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내 인생 진로 바꾼 중학 동창생의 하이힐
━ 정영애의 이기적인 워라밸 패션(4) 나는 상업고등학교를 다녔다. 단지 예쁜 교복을 입고 싶어서였다. 당연히 부모님은 난리를 쳤다. 나는 홧김에 “졸업하고 바로 돈 벌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 말 그대로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삼성그룹 공채에 합격했다. 첫 근무지로 삼성생명 남동지점으로 발령받아 여사원으로 일하게 됐다.
화이트 블라우스에 잔잔한 체크조끼와 재킷, 그리고 타이트 H라인 스커트의 은행원 같은 제복을 입고 발이 편한 낮은 굽의 구두를 신은 나의 모습에 나름 만족하며 직장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퇴근길에 중학교 동창과 우연히 만났다. 중학생 때 별로 눈에 띄지도 않았던 그는 긴 생머리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하이힐을 신었는데 당시 유행했던 갈매기 눈썹에 ‘썰면 두 접시 입술’ 화장법까지 더해 못 알아볼 정도로 예뻐져 있었다.
“어머~ OO야~ 너 정말 예뻐졌다~” “응,그래? 호호호~ 나 여대생이잖아~”
━ 중학 동창 여대생의 하이힐이 던진 충격파 엄청난 충격이었다. ‘여대생이 되면 저렇게 예뻐질 수 있다니!'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하이힐을 신고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진 난 동공으로 한참 바라봤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패션 디자이너가 되었으니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다리가 길어 보이는 하이힐을 포기할 수 없었다. 패션 디자이너가 되면 1년에 2~4회 정도의 해외 출장을 간다. 온종일 유명한 백화점과 패션 거리를 걸어 다니기 때문에 하루에 최소 4만~5만보 정도 걷는다. 빠르게 1시간 걸어도 8000보 정도이니 하이힐을 신으면 반창고는 필수품이었다.
이런 하이힐을 신고 일본 출장을 갔을 때 횡단 보도를 건너다 맨홀 뚜껑의 구멍에 구두 굽이 껴, 그걸 빼내느라 진땀을 뺀 적이 있었다. 슬링 백 스타일의 구두를 신고 탄 출근길 지하철에서 사람들 인파에 휩쓸려 신발 한짝이 지하철과 플랫폼 사이에 떨어지는 바람에 맨발로 하이힐 한쪽만 손에 덜렁덜렁 들고 회사에 가기도 했다. 청키 힐이나 웨지 힐이 유행할 때는 그 신발로 걷다가 발목을 삐끗해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런데 최근 힐이 아닌 슬립온과 운동화 스타일의 스니커즈가 유행하면서 여성의 발이 아주 편해졌다. 이에 맞춰 옷도 내 몸을 구속하지 않는 오버사이즈 핏이 유행하고 있다.
여성의 구두 굽이 낮아진 현상은 ‘웰빙 붐’과 ‘주 5일제 근무제’, 그리고 ‘애슬레저’의 영향으로 건강과 활동성을 고려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낮은 굽은 여성의 노동 강도가 점점 세지고 연성인 일에서 운동량이 많은 경성인 일로 옮겨가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이런 현상을 반영해 최근 유럽에서는 굽을 그때그때 자신이 바꿔 신을 수 있는 구두가 나오기까지 했다.
구두의 굽은 여성의 심리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미혼인 경우 만나는 남자의 신장에 따라 어울리는 키로 맞추기 위해 굽 높이를 달리하기 한다. 그래서 여성은 옷만큼이나 신발도 신발장 밖으로 쌓일 정도로 많다. 신발이 왜 저렇게 많아야 하는지 남자는 이해 못 한다.
━ 스니커즈에 밀려나는 하이힐 나 역시 그랬듯이 하이힐 종류가 너무 많아 정확한 스타일 명칭을 모르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여자이지만 잘 몰랐던 구두의 종류를 일러스트로 정리해 보았다.
사람의 속성 중 하나가 한번 편한 것을 알면 불편한 것을 못 참는 건가 보다. 예전에는 어떻게 하이힐을 신고 출장까지 다녔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다. 요즘엔 대부분 슬립온이나 스니커즈 신발을 신는데, 모든 복장을 편안하면서 스타일리시하게 만들어주는 ‘잇템’이 되었다.
그렇다고 하이힐을 아예 신지 않는 건 아니다. 가끔 품평회 같은 행사가 있을 땐 하이힐을 신는다. 오랜만에 하이힐을 신은 나를 보며 남편이 예쁘다며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뾰족하게 모여 쩌릿해지는 발가락에 온 신경이 쏠리며 나는 생각한다. ‘자기가 직접 신어보면 저런 표정 안 나올 텐데….’
■용어설명
정영애 세정 올리비아로렌 캐주얼 디자인 실장 jya96540@seju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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