어온다는 뜻일 겁니다. '잘났다, 못났다'는 것은 그저 색(色)의 관점일 뿐, '어린아이와 같다'는 불성을 잘 구현하고 있다는 역설도 가능합니다.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하지만 당초 이 불상의 건립 동기가 순수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대규모 불사를 일으켜 껍데기뿐이었던 왕권을 세워보려던 고려 4대 광종(925~975)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던 거죠, 아버지 왕건이 장인으로 모셨던 30여 명의 지방 호족과 3천 200명에 달하는 개국 공신들은 왕의 목숨마저 위협하는 존재였습니다. 광종은 억울한 노비를 풀어주고, 과거제도로 신진 사대부라는 친위세력을 양성해 이들을 때려잡는 데에 일생을 바칩니다. 관촉사 미륵불 조성도 사찰과 일반 민중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럼 왜 논산이었을까요? 논산은 백제 멸망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땅입니다. 660년 계백의 5천 결사대가 이 일대 황산벌에서 비장한 최후를 맞았고, 백제를 다시 일으키려던 견훤 또한 왕건에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백제 유민들의 정서를 너무 잘 알았던 왕건은 개태사라는 대규모 사찰을 지었고, 광종도 관촉사를 선택한 것입니다. (물론 <관촉사 사적비>에는 한 여인이 이곳에서 큰 돌이 솟아난 것을 발견하고 관아에 신고해 불상을 세웠다는 전설이 기록돼 있습니다만).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관촉사 사적비

미륵불 완공까지는 장장 37년이 걸렸습니다. 한 덩이에 수십 톤짜리 화강암을 캐서 불상을 새기고, 이를 절까지 옮기고, 일으켜 세워 조립하는 과정은 상상 이상의 대역사였습니다. 조정에서 장인 1백 명이 내려오고, 현지에서 1천여 명이 동원됐다고 합니다. <관촉사 사적비>에는 "불상 머리 부분이 연산 땅 남촌 20리에 도착하자 그로 인해 마을 이름을 우두리(牛頭里)로 불렀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인력과 가축이 동원됐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주인이 밖에 서 있기에 여느 절과는 달리 미륵전이 텅 비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마을 쪽을 내려보노라면 당시 일꾼들이 얼마나 고생했을까 하는 아련한 생각이 듭니다. 보개 부분, 상반신, 하반신 이렇게 세 조각으로 만든 불상을 옮기는 데에 몇 년, 이를 절까지 올리는 데에 다시 몇 년이 걸렸을 겁니다. 불상이 너무 무거웠기에 겨울철 길에 물을 뿌려 얼린 뒤 미끄럼을 태워 날랐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더군요.
관촉사
<사적비>에는 아이들의 소꿉놀이에서 힌트를 얻어 불상의 하반신을 기반석 위에 올린 뒤 그 옆에 흙무더기를 쌓아 비스듬히 다음 조각을 끌어올리는 식으로 작업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기록엔 없습니다만 최종 완성까지는 적지 않은 인명 피해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불상이 원래 미륵보살이 아니라 관음보살이었다는 점입니다. 지금은 뜯겨나갔지만 화관에 관음보살의 스승인 아미타불이 새겨져 있었고, 오른손에 연꽃 가지를 들고 있는 것만 봐도 영락없는 관음보살입니다. 수인이라 부르는 손가락 모양 역시 '중생중품'을 하고 있습니다.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그런데도 왜 미륵보살이라고 부를까요?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수많은 민초들이 '이 불상은 미륵보살님'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광종이 어떤 불순한 정치적 의도를 가졌든, 또 식자들이 관음보살이라 부르든 말든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민초들에겐 그저 현실의 고통에서 건져줄 미륵보살이 필요했던 겁니다. 고려 말 목은 이색이 <관촉사>를 소재로 쓴 시에서도 '有大石像彌勒尊(거대한 미륵 석상이 있다네)'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이미 오래전부터 미륵보살로서 숭배돼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SBS 뉴스 사이트에서 해당 동영상 보기]

 
관촉사에 미륵보살상이 출현한 것을 전후해 인근 대조사를 비롯해 충남 논산과 홍성, 호남 지방, 경기도 남부에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미륵보살상들이 세워집니다. 모양이 서로 비슷비슷한 것을 보면 관촉사 석상을 제작 표준으로 삼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지역 형편에 따라 바위에 새기기도 하고, 자그마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유행처럼 번져나갔습니다.
대조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논산 송불암 미륵불 (사진=문화재청)
홍성 상하리 미륵불 (사진=문화재청)
경기도 안성 기솔리 석불입상 (사진=문화재청)
전남 화순 운주사 와불
미륵보살은 장차 이 땅에 내려와 차별과 가난을 없애버린다는 미래불입니다. 죽어서 극락 가는 것도 좋지만 당장 현실적 고통이 컸던 민초들에겐 너무 절실한 보살님이었습니다.

아, 그런데 시기가 문제였습니다. 56억 7천만 년이라는 상상할 수도 없는 세월을 기다려야 된다는 겁니다. 민초들은 빌고 또 빌었습니다. 제발 그 시기를 당겨달라고, 당장 내려오시라고. 이런 염원이 모이고 모여서 미륵불상이 만들어졌습니다. 관음보살조차 미륵보살로 여겼습니다. 못난 미륵보살의 얼굴은 바로 민초들이 마음속에 그려온 구세주의 얼굴이었습니다. 어떤가요? 아직도 관촉사 미륵보살이 못난이로 보이나요?

김명진 기자kmj@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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