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부모 나라는 달라도 우린 한국인, 애국가 부르면 가슴이 찌릿

이에스더 2018. 2. 24.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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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겨울 올림픽 개막식 때 애국가를 부른 레인보우 합창단 사진=변선구 기자
‘너영 나~영 두리둥실 놀~고요. 낮에 낮에나 밤에 밤에나 상사랑이로구나’ 21일 오후 찾은 서울 중구 중림동 한국다문화센터. 센터 안에 위치한 음악 연습실에서 여리고 앳된 목소리로 부르는 제주 민요가 흘러나왔다. 이날은 매주 2번 있는 레인보우 합창단의 연습 날이었다. 아이들은 제주 방언이 섞인 노랫말을 율동과 함께 구성지게 소화했다.
레인보우 합창단은 한국다문화센터가 2009년 창단한 국내 최초의 다문화 어린이 합창단이다. 중국ㆍ러시아ㆍ일본ㆍ베트남ㆍ필리핀ㆍ네팔ㆍ나이지리아 등 20개국 출신 다문화가정 자녀 65명으로 구성돼 있다. 김성회(52) 한국다문화센터 대표는 “2008년 센터를 연 뒤 다문화 가정 자녀들의 학교생활을 들여다보니 결석을 밥 먹듯 하고, 집에서 게임만 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학교에선 문제아로 찍힌 아이들도 꽤 됐다. 아이들의 자존감을 끌어올리기 위해 뭐라도 해보자는 생각에 합창단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 등 기업 후원을 받아 단복을 맞추고, 성악 지도 선생님도 뽑았다.
[레인보우 합창단 제공]
합창단 아이들의 배경은 다양하다. 부모 가운데 한쪽이 외국 출신인 아이, 부모 모두 외국 국적인 아이, 부모 모두 한국인인 아이도 있다. 다양한 나라 출신 아이들이 어떻게 한국말 가사를 또렷하게 발음할까. 궁금증은 오래 가지 않았다. "11년이나 살았는데 당연히 우리말 쓰는 거 아닌가요?" 부모 모두 나이지리아 출신인 다니엘(11)은 "사람들이 영어로 말을 걸 때가 많은데 그럴 때 ‘한국말 하세요’라고 답해주면 깜짝 놀란다"며 웃었다.
평창 겨울 올림픽 개막식 때 애국가를 부른 레인보우 합창단. 사진=변선구 기자
이날 아이들은 제주민요 메들리ㆍ아름다운 나라ㆍ하쿠나마타타 등 다양한 노래를 연습했다. 아이들은 틈만 나면 왁자지껄 떠들다가도 반주가 흘러나오면 다른 사람처럼 진지한 눈빛을 빛냈다.

아이들은 매년 40여 차례 무대에 오른다. 큰 무대에도 자주 섰다. 2015년 광복 70주년 기념식 무대에 섰고, 2016년엔 ‘세계 평화의 날’을 맞아 미국 UN 본부에서 공연을 했다. 한국 천주교 230주년이었던 지난해엔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기념 미사에 앞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레인보우 합창단 제공]
합창단은 지난 9일 열린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애국가를 불러 세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아이들 특유의 고운 목소리로 엮어낸 애국가는 남ㆍ북 단일팀 선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울려 퍼져 더 큰 감동이 됐다. 합창단은 선수단 입장 때 청사초롱을 들고 각 팀 선수들을 안내하기도 했다.

무대가 익숙한 아이들에게도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 무대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아이들은 지난달 30일부터 개막식 당일까지 속초에 있는 콘도에서 합숙하며 리허설에 참여했다.

