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등대로 본 해양문명사](1)2300년 전 30층 높이..그리스와 동방의 불가사의한 합작품
[경향신문] ㆍ파로스 등대 신화의 탄생
사람들은 등대에 왠지 모를 아련한 ‘유토피아적 환상’을 갖고 있다. 그 머나먼 등대를 찾아가면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To the Lighthouse)>가 말해주듯 등대로 가는 길은 심연의 공간으로 떠나는 길이다. 등대는 인류 문명의 시작과 번성, 멸망과 함께해왔다. 등대에는 유구한 해양문명의 DNA가 각인되어 있다. 세계의 문화유산으로서 현재에도 꿋꿋이 자리하고, 또는 그 자리에서 흔적으로 역사를 증언하는 세계의 등대들을 찾았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동아시아 끝자락까지 세계 등대유산을 탐사하는 여행의 닻을 올린다. 해양문명사의 융숭하고 아름다우며 때론 잔인하기까지 한 이야기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이븐바투타가 마지막으로 본 파로스 등대
1304년, 모로코 탕헤르에서 태어난 영민한 이슬람 사족 이븐바투타. 21세 되던 1325년에 홀로 성지순례와 이슬람 동방세계 탐험을 결심하고 대장정에 나선다. 30년간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3대륙을 여행했으며,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도 방문하여 기록을 남겼다.
큰 항구가 존재했으며 인도의 퀼론항, 캘리컷항(현 코지코드), 터키의 제노세항 그리고 중국의 취안저우(泉州)항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에서 이렇게 큰 항구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븐바투타는 항구 쪽의 파로스 등대(일명 알렉산드리아 등대)도 찾아갔는데, 그때는 이미 등대 한쪽 벽이 무너진 상태였다. 파로스 등대는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섬에 기원전 280~기원전 247년 세워졌다. 당연히 알렉산드리아 항구로 오가는 배를 안내하기 위해서였다.
이븐바투타가 찾아갔을 때 등대는 하늘 높이 솟은 방형 건물로, 문이 지상에 나 있었다. 문 앞에는 문 높이의 건물 한 채가 있었는데, 그 사이에 나무판을 가로질러놓아 문으로 통하게 했다. 나무판만 치우면 속수무책이었다. 문안에는 등대지기가 앉을 자리가 하나 있고, 등대 내부에는 방이 꽤 많았다. 등대 내 통로의 너비는 9쉬브르(약 2m), 벽 두께는 10쉬브르(약 2.2m), 등대 네 변의 너비는 각각 140쉬브르(약 3.15m)에 달했다. 등대는 삼면이 바다로 에워싸인 길쭉한 육지에 세워져 있고, 바다는 성벽에 잇닿아 있었다.
이븐바투타는 1349년 마그립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등대에 다시 들렀다. 등대는 이미 지진으로 폐허가 되어 들어갈 수도 문까지 오를 수도 없었다. 나시르 왕이 맞은편에 같은 모양의 등대를 세우려고 공사를 시작했으나, 그의 죽음으로 완공은 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로부터 약 670년이 흐른 지난해 가을, 나 역시 이 전설의 등대를 찾아서 해변을 걷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항구의 동쪽 돌출부에는 세계 최초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자리했고, 거기서 서쪽으로 걸어서 한 시간 거리에는 알렉산드리아 등대가 있던 곶이 있다. 지금은 아랍 중세의 카이트바이 성이 자리한 곳, 바로 등대가 있던 자리다. 이븐바투타가 본 무너진 등대 자리에 성곽이 들어선 것이다.
북아프리카 지중해의 거친 파도가 성곽 아래 바위로 들이친다. 파로스 등대에 썼던 석재들이다. 지금은 해안선이 변했지만, 과거에는 파로스섬이라는 작은 등대섬이 육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지진으로 클레오파트라 궁전 등 많은 건물이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등대 역시 지진으로 속절없이 무너졌다. 현대 고고학의 발달로 수중고고탐사대가 무너져 내린 바다 밑 궁전과 알렉산드리아 등대의 흔적을 다수 발굴했다. 국립알렉산드리아박물관의 로마풍 컬렉션은 이들 유적이 기원전 332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메가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결과물임을 알려준다.
