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고위공무원부터 간호사까지, 죽도록 일하면 진짜 죽는다

이하늬 기자 2018. 2. 24.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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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왜 과로사는 반복되는가…법의 사각지대 좁혀야

2월 18일, 가상화폐 관련 대책을 담당했던 고위 공무원이 돌연사했다. 앞서 지난 15일에는 서울 아산병원 신입 간호사가 아파트에서 스스로 몸을 던졌다. 고인의 휴대전화에는 ‘안 괴롭혔으면 좋겠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관련 없어 보이는 두 죽음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단어가 있다. ‘과로사’다.

한국 사회에서 과로사는 직종, 지위, 성별, 연령에 관계 없이 발생한다. 알려지지 않은 죽음이 더 많다. 회사 규모가 작거나 노동조합이 없는 경우 등이다. 전체 취업자의 38%는 중소기업도 아닌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한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16년 기준 한국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10.3%에 불과했다.

시민사회단체회원들이 지난해 8월 2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무제한 노동시간을 허용하는 근로기준법 특례 59조 폐지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혼자 119에 실려간 남편 이런 경우 유족은 도움을 청할 곳이 마땅치 않다. 지난해 남편을 잃은 김예숙씨(56)가 대표적이다. 전선회사에 다녔던 남편은 야근이 잦았다. 남편으로부터 마지막으로 받은 연락은 “여보, 나 야식먹고 있어”였다. 김씨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장폐색증을 앓던 남편은 스트레스가 심하면 음식을 먹지 못했다.

남편 최완순씨(당시 53세)는 야식을 먹은 뒤 계속 작업을 이어갔다. 오전 4시, 최씨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동료들 증언에 따르면 최씨는 심폐소생술 이후 잠시 정신을 차렸다. 회사에 119가 도착했다. 최씨는 혼자 119 구급차에 태워져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숨졌다. 공장에서는 기계가 계속 돌아갔다.

의사는 ‘급성심근경색’ 진단을 내렸다. 일하다 죽었는데 과로사가 아닌 심근경색이라니? 김씨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의사에게 항의하며 주저앉았다. 의사는 “과로사라는 병명은 없다. 사인미상으로 해드리겠다”고 했다. 김씨는 급성심근경색이 오히려 과로사로 인정 받기 쉽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회사에서 일하다 쓰러져 죽었으니 ‘자동으로’ 산업재해가 되는 줄 알았다. 산재를 신청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회사가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기다렸다. 회사가 한 말을 믿은 탓도 있다. 회사는 남편이 사망한 다음날 “산재 신청을 하려면 진료내역이 필요하다”며 10년간 진료내역을 요구했다.

3개월이 지나서야 노무사와 함께 회사를 찾았다. 김씨에 따르면 사장은 “누구를 위한 산재죠? 누구를 위해서 요구하는 거죠? 죽은 사람을 위한 건 아니잖아요?”라고 말했다. 김씨는 “니 신랑 죽어서 너 잘 먹고 잘 살자고 여기 온거잖아 그렇게 들렸다”고 말했다. 김씨의 목소리가 떨렸다.

근무표에 따르면 남편은 사망 2주 전, 주당 70시간을 일했다. 노동법은 1주 노동시간을 연장근로를 포함해 최대 52시간으로 제한한다. 하지만 최씨는 과로사를 인정 받지 못했다. 지병이 있었다는 이유였다. 회사는 장폐색증으로 치료 받은 고인의 진료내역서를 들이밀었다. 가족이 제출한 그 진료내역서였다.

1970년대부터 지적된 ‘장시간 노동’ 김씨는 “내가 아무것도 몰라서 이렇게 됐다”고 자책했다. 하지만 김씨 잘못이 아니다. 김씨는 과로사 유족의 ‘전형’에 가깝다. 과로의 기준이 뭔지, 어떤 사인이 과로사로 인정 받기 쉬운지, 회사는 왜 산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지, 산재 신청에 필요한 자료는 무엇인지… 어디서도 배우지 못했다.

문제는 과로사가 끊이지 않음에도 유족들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는 점이다. 문제만 있고 논의나 대책은 없는 탓이다. 한국에서 ‘과로’가 언급되기 시작한 건 1970년대다. <매일경제>는 1971년 일본의 장시간 노동을 지적했고, <동아일보>는 1973년 ‘최적근무시간 주 40시간 노동이 최대생산량 올려, 장시간 노동은 역효과’라고 보도했다.

