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여자 전공의, 수련기간에는 결혼·임신 미뤄야 하나?

허지윤 기자 2018. 2. 2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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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기준법 등서 임신한 전공의 주 40시간 초과근무 금지학계·병원 “수련기간 줄어 추가 수련 후 전문의 취득해야"복지부 “임신 여성 전공의 추가 수련 문제 전문가 논의중"

2012년 서울 한 병원에서 전공의들이 분만실에 모여 회의하고 있는 모습. 당시 이 병원의 산부인과 전공의 18명은 모두 여자였다. 사진은 해당 기사 내용과는 무관하다. / 조선DB

“전공의의 수련 환경과 모성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제도라는데 전혀 반갑지 않아요. 엄마가 될지, 의사(전문의)가 될지 둘 중 하나만 택하고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마저 듭니다.”

22일 익명을 요구한 수도권 소재 A대학병원 소속 한 여자 전공의(레지던트 2년차)는 아기를 가졌다는 기쁨도 잠시 연장 수련 근무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노심초사하고 있다. 의료계에서는 여성 전공의가 임신하면 관련 법 때문에 수련 시간이 줄게 되는 만큼 레지던트 4년이 끝나도 전문의 시험자격을 주지 말고 추가로 연장 수련 근무하게 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공의는 “일년에 한번 치르는 전문의 자격 시험을 위해 4년의 수련 과정을 보는데, 임신을 했다는 이유로 수련을 연장해 더하라는 것은 사실상 ‘임신을 하지 말라’는 얘기나 다름 없다”고 말했다.

B대학병원 레지던트 이모(33)씨는 올해 결혼 3년째가 됐지만 임신 계획을 계속 미루고 있다. 이씨는 “집안에서는 노산을 걱정하며 임신 소식을 기다리고 있지만, 덜컥 임신을 하면 전문의 자격 취득이 늦어질 수 있는 데다, 동료들의 병원 근무 환경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정’과 ‘일’ 사이에서 주저하게 된다”고 말했다.

작년 12월 23일부터 이른바 ‘전공의특별법(전공의의 수련환경 개선 및 지위 향상을 위한 법률)’이 본격 시행된지 두 달 만에 임신한 여성 전공의의 근무 시간 단축과 전문의 자격 취득 문제를 두고 갈등이 예고되고 있다. 임신 전공의의 근무 단축으로 인한 대안과 세부 수련 지침은 마련돼있지 않아 해법을 두고 논란이다.

학회와 병원계는 ‘임신으로 인해 줄어든 수련 근무량만큼 추가로 연장 수련을 해야 전문의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수련생이면서 동시에 근로자인 전공의들은 ‘역차별’, ‘근무 환경·조건 악화’ 등을 우려하며 반발하고 있다.

◇ 임신 여성 전공의 근로 시간 논란 왜?

‘임신한 전공의의 근무시간 단축에 관한 논란’은 최근 사회의 분위기가 바뀌고 관련 법 제도가 한층 엄격해지면서 촉발됐다.

그동안 병원 내에 임신한 여성 전공의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오랫동안 수많은 직장에서 노동법, 근로기준법 등이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처럼 병원에서도 레지던트들이 수면을 포기하고 초과·연속 근무하는 것이 오랜 관행이였고 임신한 여성 레지던트도 대부분 예외없이 일했다.

하지만 2015년 말 국회를 통과한 ‘전공의특별법’이 작년 12월 23일부터 본격 시행되면서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전공의의 주당 근무 시간은 80시간으로 제한하고 36시간을 초과해 연속 근무해서는 안 된다. 특히 ‘여성 전공의에 대한 출산 전후 휴가와 유산·사산 휴가에 관해서는 근로기준법을 따르도록 명시했다. 이에 따라 모성 보호 차원에서 임신 여성 전공의는 수련 병원에서 주 40시간 이상 근무할 수 없다. 이를 어길 경우 수련 병원이 처벌받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해당 법이 애매모호하다는 점이다. ‘근무 시간을 얼마 이상 넘어서는 안 된다’는 상한선만 있고 ‘전문의 자격 취득 조건을 위해 최소 얼마 동안의 시간은 수련 근무를 해야 한다’는 하한선을 두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또 추가 수련에 대해서도 수련환경평가위원회에서 정한다고만 명시했을 뿐 세부 지침이 없다. 이 때문에 의료계는 정부, 즉 보건복지부의 유권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조선DB

◇ 첨예한 입장 차…해법 찾기도 어려워

이미 법이 시행된만큼 하루 빨리 대안책이 나와야하는 상황이지만 뾰족한 해법 찾기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 전문 과목 별로 워낙 수련 내용과 근무의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정부가 수련 시간과 양을 두부 자르듯 획일적으로 규정해 평가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게 학회, 병원, 전공의 등 의료계의 공통된 지적이다.

게다가 학계와 병원, 전공의 등 의료계 내부에서도 이해관계에 따라 큰 온도 차를 보이고 있다.

학회와 병원계는 ‘여성 전공의가 임신으로 주 40시간만 일할 경우 수련의 양과 질이 떨어질 수 있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이에 따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되 부족한 수련 근무 시간에 따른 추가 수련을 하게 하거나 추가 수련 후 전문의 자격을 취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수도권 소재 대학병원 교육수련부 관계자는 “전공의의 수련 근무는 환자의 생명을 다룰 전문의를 교육, 양성하는 것으로 수련의 질과 양이 모두 중요하다”면서 “법 시행 전에는 병원이나 전문 과목별로 임신한 여성 전공의를 배려해 자체적으로 근무 시간을 조정해왔고, 당시 임신 전공의들도 주당 40시간 이상은 근무했다”고 밝혔다. 그는 “병원으로선 법대로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면서 “정부는 법을 지키라 하지만 세부 지침이 불명확해 많은 병원이 혼란에 빠졌다”고 말했다.

전공의들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지난 21일 서울대병원, 서울아산병원, 고려대의료원, 연세대의료원, 삼성서울병원 등 서울 지역 소재 대형병원 전공의 대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추가 연장 수련 가능성’, ‘전공의 선발 역차별 문제’, ‘임금 감소’ , ‘인력 공백과 근무 강도’ 등에 관한 우려가 쏟아졌다.

박지현 대한전공의협의회 부회장은 “여성 전공의들 사이에서는 ‘수련 기간 연장이 오히려 여성의 모성 보호를 저해할 수 있다’는 점, ‘앞으로 병원들이 전공의를 선발할 때 여자 전공의는 임신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남자 전공의를 더 선호하는 역차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가장 크게 우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 부회장은 “또 전공의의 단축 근무로 생기는 공백을 막기 위해 다른 전공의가 떠안게 될 부담이 더욱 커질 것이라는 걱정도 있고 임신한 전공의의 경우 주 40시간만 일해 임금이 반토막나게 돼 월급이 최저임금 수준도 안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고 말했다.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전공의특별법 시행으로 전공의들의 수련 근무 시간이 단축돼 인력 공백이 불가피한데도 3년간 정부와 병원 협회는 세부 지원책과 해법 마련에 안일하게 대응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보건복지부 수련환경평가위원회 소속 한 관계자는 “임신 여성 전공의의 추가 수련 근무 문제에 관해서는 전문 과목별 학회, 병원 협회, 전공의협의회, 노무사, 변호사, 인권협회 등 다양한 전문가 등이 모여 논의를 하고 있다”며 “의견 수렴을 거쳐 결정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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