■ 알렉산드리아 메가 프로젝트의 랜드마크 등대
인류의 어느 문명이나 그 기원이 있으며, 문명사적 상징이 있다. 기원과 상징은 장기 지속적이며 인류 문명의 내재적 울림으로 전해져온다. 등대의 기원과 상징은 두말할 것 없이 초기 인류가 지폈을 불빛 그 자체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른바 ‘문명’이라는 명칭을 붙일 때는 건축적으로 압도적이고 상징적인 그 무엇이 있는 것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그러한 조건에 부합하는 것으로 등대 문명사에서 고대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서 있던 파로스 등대를 능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파로스는 신화 그 자체가 됐다. 우리가 흔히 쓰는 라이트하우스는 영미식 표현일 뿐, 유럽 곳곳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파로(Faro)’라는 명칭의 고대 발음을 그대로 쓰고 있다.
고대의 비밀은 언제나 고대 자체가 지닌 신비성 때문에 증폭되기 마련이다. 파로스 등대가 단순히 고대라는 시대적 요건 때문에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만은 아니다. 등대의 높이는 120~140m로 추정되는데, 이른바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하는 등대가 된 것도 파로스의 깊고 장중한 비밀 덕분이다. 기원전에 오늘날 30층 빌딩 높이의 거대 건축물을 세웠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불가사의다.
알렉산드리아는 바다와 마레오티스 호수 사이의 대지를 기반으로 발전했다. 도시는 그리스인이 토착민의 세계와 접촉하는 장소이자, 그리스인과 ‘야만인’ 사이의 문화가 서로 동화돼가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알렉산드리아는 새로운 도시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건축가 데이노크라테스의 격자형 구획에 입각하여 카노픽로처럼 동서를 가로지르는 대로, 궁전, 도서관이 딸린 박물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묘가 있는 소마 등의 거대 건축물이 축조됐다. 도시의 명성을 더욱 드높인 것은 기원전 280년에 크니도스 출신의 소스트라투스가 파로스섬에 세운 등대였다. 알렉산드리아가 이후 지중해 해상교역에서 차지하게 되는 중요한 위상을 상징했다.
마레오티스 호수의 하항(河港)이 수로를 통해 나일강과 홍해로 이어짐으로써 지중해 지역과 근동 국가 간의 교역이 가능해졌다. 알렉산드리아와 근동 연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역의 교차로인 파로스섬은 상업 활동의 핵심이 됐다. 이러한 모든 건축물은 그리스인이 기존에 갖고 있던 지식과 동방 국가의 역량이 융합되면서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 수중 발굴로 밝혀진 파로스 등대의 비밀
1994년 알렉산드리아 인근의 작은 어촌 아부키르 해안에서 6㎞ 떨어진 수중에서 프랑스의 고고학자 장 이브 앙페뢰가 이끄는 고고학 발굴팀이 등대 유적을 발견했다. 무너진 잔해 수백점을 끌어올렸으며, 이로써 천년의 비밀이 서서히 풀렸다. 발굴팀은 높이 4.5m, 무게 12t의 파로스 등대 꼭대기에 놓인 화강암 이시스 여신상을 기중기로 인양했다. 이는 1921년 영국인 하워드 카터가 룩소르 왕가의 계곡에서 발견한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 발굴과 맞먹는다. 발굴팀은 바닷속에서 저택과 정원, 항만 그리고 거대 조각상을 그대로 간직한 고대 도시 헤라클레이온과 메노우티프를 찾아냄으로써 신화 속의 파로스 등대를 현현시켰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얼굴에 사자 몸통이 결합된 모양의 스핑크스도 여왕궁전과 전용 부두가 있던 안티로도스섬에서 인양했다. 당시 침몰된 선박도 함께 인양했다. 2000년 전 고대 알렉산드리아 항구와 파로스섬, 안티로도스섬 등이 지진과 조류에 의해 고스란히 가라앉았다는 뜻이다. 전차가 달리던 도로는 지금도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말끔했다고 고고학자들은 전한다.
