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일본의 역사교과서

배훈 일본변호사 재일코리안 2세 2018. 2. 23.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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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서울 올림픽이 열린 1988년 나는 연세대학교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었다. 당시 TV를 통해 올림픽 개막식을 지켜보던 내 어머니를 비롯한 많은 재일코리안 1세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나 역시 개막식 중계를 보다가 왈칵 눈물을 쏟았고, 이런 내 모습에 놀라기도 했다.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은 일본 오사카의 집에서 보았는데, 고국의 두 번째 올림픽이어서인지 감격이라고 할 만한 감정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세월은 참 많은 것을 바꾸었다.

30년 전 내가 하숙하던 신촌에는 학생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시위가 시작되면 상점 주인들은 일제히 셔터를 내렸고, 학생과 경찰의 충돌이 끝나기를 숨죽여 기다렸다. 나 역시 집 밖으로 나섰다가 최루탄 세례를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 무렵 일본인 친구들이 놀러 오면 남산타워에 올랐다. 하지만 서울의 밤은 불빛이 없다시피 했다. 지금 서울과 부산의 야경은 도쿄나 오사카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

내가 공부하던 어학당에는 반마다 10명 정도가 있었다. 이 가운데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18세 일본인 여학생이 있었다. 평범하게 학업을 마쳤지만 한국병합을 배운 적이 없었다. 구체적인 식민지 역사를 연세대 학생에게 처음으로 들었다. 그는 “왜 역사를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냐”며 놀라움과 분노를 나타냈다. 내가 일본에서 온 친구들을 안내해 서울 시내 궁궐들을 돌아볼 때였다. 건물에 붙은 안내문에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에 소실됐다’고 적혀 있었다. 이를 읽던 일본인 중년 여성 관광객들은 “어휴, 뭐 하러 이런 쓸데없는 일들을…”이라고 곤혹스러운 듯 말했다. 대부분의 일본인은 일본이 저지른 일을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한국이나 중국에 좋지 않은 일을 했다고 막연히 생각하는 정도다.

일본 공영방송 NHK의 아침드라마는 인기 프로그램이다. 1961년 시작해 내년 100번째 시리즈가 나온다. 소재는 역사가 많다. 전쟁 당시의 배고픔과 죽음, 폭격과 피란 같은 신산한 풍경이 자주 등장한다. NHK는 수준 높은 다큐멘터리도 자주 내보낸다. 히로시마 원자폭탄 피해, 일본군의 무모한 작전에 의한 국민의 사망, 전염병의 확산과 죽음 등을 다뤘다. 하지만 일본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서 한국과 중국, 아시아에 저지른 일을 다룬 것을 본 기억이 없다.

일본 패전 이후 70년이 지나면서 전쟁을 체험한 사람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근현대사나 전쟁을 모르는 젊은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일본의 기성세대들이 많다. 과거 고등학교에서 세계사는 필수, 일본사는 선택과목이어서 현대사를 배울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일본사와 세계사를 통합한 근현대사 중심의 ‘통합역사’를 2022년부터 필수과목으로 한다고 2015년 문부과학성이 발표했다. 이를 받아 이듬해 일본학술회의가 ‘통합역사에 바란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의 대한민국학술원 격인 이 단체는 “15~16세기 이후 근현대사 중심으로 배워야 한다”면서 “여기에는 일본이 펼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대한 침략전쟁과 식민지 정책은 물론, 이렇게 일본이 침략하고 식민지로 만든 지역의 역사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예로 조선의 식민지화, 식민지의 독립운동, 조선의 독립을 꼽았다.

일본에는 여전히 역사수정주의자들이 있다. 자학사관이라는 이유로 근현대사를 가르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도 적잖다. 아버지와 형제들이 관여한 일에 눈감고 싶은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이런 안팎의 저항을 극복한 것이 근현대사 필수과목 지정이다. 일본의 고등학교 진학률은 96% 이상이니 앞으로 대부분의 젊은이가 이를 배우게 된다. 이에 맞춰 한국도 일본 시민들이 입은 전쟁 피해와 전후에 벌인 평화운동을 가르쳤으면 한다. 이렇게 수십 년이 흐르다 보면 아시아의 역사문제도 고비를 넘길 것이다.

<배훈 일본변호사 재일코리안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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