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무너진 이상향의 파편에서 찾는 희망

김향미 기자 2018. 2. 23.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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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아르카디아
ㆍ로런 그로프 지음·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452쪽 | 1만4800원

아르카디아는 고대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한 지명이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목가적 낙원’을 뜻한다. 서양 문화권에서 아르카디아는 대자연의 풍요로움이 가득한 유토피아로 제시돼 왔다. <운명과 분노>(문학동네)로 유명한 작가 로런 그로프(40·사진)는 2012년 발표작 <아르카디아>에서 1970년대 미국 뉴욕주에 가상의 공동체 아르카디아를 건설한다. “평등, 사랑, 노동, 모든 이의 필요에 대해 열린 마음”을 토대로 한 공동체다.

소설의 주인공인 ‘비트’는 아르카디아에서 태어난 최초의 아이다. 이름은 “아르카디아의 가장 작은 조각(bit)”이란 뜻이다. 소설은 어린 비트의 시선으로 아르카디아의 세계를 묘사한다. 사유재산은 가질 수 없으며, 모두가 함께 일하고 모든 걸 공유한다. 어린이와 임신부, 환자 등은 공동체의 보호와 돌봄을 받는다. 공동체 안에선 때때로 음악이 흘러나오고 대마초를 피우고 사랑을 나눌 대상도 자유롭게 선택한다.

무엇보다 아르카디아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있다. 비트의 아버지인 에이브는 말한다. “순수한 것. 대지 위에서의 삶이 아니라 대지와 더불어 사는 삶. 상업주의라는 악마에게서 벗어나 우리 손으로 일구어나가는 삶. 우리의 사랑이 세상을 밝히는 횃불이 되게 하는 것”이 아르카디아 건설의 목표였다고.

그러나 아르카디아는 영원할 수 없었다. 공동체의 규모는 갈수록 커지는데, 실제 그들은 가난했다. 비트가 사랑한 여인 헬레는 “(아르카디아에서) 따뜻한 적이 없었고 배불리 먹은 적도 없었고 제대로 옷을 입은 적도 없었다”고 기억한다. 아르카디아의 대표자였던 헨디라는 인물은 멋진 구호를 외치고 사람들에게 노래를 불러주었으나, 일하지는 않았다. 아르카디아는 내부 갈등과 경제적 빈곤으로 쇠락했고 결국 해체됐다.

극의 후반부에선 성인이 된 비트의 삶이 그려진다. 그는 뉴욕에서 사진작가로 일하며 딸과 함께 지내고 있다. 비트의 삶엔 아르카디아의 흔적이 남아 있다. 대학에서 사진을 가르치는 비트는 주말마다 학생들에게 필름 사진을 찍는 과제를 내준다. “디지털이 훨씬 쉽지만” 그는 사진을 찍고 필름을 들여다보는 과정이 “학생들이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이 주의를 기울이고, 더디게 살며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제대로 숙고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비트는 생각한다.

하지만 비트는 아르카디아의 재건을 꿈꾸지 않는다. 그는 “아르카디아 사람들의 실험이 모두 아름다웠던 건 그곳이 시골이어서가 아니”라 “서로와의 연결. 모두가 모두에게 의지했던 그 친밀함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비트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같은 공기를 호흡하고 있는” “이곳, 여기, 지금이 유토피아보다 더 유토피아”라고 말한다.

프랑스 화가 니콜라 푸생의 ‘아르카디아의 목자들’(1637~1638). 루브르박물관 소장

그런데 아이로니컬하게도 소설의 끝부분은 발표 시점에선 미래인 2018년이고, 세계 곳곳에선 지구온난화로 인한 각종 자연재해와 전염병이 나돈다. 달리 말하면 디스토피아의 모습이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두 가지 관점 모두 현재가 어떤 미래로 향하고 있는지 깊이 우려하며 엄청난 불안을 표현하고 있다”는 게 작가의 생각이다.

2008년 장편 <템플턴의 괴물들>을 발표하며 데뷔한 그로프는 2015년 세 번째 장편 <운명과 분노>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국내에서도 이 작품으로 이름을 알렸다. 두 번째 장편인 <아르카디아>는 미국 문학계에서 작가의 입지를 다진 작품이다. 그로프의 작품에는 ‘시적이고 우아한 문체’ ‘폭발적 서사’란 찬사가 따라다닌다. <아르카디아>에서도 “어느 아침, 시간이 그에게 온다. 슬며시”라는 문장처럼 시적인 묘사가, 유토피아에서 시작해 디스토피아로 끝나는 농밀한 서사가 발견된다.

그로프는 이 소설을 쓸 무렵 임신 중이었고 불확실한 세상에서 아이를 낳아야 하는가라는 두려움으로 인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는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던 사람들의 글을 접하고 기운을 차렸다. 그로프는 한 인터뷰에서 “아이를 키우며 불행한 운명을 두려워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희망을 찾으려는 자신과의 논쟁”이라고 말했다. 소설을 우리말로 옮긴 박찬원 번역가는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노력했던 사람들이 꼭 행복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들은 행복해지려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라고 했다.

미래란 알지 못하는 세계다. 비트는 아르카디아의 바깥세상은 보지 못하고 자랐다. 그가 미지의 세계인 아르카디아 밖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준비한 것은 지식과 언어 습득이었다. 그리고 비트에게는 한 가지 깊은 믿음이 있었다. “사람들은 기회가 주어질 경우 선하며 선하기를 원한다”는 믿음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맞설 힘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김향미 기자 sokh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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