프랑스 발굴팀의 견해에 따르면, 파로스 등대가 전적으로 그리스 양식은 아니며 이집트 건축 양식도 도입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에 많은 신전을 건설했으며, 파로스 등대는 대리석뿐 아니라 이집트 아스완에서 화강석을 운반하여 시공할 만큼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스인의 석조 기술뿐 아니라 이집트인의 기술이 다수 포함됐다는 증거다. 이집트 문화유산 당국은 파로스 등대의 재건을 시도 중이다. 유럽연합의 지원을 받아 파로스 등대에 사용된 석재의 출처를 조사하는 등 등대 재건을 위한 자료 수집에 나서고 있다.
■ 세계 최고의 등대는 에게해에
세계 등대사에 익히 알려진, 알렉산드리아 파로스 등대의 ‘첫 번째 등대’로서의 권위는 사실 인류의 해양문명사 연대를 너무 낮게 잡은 결과이기도 하다. 프톨레마이오스 시대보다 훨씬 오래된 기원전 660년경의 등대 흔적이 트로이 문명권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 등대는 오늘날 유럽과 아시아 대륙이 만나는 다르다넬스 해협에 접한 차나칼레의 로마 이름으로 툼(Sigeum)이라 부르던 곳에 있었다. 툼은 해양도시국가 트로이의 북서쪽으로 아킬레우스의 무덤이 있던 곳으로 비정된다. 그리스 시인 레스케스는 기원전 660년 툼에 트로이로 안내하는 툼 기둥(Sigeum Pillar)이라 부르는 등대가 있었다고 기록했다.
시인의 기록은 알려지지 않다가 1721년 로마에서 비석 쪼가리가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원추형 꼭대기가 있는 기둥을 묘사했는데, ‘파레(phare)’라는 표현을 써서 등대를 나타냈다. 아킬레우스의 무덤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타는 화염으로 장엄했을 것이니, 불타는 등대가 그 근거리에 위치했음은 신화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러나 신화는 역시 신화성이 강한 만큼 사실적, 물질적 증거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무한 상상력과 현실감을 부여하는 인류 문명사 초기의 또 다른 등대가 기원전 그리스 로도스섬에서 확인된다. 로도스는 이미 기원전 16세기에 미노스 문명이 시작된 섬이다. 로도스도시국가연합은 그들의 단일성을 자축하기 위해 기념물이 필요했다. 항구 입구에 높이 15m의 대리석 기단을 만들어 로도스의 거상(Colossus)이라 부르는 거대 청동상을 세운 것이다. 기원전 284년의 일이다.
괴상망측할 정도로 거대한 조형물로 세웠기에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반열에 올라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 청동상은 기단을 포함해 50여m 높이에 달한다. 양쪽 다리를 벌리고 한 손에 불을 들고 버티고 서 있는데, 아래로 배가 지나갈 정도의 이런 규모는 사실상 축조가 불가능하다. 중세 이래로 고대적 신화가 증폭되면서 상상력을 극대화한 방향으로 그려졌을 것이다.
기원전 224년 지진으로 무너져 내렸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무너진 청동상의 밑뿌리는 654년 아랍인이 로도스를 침범하여 조각조각을 유대인에게 팔아넘기기까지 그 나름대로 오래 존속했다. 역대 많은 화가가 로도스 청동상의 상상도를 그려냈으며, 오늘날에는 이 조각을 복원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도 하고 있다.
로도스의 청동상이나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나 모두 등대의 고대적 실체와 진실을 말해준다. 인류 문명사 여명기에 불을 밝혀 항로의 안전을 도모하고 항구의 번성을 기원했던 인류의 소망은 2000년이 넘는 세월을 뛰어넘어 장기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중이다. 좀 더 분명한 역사유산 실체로 존재하는 등대는 역시 로마제국 시대에 이르러야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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