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의 안뜰] 통신사보다 작은 규모로 대마도 파견.. 조선의 대일외교 한 축

강구열 2018. 2. 24. 18:0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63〉 조선사신단 '문위행'의 기록

1703년 음력 2월 5일 맑은 아침, 부산을 출발하여 대마도를 향해 배가 출발했다. 배에는 108명의 조선 사신단과 대마도에서 온 일본인 4명이 타고 있었다. 저녁 무렵 대마도에 거의 도착했을 때, 갑자기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바람 탓에 배가 침몰되면서 배에 탔던 사람들이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들의 불행한 죽음을 기리기 위해 대마도에는 위령비가 세워졌다. 이때 대마도를 향하다가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조선 사신단은 ‘문위행’(問慰行)으로 불리는 일본 외교 실무를 담당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 문위행에 대한 기록이 일본 도쿄의 도서관 한쪽에 남아 있다.

일본을 방문한 조선 역관의 행렬을 묘사한 게이오기주쿠대학 소장의 그림이다. 역관이 중심이 된 문위행은 통신사와 함께 조선시대 대일외교의 한 축을 담당했다.
통신사와 함께 일본 외교의 한 축 ‘문위행’

조선시대에 지금의 도쿄까지 파견되었던 조선의 사신단을 ‘통신사’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대일 외교의 중심축으로서 서울에서 도쿄까지 왕복하였던 통신사와 달리 부산에서 대마도까지 왕래한 또 다른 조선사신단이 운영되고 있었다. 이를 통신사와 구분하여 ‘문위행’이라고 불렀다. 108명의 안타까운 목숨을 잃은 조선사신단은 바로 문위행으로 파견된 사람들이었다. 통신사와 문위행은 조선시대 한·일 외교의 두 축이었다.

통신사는 에도막부의 쇼군이 새로 취임할 때 파견되었다. 서울에서 도쿄까지 왕복했으며, 300~500명에 달하는 큰 규모의 외교 사절이었다. 이에 비해 문위행은 외교 실무자가 중심이 되어 대마도까지 파견되었다. 그 대표인 정사는 역관이 맡았다. 문위행이 정례적으로 대마도에 파견하는 외교사절로 정착된 것은 1636년이며, 1860년까지 지속되었다. 특히 통신사의 경우에는 20~30년에 한 번씩 총 12회 파견하는 데 그쳤으나 문위행은 1636년 이후 평균 4~5년에 한 번씩, 총 54회에 걸쳐 파견되었다.

문위행은 두 나라의 현안문제를 해결하고 대일 외교 정책을 수행하는 데 실질적인 외교 업무를 담당했다. 또한 조선으로 수입하기 어려운 무기, 유황 등을 대마도를 통해 조달하기도 하였고, 무역품을 대마도에 가지고 가서 판매하여 수익을 올리기도 하였다. 정치 외교적인 현안의 해결뿐 아니라 군사상, 경제적 목적 등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대일외교 창구였다.

김홍조 해행기/일본 동양문고에 유일본으로 소장되어 있는 김홍조의 ‘해행기’ 표지와 본문. 문위행에 대한 유일한 개인기록인 해행기에는 당시 한·일 문화교류의 현장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문위행에 대한 유일한 개인 기록 ‘해행기’

하지만 문위행의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은데 그중 하나인 ‘해행기’는 우봉김씨 집안의 역관이었던 김홍조(1698∼1748)가 1734년에 쓴 일본사행록이다. 이 책은 일본 문위행에 관해 개인이 작성한 문헌으로는 현재까지 알려진 유일한 저술이다.

김홍조는 조선후기 역관의 대표적 인물인 김지남의 손자였다. 우봉김씨 가문은 17세기 초 역과에 진출하여 약 250년간 93명의 합격자를 배출했다. 부친과 숙부, 조부 및 형제들이 모두 역관이었던 가문에서 태어난 김홍조 역시 1719년 역과에 급제하였다. 1734년 37세에 문위행의 일원으로 파견되었는데 당시 문위정사는 김현문으로, 김홍조의 숙부였다.

해행기 서두에는 84명의 참가명단이 각 직책별로 분류되어 성명, 출신지 등이 적혀 있다. 또한 대마도에서 온 일본인 명단 65명도 적어놓았다. 그리고 한·일 양국이 주고받은 문서, 문위행 일원에게 제공된 식사 및 선물 내역, 문위행 출발부터 도착 및 귀국까지의 구체적인 일정과 활동 상황 등을 소상하게 기록해 놓았다.

