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지엠 사태, '제3의 대안' 마련도 필요하다

송진식 기자 2018. 2. 24.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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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한국지엠 사태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GM 본사의 전략에 한국 정부는 어떤 카드를 내밀지 주목된다. 이번 사태는 기업 구조조정 문제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역량을 평가받는 첫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공’은 다시 문재인 정부로 넘어왔다. 한국지엠(GM)은 2월 23일 열린 이사회에서 2월 말로 만기도래하는 본사의 차입금 7000억원에 대한 회수를 정부의 실사가 끝날 때까지 미루고, 차입금 보전을 위해 요구했던 인천 부평공장(공시지가 1조200억원) 담보도 철회하기로 했다. 여기까지가 예상된 수순이다. 정부에 각종 지원을 요청한 마당에 제너럴모터스(GM) 본사가 먼저 자금회수에 나서는 건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일이다. 이사회를 통해 드러난 GM 측의 전략은 명확하다. 실사를 마친 후 문재인 정부가 내미는 ‘카드’를 보고 다음 단계로 가겠다는 것이다.

3월 말까지로 예정된 실사를 마치고 정부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에 따라 GM의 추가적인 대응도, 한국지엠의 운명도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대규모 기업 구조조정 문제가 발생한 건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 처음이다. 지난해 파산으로 끝난 한진해운 문제가 있었지만 모두 정부 출범 전의 일이었다. 한국지엠을 시작으로 대우조선해양, 대우건설, 금호타이어, STX 등 아직 미제로 남은 구조조정 과제가 산적해 있다. 이 때문에 한국지엠 사태는 기업 구조조정 문제에 대한 현 정부의 정책 방향을 확인하는 시금석이 되는 동시에 정부의 역량 역시 평가 받는 첫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내실 있는 실사가 가능할까 정부는 일단 한국지엠 실사를 통해 회사의 정확한 상태부터 파악해본 뒤 대응에 나서겠다는 계획이다. 실사를 통해 현 부실에 대한 원인과 책임소재가 명확히 가려져야지만 정부와 GM 간 대화가 진전될 수 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한국지엠 대응의 3대 원칙’이라며 가장 먼저 꼽은 게 ‘대주주(GM)의 책임있는 역할’이다. GM에 책임있는 역할을 요구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소재가 실사에서 나와야 한다는 얘기다.

문제는 실사에서 GM의 잘잘못을 가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GM이 실사단이 요구하는 자료를 있는 그대로 모두 내놓을지부터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산업은행의 경우 한국지엠 지분 17%를 가진 2대주주로, 2010년부터 3명의 사외이사를 선임해 경영에 참여해 왔다. 한국지엠을 부실관리해 왔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산은이지만 부실에 대한 조사를 아예 시도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한국지엠이 2014년부터 큰 폭의 적자를 내자 2016년 산은은 경영진단 컨설팅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한국지엠이 거부했다. 2017년 3월에는 주주감사권을 통해 한국지엠의 매출원가 자료 등 회계 및 재무자료 116건을 요구했지만 한국지엠이 보낸 건 고작 6건이었다.

당시 실사를 맡았던 삼일회계법인의 박대준 부대표는 지난해 국정감사에 출석해 “(주주감사를 위해) 한국지엠에 자료를 요청하면 80%가량은 제출 받지 못했고 그나마 제출한 자료도 시간이 많이 늦었다”고 토로한 바 있다.

겉으로 드러난 자료로는 한국지엠에 큰 문제가 있다고 보기도 어렵기 때문에 실사단이 강도 높게 GM 측을 압박하기도 쉽지 않다. 최흥식 금융감독원장은 20일 “한국지엠의 회계장부를 봤는데 회계부정 혐의를 찾기는 어렵다”며 “미국 GM 본사는 예전부터 세계 곳곳을 다녔고 아홉 수를 두는 회사”라고 밝혔다. 연간 6000억원이 넘는 연구개발비 지출, 높은 본사 차입금으로 인해 발생하는 연평균 1343억원에 달하는 이자비용 등 의혹이 수두룩하지만 서류상으로는 딱히 문제삼을 게 없다는 뜻이다.

