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리포트] 누가 누가 거짓말했나?..'펜스-김여정 회담 불발' 시계 돌려보니

손석민 기자 입력 2018. 2. 23. 08:06 수정 2018. 2. 23.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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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스 부통령과 김여정 부부장의 비밀 회담이 불발됐다. 회담 제안부터 결렬까지 스파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전격적이면서 반전의 연속이었다. 미북 관계가 최악의 지점에 놓인 이 시점에서 실낱 같은 회담으로 가는 길, 그 과정을 복기(復碁)해보는 것은 외교라는 것의 속성, 나아가 한국을 포함한 세 당사국이 어떤 속내를 가지고 있는지 간파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특히 누가 누가 거짓말을 했는지 가려보는 일은 대화든 긴장이든 다음 국면 진행 시 판단에 유용한 근거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거짓말도 해본 사람이 하는 법이니까.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미북간 고위급 회담이 결정된 것은 미국 시간으로 지난 2일이었다. 1월 말 중앙정보국(CIA)이 ‘북한이 올림픽 대표 단장으로 방한하는 펜스 부통령과 만나고 싶어한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2일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접촉을 승인했다. 당시는 북한의 대표단으로 누가 올지는 결정되지 않았다. 북한은 4일 밤(이하 시제는 모두 한국 시간),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대표로 온다는 통보를 했다. 단원 3명이 동행한다고 했지만 누구인지는 특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7일 오후, 북한은 '실세 여동생' 김여정 부부장이 대표단에 포함됐다는 사실을 우리 측에 전한다.
 
한미 관계를 감안할 때 미국이 북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우리 정부가 북측에 전달한 뒤 북측이 북미 접촉을 감안해 대표단 구성원을 통보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인 추론일 것이다. 그 사이 미국과 한국 정부 내 언급은 어땠을까? 지난 4일 청와대 안팎에서는 펜스 부통령이 올림픽 기간 북한 측 인사와 마주치지 않도록 의전에 신경 써 달라고 우리 정부에 당부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청와대 관계자는 아예 “현 단계에서 북미간 접촉이나 대화 가능성을 거론하기 힘들다”는 말을 했다. 지금 보면 새하얀(새빨간이라는 말까지는 않겠다) 거짓말이지만 이해할 수 있다. 비밀 접촉을 앞두고 양측이 눈 딱 감고 언론에 거짓 정보를 흘리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당사자인 펜스 부통령은 어땠을까? 6일 출국 직전 알래스카에서 언론과 만난 펜스는 “트럼프 대통령이 항상 대화를 믿는다고 밝혀왔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하지만 저는 북한과 어떠한 면담도 요청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자”고 했다. 자기 입장에선 100% 진실을 이야기한 셈이다. 미국이 아니라 북한이 면담을 제안했고, 그 당시에는 회담 장소와 시간 등 구체적인 일정은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니 말이다.
 
하루 뒤 7일 오후 4시 무렵 김여정이 대표단으로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미국 언론들은(나중에 비밀 접촉을 보도한 워싱턴포스트조차) 펜스-김여정 접촉 가능성을 낮게 봤다. “김여정이 인권 위반 혐의로 미 정부에 의해 직접 제재 대상이 된 인물이며 그런 이유가 펜스 부통령이 김여정을 만나기 어렵게 만들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김여정 방남 소식이 전해진 비슷한 시각에 펜스 부통령이 일본에서 대북 강경 발언을 이어간 것도 판단을 헷갈리게 했다. 펜스 부통령은 아베 총리와 공동 기자회견에서 “지구 상 가장 독재적이고 억압적인 체제인 북한에 대해 곧 전례없이 엄중하고 강력한 경제 제재를 발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결과적으로 언론의 판단을 가장 흐트러트린 건 외교를 담당하는 미국 국무부와 북한 외무성이었다. 7일 국무부 나워트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우리는 평창올림픽 기간이나 그 이후라도 어떠한 북한 관리와도 만날 계획이 없다(there are no plans to meet with any North Korean officials during or after the Olympics)”고 말했다. 바로 직후에는 “그렇게 할 어떤 계획도 없다는 걸 분명히 하고 싶다(I want to be clear about that -- there are no plans to do so)”라고 사실상 못을 박았다.  

나워트 대변인의 브리핑 특성상 “NO”라는 말은 위로부터의 확실한 지침에 의하지 않으면 쓰지 않는 단어다. 북한 외무성도 박자를 맞췄다. 8일 외무성 조영삼 국장은 조선중앙통신사 기자와의 문답에서 “명백히 말하건 데 우리는 남조선 방문 기간 미국 측과 만날 의향이 없다. 우리는 미국에 대화를 구걸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같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과 북한 모두 언론을 앞에 놓고 보란 듯이 연막을 피운 것이다.
 
1900년대 영국의 외교관으로 ‘외교론’이란 고전(古典)을 쓴 니콜슨은 “외교란 교섭에 의해 국제 관계를 처리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우아한 정의 말고 현실 세계에선 “외교는 총성 없는 전쟁”이라고 한다. “외교관이란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하여 외국에 파견되어 거짓말을 하는 정직한 인사”라는 통찰도 있다. 그만큼 외교라는 것이 또 외교 관계라는 것이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일 것이다. 실제적으로는 백악관과 청와대, 주석궁의 지침을 충실하게, 때로는 거짓말도 해가며 수행하는 것이 미국과 남북한 외교 담당 부서의 역할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북핵 문제의 진전에 따라 앞으로도 누가 얼마나 새하얀, 새빨간 거짓말을 하는지 지켜볼 일이다. 

손석민 기자hermes@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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