“일본인의 품성은 정교함을 따른다”

김홍조가 대마도에 처음 도착해 느낀 일본의 첫인상은 깨끗함과 정교함이었다. 대마도 번주가 기거하는 곳에 처음 도착하였을 때 보았던 이즈하라 항구의 주변 풍광,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일본인의 생활 모습, 문위사행단을 맞이하며 구경하는 일본인들의 태도 등을 서술했다. 화자가 느끼는 첫인상의 강렬함은 정교함과 정결함이었다. 산세를 따라 줄지어 있는 일본인들의 집들을 보면서 화자는 “꽃과 나무를 심고 소나무와 삼나무를 둘렀으며, 흰 칠을 한 담장과 나는 듯한 용마루가 솔숲과 대숲 사이로 서로 어른거리는” 모습에 특별한 인상을 받았다. 그러면서 “이 땅 사람의 품성이 정교함을 따르기를 힘쓰니, 모든 일들이 대개 이와 같다”고 하였다. 또한 문위사행단의 화려한 행차를 구경하는 일본인들이 수천여명을 헤아릴 정도로 운집하였지만, 떠들거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을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일본 사람들의 질서정연하며 엄격하고 정결한 모습이 화자의 눈에 특별하게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일본 문화에 관한 김홍조의 적극적인 관심이다. 그는 한·일 문화 교류와 관련된 서술에 초점을 맞추었다. 해행기에는 한·일 선린외교의 상징적 인물로 통하는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1668~1755) 등 일본 지식인들과의 교류 및 조선과 일본의 연희 공연에 대해 서술해 두고 있어, 양국 문화교류의 양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김홍조는 아메노모리 호슈 및 그의 두 아들들과 필담 및 서신 왕래를 통해 상호 교유를 맺고 있었으며, 그밖에 일본인들에게 침술 등을 전수하기도 하는 등 대마도에 거주하던 일본 지식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가졌다.

아메노모리 호슈는 한문, 조선어, 중국어에 능통했으며, 조선 무역의 중개 역할을 하던 대마도에서 외교 담당관으로 활약하였다. 조선과의 국교 수복에 노력하였으며, 대등한 외교관계를 강조하여 성신외교(誠信外交)와 선린외교를 주장하였다. 아메노모리 호슈는 동래 왜관에 파견되었을 때 저자의 숙부인 김현문을 비롯하여 조선의 여러 지식인들과 특별한 친분을 맺고 있었다. 이번 문위행 파견에서 사신단 일행을 기다렸지만, 사적인 만남이 엄격히 규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김현문과 아메노모리 호슈는 오래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였다. 숙부와의 짧은 만남을 통해 아메노모리 호슈를 처음 본 인상에 대해 70여세의 노인임에도 광채가 빛나고 담아하고 맑은 풍모를 지녔다고 기록했다.

정우봉 고려대 교수·고려대 해외한국학자료센터 소장
공연과 풍속, 생활 소개… 한·일 문화 교류의 생생한 현장

김홍조는 한·일 외교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문화 교류의 장면을 매우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특히 대마도 측에서 제공한 일본 전통 연극, 노(能)의 공연을 눈앞에 보이듯이 매우 흥미롭게 묘사했다. 어떤 전설이나 설화에 의거한 이야기를 피리(笛), 고쓰즈미(小鼓), 오쓰즈미(大鼓), 북(太鼓) 등 네 종류의 반주악기에 맞추어 노래하고, 시테(仕手)라는 주연주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소리(謠)와 춤으로 사람들 앞에서 가면을 쓰고 연희를 보인다. 김홍조는 노에 등장하는 인물의 모습과 동작 등을 세심하게 묘사하고 아울러 관객들의 반응까지 서술해 “그 의미가 어떠한지를 알 수 없지만 구경하는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왁자지껄 웃으며 춤추고 발을 구르는 것을 보니 그 나라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임을 알 수 있었다”고 썼다. 대체로 조선의 사신단들이 일본 연희 장면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보이거나 간략하게 서술하는 것에 그친 것과는 다르다. 우호적이며 적극적인 시각이 일본 전통 연극인 노의 공연 상황과 등장인물에 관한 매우 정밀한 묘사로 이어진 것이다.

이런 시각은 대마도의 풍속과 생활을 집중적으로 서술해 놓은 대목에서도 확인된다. 김홍조는 일자별 기록과는 별개로 해행기의 끝부분에 대마도의 풍속과 생활, 제도 등을 항목별로 집중적으로 기록해 두었다. 통신사행록에 보이는 견문록의 서술방식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다루는 범위는 혼례, 장례, 형벌, 의복, 관직, 성품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해외 소재 문헌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 담겼을까

해행기 자료는 현재 일본 도쿄의 동양문고에 유일본으로 소장되어 있다. 이곳에는 조선에서 건너간 우리나라 서적 1700여종이 보관되어 있다. 한국어학자이며 문헌학자였던 마에마 교사쿠(前間恭作·1868~1942)가 수집한 장서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김홍조의 해행기도 원본은 일본에 있지만 언제든 꺼내 볼 수 있는 데이터로 확보하고 연구 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해외 소재 문헌자료들 속에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정우봉 고려대 교수·고려대 해외한국학자료센터 소장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