한국지엠이 본사인 GM으로부터 수년간 누적 3조원에 달하는 차입금을 받아온 것도 금융당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꼼수’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한국지엠(당시 GM대우)은 2009년 금융감독원이 지정한 ‘주채무계열’ 기업으로 한 차례 지정된 바 있다. 주채무계열은 국내 금융권에 대한 부채가 일정 금액 이상 높은 기업들을 대상으로 선정한다. 선정된 기업은 채무비중에 따라 금융당국과 함께 재무개선 등에 나서야 한다. 한국지엠은 그러나 이듬해인 2010년 부채규모가 주채무계열 기준치를 밑돈다는 이유로 주채무계열에서 제외됐고, 이에 따라 재무개선 등의 계획도 없던 일이 됐다.

이후 한국지엠의 본사 차입금은 2011년 5073억원을 시작으로 급증하기 시작해 지난해 말 3조원을 넘어섰다. 이에 대해 한국지엠은 “국내 금융권에서는 조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본사에서 차입한 것”이라고 밝혔지만 의혹은 여전하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국내 금융권에서 돈을 차입했다면 저렇게 많이 빌리지도 못했겠지만, 이렇게 문제가 커지기 전에 금융당국의 관리를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배리 앵글(가운데) GM 해외사업부문 사장이 2월 20일 오전 국회에서 여야 원내지도부와의 면담에 앞서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장기화될수록 불리한 건 정부 GM은 정부와 산업은행 등에 차입금의 출자전환에 따른 추가 현금출자, 세제지원, 규제감면 등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모든 게 일단 실사 이후 논의되는 만큼 실사 결과는 정부와 GM은 물론 혈세를 내는 국민들도 납득할 정도로 객관적이어야 한다. 만약 이 기준에 미치지 못할 경우 실사 결과를 놓고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고, 한국지엠 사태는 장기화될 가능성이 있다.

사태가 장기화될수록 불리한 건 문재인 정부다. GM은 13일 군산공장 폐쇄를 발표하면서 이미 폐쇄에 들어가는 비용 지출과 이에 대한 실적 반영 계획도 모두 세워둔 상태다. GM은 미국에서 공시한 자료를 통해 “해고급여 3억7500만 달러(약 4000억원)를 비롯해 최대 8억5000만 달러(약 9175억원)의 손실이 발생할 예정”이라며 “2018년도 2분기 회계에 반영될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정부는 당장 5월 말까지 예정된 군산공장 폐쇄에 따른 지역경제 위축은 물론 대규모 실업과 이에 따른 여론 악화 등 온갖 난제와 부딪히게 된다. 취임하자마자 최우선 정책으로 일자리 확대를 올려놓고 상황판까지 만들어 매일 점검하는 문 대통령으로서는 적잖은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6월에는 정권교체 후 첫 전국단위 선거인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예정돼 있다. 지방선거 전까지 한국지엠 문제로 악화된 여론을 수습하지 못하면 선거에서 어떤 성적표를 받아들지 내다보기 어렵다. 공장 폐쇄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여야가 앞다퉈 군산을 찾고, 문 대통령이 “범정부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군산지역 경제 문제를 살펴달라”고 밝힌 배경이기도 하다. 자유한국당 등 야당은 벌써부터 “한국지엠 파산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며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결국 한국지엠 사태를 최대한 조기에 원만하게 수습하는 게 최선이다. 이 때문에 조기 사태 수습을 위해 ‘원칙적인 대응’보다는 상당 부분 ‘정치적인 결정’으로 한국지엠 문제가 결론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여권 내에서도 실사 이후 대응을 하자는 목소리와 실사와는 별도로 계속 물밑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혼재한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GM에 끌려다니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여권의 한 관계자는 “실사를 통하려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피해도 커진다”며 조속한 대응을 촉구했다.