[레인보우 합창단 제공]
아빠가 캐나다 출신인 마틴(10)은 “엄마ㆍ아빠가 보고 싶어질 때도 있었지만, 친구들이랑 한 방에서 지내서 재미있었다”며 “개막식에 출연하는 어른들하고 똑같이 연습을 해내고, 웃는 표정 그대로 얼굴이 얼만큼 추웠지만 실수 없이 잘해내서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지민(10)이는 “일본에 계신 외할머니ㆍ외할아버지가 TV에 생중계된 제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전화하셨다고 했다”며 뿌듯해했다. 엄마가 러시아 출신인 박찬솔파벨(13ㆍ인천삼산중1)은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무대에 선 그 느낌은 잊지 못할 것 같다”며 “평소엔 합창단 동생ㆍ친구들과 장난을 많이 치는데 공연 복장인 한복을 입는 순간 나도 모르게 진지해졌다”고 말했다.

합창단에는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말이 서툰 아이도 있다. 러시아에서 온 알렉산드라, 필리핀에서 온 애런 등은 올림픽 개막식 무대에 서기 전 애국가 가사를 연습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장미아(48) 합창단장은 “출신국 언어 발음기호로 적어준 뒤 외우게 했는데, ‘동해 물과 백두산이’ 부분을 ‘동해 물과 액두산이’로 발음해 연습 도중에 애를 먹었다”고 설명했다.
애국가 가사를 러시아어 발음으로 표기했다. [레인보우 합창단 제공]
장 단장은 합숙 도중 숙소 근처인 속초 중앙시장에 놀러 갔을 때의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피부색도 머리색도 다양한 애들이 단체로 지나가니까 상인 한 분이 “너희는 어디서 왔니?”라고 영어로 물었어요. 단원 중 누군가가 “저희 서울에서 왔어요. 올림픽 개막식에서 애국가 부르려고요.‘했어요. 그 분이 “애국가를 부를 줄 알아?”라고 신기해하자 아이들이 한둘이 그 자리에서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즉흥 합창 공연을 하게 됐죠. 상인들이랑 지나던 분들이 모여 구경하고 손뼉을 쳐줬어요.”

아이들에게 애국가는 어떤 의미일까. 이라크 출신인 자이드(12ㆍ서빙고초 6)의 가족은 전쟁을 피해 11년 전 한국에 이민을 왔다. 자이드는 “한국은 제가 가장 사랑하는 나라이자 오래도록 살고 싶은 나라”라고 말했다. "애국가를 부를 때면 심장이 찌릿찌릿해져요."

처음 들어올 때 자신감 없는 모습을 보이던 아이도 합창단에서 보낸 시간이 쌓일수록 달라졌다. 장 단장은 “입단할 때만 해도 장래 희망을 물으면 ’없다‘고 말하던 아이가 노래를 부르면서 점점 변해간다. 따돌림을 당해 '한국에 살기 싫다'고 말하던 아이 얼굴에 생기가 돌아오는걸 보면 보람을 느낀다”고 전했다.

최근 패션계에서 ‘대세’로 떠오른 패션 모델한현민(17)과 배유진(15)도 레인보우 합창단을 거쳤다. 배유진 양은 모델로 활동하면서도 합창단 동생들을 만나기 위해 연습 때마다 함께하고 있다. 그는 “8년여를 합창단에서 보내 아이들이 모두 가족같다”며 “합창단에서 얻은 자신감은 모델로서 당당하게 활동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장 단장은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한 유진이한테 ‘너 몇살까지 합창단 나올 거니’ 물었더니 ‘시집가서도 나올건데요’ 하더라”며 웃었다.

긍정적으로 바뀌는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들의 만족감도 크다. 중국 출신인 최춘선(45)씨는 “다문화 가정 자녀라는 이유로 학교생활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을 했는데 합창단 활동하면서 활달해진 덕분인지 정말 잘 지낸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우리 단원들도 그렇고, 다문화 가정 자녀들은 한국어와 부모의 모국어까지 2개 국어는 기본으로 한다”며 “한국과 다른 나라를 잇는 인재가 될만한 조건을 가졌다”고 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만 북돋워 주면 나라에 큰 보물이 될 소중한 우리 아이들입니다." 이에스더 기자 etoi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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