45년이 지났다. 주 40시간 노동은 여전히 먼 나라 이야기다. 문재인 정부는 연 1800시간 노동을 국정과제로 제시했지만 OECD 발표에 따르면 2016년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2069시간이다. OECD 회원국 중 2위다. 그런데 이마저도 사업체 조사를 바탕으로 한 시간이다. 경제활동인구 조사를 바탕으로 할 경우 2241시간에 이른다는 주장도 있다. OECD 국가 평균 노동시간은 1763시간이다.

이유가 뭘까. 먼저 법의 사각지대가 너무 넓다. 근로기준법 제59조 근로시간 특례조항이 대표적이다. 이는 특례업종에 대해 무제한 노동을 허용한다. 특례업종에는 운수업, 물품 판매 및 보관업, 영화 제작 및 흥행업, 의료 및 위생사업 등이 포함된다. 과로사예방센터는 취업자의 48%를 특례업종 종사자로 추정한다.

특례업종이 아닌 이들이라고 전부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근로기준법은 1주 40시간, 연장근로는 1주 12시간까지만 허용한다. 하지만 5인 미만 사업장에는 이 기준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 역시 무제한 노동이 가능하다.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38% 수준이다.

과로사예방센터의 정병욱 변호사는 “지금 노동법은 과로사를 예방하기는커녕 과로사를 용인하고 있다”며 “노동법에서 주당 최대 노동시간을 52시간으로 제한하지만 산재보험법은 주당 평균 60시간을 과로로 정하고 있다. 법을 위반해야 과로가 인정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본의 과로사과로자살유족회 / 강민정 제공

과로가 뭐예요? 개념도 없다 나아가 한국은 40년 이상 과로 문제가 끊이지 않았지만 정작 정의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 변호사는 “주 60시간 이상 근무는 명백한 과로지만 60시간 미만의 경우는 당사자를 중심에 두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과로와 스트레스를 느끼는 상황이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실제 일본은 ▲노동시간은 물론이고 ▲노동강도 ▲직장 내 괴롭힘도 과로에 포함한다. 일본에서 과로사 연구를 해온 강민정 한국형사정책연구소 연구원은 “일본에는 ‘노르마’(할당량)라는 개념이 있다. 이 경우 장시간 근로는 안 하지만 할당량을 못 채우면 자살을 해버린다. 이 역시 과로사”라고 말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태움’ 문화 논란이 인 아산병원 간호사 역시 과로사다.

이렇다보니 가족은 물론이고 당사자조차 과로를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한국 사회는 ‘일 중독’에 관대하다. 강수돌 고려대 경영학부 교수는 지난해 11월 과로사예방센터 개소식에서 “일 중독은 다른 중독들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칭송된다”며 “하지만 일 중독도 삶의 진실이나 고통을 그대로 느끼지 못하게 한다”고 경고했다.

지난해 남편을 잃은 박은경씨(가명·53)도 비슷한 말을 했다. 박씨는 “일 열심히 하는구나.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다고만 생각했지. 과로사는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남편 장례식에 찾아온 이들은 한결같이 “성실한 분” “책임감 강한 분” “좋은 분”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 말에 박씨는 억장이 무너졌다.

과로사예방센터나 유족회를 찾아라 과로사예방센터에 따르면 매년 600여명이 과로로 인한 뇌심혈관계 질환으로 산재 인정을 받는다. 산재 승인율이 20% 수준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실제 과로로 사망하는 이들은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시간 노동이나 업무압박 등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과로자살은 포함되지 않은 수치다.

전문가들은 이제라도 문제제기를 넘어 해법을 논의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강 연구원은 “법의 사각지대부터 하나씩 해결해야 한다”며 “특히 입증책임 주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족이 과로사를 증명하는 게 아니라, 회사가 과로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유족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도 이 부분이다. 박씨는 “산재를 신청하려고 회사에 출퇴근 기록을 요구했는데 없다고 했다. 회사 CCTV는 백업을 하지 않아서 자료가 없다고 했다”며 “상황이 이렇다보니 어떤 게 증거가 될 수 있을지, 남편이 생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하는 거다”라고 힘 없이 말했다.

제도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제도 변화를 요구하며 당사자나 유족에 대한 지원이 병행돼야 하는 이유다. 지난해 만들어진 과로사예방센터와 유족회가 대표적이다. 유족회는 일본의 모델을 따왔다. 일본은 1991년 유족회가 만들어졌고 2014년에는 유족회를 중심으로 ‘과로사 방지법’이 제정됐다.

정 변호사는 “과로사예방센터에서는 무료로 전화상담(02-490-2352)을 하고, 필요하다면 노무사·변호사·의사를 연결해준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과로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며 “스스로 너무 힘들다거나 가족이 힘들어 한다면 미리미리 센터 등에 도움을 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하늬 기자 ha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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