김필수 대림대학교 자동차학과 교수는 “정부가 실사를 언급하면서 ‘빠른 실사’를 거론했는데 이미 모종의 지원을 전제로 실사에 나선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며 “GM에 끌려다니느라 정치적인 결정으로 지원에 나설 경우 구조조정 문제에서 타산업과의 형평성 문제나 특혜의혹 등 많은 부작용이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지엠 사태에서 정부가 난처한 것 중 하나는 이미 확정된 군산공장 폐쇄의 경우 되돌릴 방법이 현재로서는 없다는 것이다. 정부는 군산공장 폐쇄문제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지만 업계에선 GM이 폐쇄 결정을 번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한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과거 GM의 해외공장 폐쇄사례를 볼 때 시간이 좀 걸리면 걸렸지 결정을 되돌린 적은 없다”며 “이미 장부상으로 손실처리까지 하고 공시까지 했는데 되돌리는 건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지엠 사태를 수습해도 군산공장 폐쇄를 막지 못한다면 현 정부의 주요 지지기반인 노동세력의 이탈문제 역시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 정부는 원칙적인 대응을 언급하며 한국지엠 근로자들의 고통분담을 이미 기정사실화한 상태다.

반면 한국지엠 노조는 “공장 폐쇄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며 총력 대응에 나서는 등 노동계는 들끓고 있다. 노회찬 정의당 대표는 19일 “회사경영이 어려울수록 노사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상생방안을 논의하는 게 상식인데 GM은 일방적으로 군산공장 폐쇄를 선언했다”며 “자신들의 경영부실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떠넘기는 천박한 경영행태”라고 밝혔다.

‘제3의 대안’도 고려해야 이 때문에 실사 후 ‘원칙적인 대응’을 하는 것 이외에도 정부 별도로 제3의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과정에서 GM이 2009년 미국 정부에 파산보호 신청을 냈을 당시 미국 정부의 자동차산업 구제조치 과정을 참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여파로 GM과 크라이슬러, 포드 등 미국의 자동차 3사도 자금난에 시달렸고 결국 11월이 되자 미국 정부에 긴급구제금융을 요청한다. “정부가 지원하지 말아야 한다”는 여론도 상당했지만 당시 부시 미 대통령은 고용문제 등을 들어 지원을 결정했고, 신임 대통령으로 취임한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 즉시 부실기업 구조조정 전문가들로 구성된 TF를 꾸려 GM을 정밀 진단했다.

TF를 통해 GM이 제출한 자체 구조조정안을 검토한 오바마 대통령은 3월 30일 “계획안이 미흡하다. 파산도 고려하겠다”며 GM이 들고온 방안에 퇴짜를 놓았다. TF는 “현 경영진으로는 안 된다”며 최고경영자들을 사임시켰고, 정부 주도하에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눈에 띄는 점은 GM의 파산보호 과정에서 GM의 실질적인 소유주가 미국 정부였다는 점이다. 2009년 7월 파산보호절차에서 벗어난 직후 이른바 ‘뉴 GM’의 최대주주는 60.8%의 지분을 가진 미국 정부였다. 미국 정부는 이후 2010년 11월 주식 공모를 통해 보유주식을 일부 매각하는 등 2013년 12월에야 잔여지분을 모두 매각하며 GM에 대한 개입을 마무리한다. 당시 TF를 주도했던 스티븐 래트너는 훗날 “GM 등의 구제와 관련된 모든 결정은 오바마 대통령이 책임지고 직접 했다”며 “특히 오바마 대통령이 ‘GM을 파산시킬 수도 있다’고 경고한 직후 GM의 태도가 급변했다”고 회고했다.

오민규 비정규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은 “GM의 경우 파산보호 신청 이후 회생과정에서 사실상 공기업의 형태로 운영되며 관리됐다”면서 “한국지엠 문제 역시 반드시 GM 아래 있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벗어나 공기업 전환 등 다양한 정상화 방안을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산업연구원의 유진근 선임연구위원은 “최근까지 국내에서 진행된 해운업이나 조선업 등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컨트롤타워가 부재하다는 비판이 많이 제기됐다”며 “미 대통령이 최종 결정을 내렸던 GM 사례는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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