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방콕·로마·파리..나그네를 껴안는 포근한 품, 매혹의 술집이여!

정미환 | 오디너리 매거진 부편집장 2018. 2. 23.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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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어디로 여행을 떠나든 거기에서 들러야 할 술집들의 목록을 예습하곤 한다. 술과 계획처럼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도 없겠지만, 머물 수 있는 밤의 횟수가 한정되어 있으니 내 욕심에 순위를 매기는 수밖에 없다. 마지막까지 목록에 남아 있는 이름들은 대체로 이렇게 나뉜다. 새로운 칵테일로 유명하거나 다양한 술을 갖춘 곳, 도시의 시간과 함께해온 유서 깊은 술집 그리고 호텔이나 마천루의 꼭대기에 위치한 전망 좋은 바. ‘전망 좋은 바’의 경우 실패할 확률도 높다. 창 밖의 근사한 풍경에 의존한 나머지 서비스나 술의 퀄리티가 형편없는 경우도 있고, 나처럼 소문을 듣고 찾아온 관광객들로만 붐비는 곳들도 많았다. 그러나 가끔은 기억에 남는 곳을 만나기도 했다. 기분 좋게 들뜬 채 도시의 가장 화려한 얼굴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들 말이다.

태국 방콕 르부아 앳 스테이트 타워 64층에 있는 시로코는 방콕에서 가장 바람이 거센 곳으로 꼽힌다.

방콕은 범속한 안락을 허락하지 않는 도시다. 절기에 따라 바람의 방향이 달라질 뿐 이곳은 1년 내내 뜨거운 계절풍에 휘감겨 있다. 몬순의 축축한 숨결 아래, 시장의 노점들과 싸구려 숙소들이 온갖 색채와 냄새로 뒷골목을 덮는다. 저녁이 찾아오면 그 풍경이 또 다른 비등점을 향해 치닫는다. 사원의 첨탑부터 마천루의 실내등까지, 도시를 가득 뒤덮은 성운. 그 찬란한 자기과시의 정점에 시로코(Sirocco)가 있었다. 르부아 앳 스테이트 타워의 64층, 시로코는 허공 한가운데에서 스윙 선율로 흥청인다. 어디로 발길을 돌리든 압도적인 풍광이 기다리는 이곳에서 가장 아찔한 공간은 옥상 한쪽 끝에 매달린 스탠딩 바였다. 오후 6시30분, 바텐더의 어깨 너머로 도시의 가장 매혹적인 한때가 펼쳐진다. 차오 프라야강과 고가도로의 곡선이 어지러운 빛무리로 얽히고, 일몰을 끝낸 하늘이 그 위로 짙푸르게 가라앉는다. 야시장의 흥정과 삼륜차의 배기음은 여전히 거리 가득 붐비고 있겠지만, 지상의 어떤 소리도 시로코의 고도까지 미치지는 못한다. 거기에 감도는 것은 음악과 웃음소리,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가 전부다. 지상 200m의 공중에 그대로 노출된 시로코는 방콕에서 가장 높은 풍속을 기록하는 지점들 중 하나다.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술잔을 입가로 기울이자, 땀으로 젖었던 셔츠 옷깃이 어느새 말라 있었다.

로마에서 봤던 풍경은 또 달랐다. 제국은 스러졌으나 도시는 남았다. 시효를 다한 권력에 난폭한 과시욕은 없다. 광장, 분수, 긴 세월을 버텨온 건물들. 청동과 대리석으로 이뤄진 로마의 골격 위로 영광의 흔적은 그저 고요하게 고여 있다. 서쪽 하늘로 해가 지면 오래된 처마들 사이에서 가로등 불빛이 숨겨진 사금처럼 새어 나온다. 그 순간을 목격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가 브리스톨 베르니니 호텔의 루프톱 바, 올림포(L’Olimpo)였다. 1874년 지어진 저택을 개조한 이곳은 다양한 권력자와 부호들이 머물곤 했던 호텔이다. 건물 높이는 6층에 불과하지만, 최고의 척도란 상대적인 법이다. 고만고만한 키의 건물들이 도열한 로마 구시가지에서 올림포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대등한 위치에서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바다. 테라코타 기와들이 갈색 평원처럼 펼쳐진 가운데 황금빛으로 물든 돔과 판테온의 견고한 지붕이 환한 방점으로 솟아 있다. 어둠이 완전히 내린 오후 8시, 올림포에서의 늦은 저녁 식사는 로마에서 시도할 수 있는 가장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경험 중 하나였다. 나폴리 요리와 질 좋은 이탈리아 와인을 눈앞에 둔 채 글라스를 살짝 흔든다. 표면에 묻어 있던 와인이 천천히 흘러내리고, 고도(古都)의 불빛은 그 궤적을 따라 잔 안에 둥그렇게 고인다.

정미환 | 오디너리 매거진 부편집장

한편 보는 각도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질 수도 있다. 건물 지붕에 올라선 술집 ‘루프톱 바’를 성립시키는 그 명제는 레 좀브르(Les Ombres)에서도 그대로 통용된다. 다만 이곳의 볼거리는 정강이 아래가 아닌 정수리 위에 펼쳐져 있다. 파리 브랑리 미술관 옥상에 위치한 레 좀브르에서는 도시의 상징인 에펠탑이 올려다보인다. 레 좀브르는 프랑스어로 그림자를 뜻하는데, 그 이름의 근거를 헤아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곳의 지붕은 유리로 되어 있고, 볕이 좋은 날이면 에펠탑의 그림자가 어김없이 실내를 덮기 때문이다. 탑의 잿빛 실루엣은 새하얀 접시와 부드러운 소파, 나무 바닥을 무수한 기하학적 도형들로 구획한다. 그러나 어둠이 그림자를 삼키는 밤이면 상황이 역전된다. 에펠탑에는 조명이 점등되고, 레 좀브르 역시 그림자 대신 그 빛을 품고 붐빈다. 주말의 파리, 오후 9시30분. 1시간쯤 후면 웨이터가 마지막 손님을 내보내겠지만, 몇 시간 동안 길게 이어지는 프랑스식 저녁 식사는 아직도 곳곳의 테이블에서 진행 중이다. 남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 영감을 얻어 근사하게 완성된 요리들이 차례로 운반되고, 웃음소리와 한숨소리, 농담과 험담, 몇 잔의 와인이 그 위를 맴돈다. 파리의 전형적인 밤, 그 풍경을 허공의 철탑이 굽어본다.

<정미환 | 오디너리 매거진 부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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