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10년째 나는 "서른셋입니다"

표태준 기자 2018. 2. 23.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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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남녀 1223명 설문.. 67%가 "실제 나이와 걸맞게 행동 안한다"

나이가 너무해
나이 먹어도 몸과 생각은 청춘 40代부터 절반 이상이 '-10세'최면 걸고 살아가기
꼰대 거부증.. "내 머릿속에서 나이 지웠더니 이젠 진짜 나이가 헷갈려"
자의반 타의반 거짓말
"환갑 넘었지만 오십 언저리라고 대답
진짜 나이 말했다간 분위기만 어색해져"
중년과 노년, 모호한 경계
"지하철 노약자석 60대인 내가 앉아도 될지 헷갈려"
연령 차별주의 거부
인종차별·성차별엔 다들 분개하면서..
100세 시대인데 연령차별엔 둔감
굴러들어 온 돌 '중년'
청년기와 노년기 사이 19세기 새로 생긴 신개념
의학 발달로 길어진 중년 나이 관념 전체가 흔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라고 누가 물으면 심장이 철렁해요."

서울 송파구에 사는 주부 추모(61)씨의 사회적 나이는 '오십 언저리'다. 누가 나이를 묻거든 '오십 조금 넘었다'고 답한다. 스스로 나이가 환갑을 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탓도 있지만, 나이를 솔직하게 말하면 오히려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한다. "20~30년 전만 해도 환갑은 지팡이 짚고 다니는 노인이었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저나 친구들을 보면 과거의 40~50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고, 스스로도 아직 그 나이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어요. 괜히 환갑 넘었다고 나이를 말하는 순간 '그렇게 나이가 많으신 줄 몰랐습니다'며 어색해지는 분위기가 불편하더라고요."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 일러스트= 안병현

직장에서 중간 관리자급인 이모(42)씨는 "30대 중반 이후부턴 머릿속에서 나이를 지웠다"고 했다. "우리 또래에선 '꼰대 거부증'이 있어요. 꼰대가 되면 안 된다는 강박이랄까요. '나이듦=꼰대'라는 인식을 거부하고 싶어서 나이를 의식적으로 생각 안 했더니 진짜 나이가 헷갈려요." 90년대 대학을 다닌 그는 '쿨한 태도'를 미덕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세대다. 이씨는 "요즘은 회사에서도 '열린 사고를 하는 상사'를 존경한다. 열린 사고라는 게 나이의 틀에서 벗어날 때 생기는 거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나이가 혼란스럽다. 꼭 중년이나 노년만의 문제는 아니다. 서울의 한 보험회사에 다니는 직장인 최정현(32)씨는 3년째 명절만 되면 '이제 서른'이 된다. 친척 어른들이 나이를 물으면 3년째 "이제 서른 정도예요"라고 답하기 때문이다. "아직 결혼 생각이 없고, 주변에도 결혼 안 한 친구들이 더 많은데 친척 어른들은 서른 넘은 여자가 시집 안 가면 큰일 난 것처럼 얘기해요. 실제 나이를 말했다간 무슨 사달이 날지 몰라 얼버무려요." 최씨가 생각하는 자신의 심리적 나이는 27세. 실제 나이보다 다섯 살 아래다.

과거에는 '마음만은 이팔청춘'이었다면, 이제는 나이를 먹어도 몸부터 생각까지 여전히 청춘이다. 인생의 단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지만, 한국 사회의 나이 관념은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 friday가 설문 플랫폼 '틸리언 프로'를 통해 전국 남녀 1223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현재 나이에 걸맞게 생각하고 행동하십니까?'라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답한 이가 67%로 과반수 이상이었다. 왜일까.

중년 거부하는 40대, 중년이라는 노년

19세기 이전만 해도 '아재'나 '아지매'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이를 속이는 나이'의 저자인 뉴욕타임스 기자 패트리샤 코헨은 "'중년(middle age)'이라는 단어가 사전에 처음 나타난 것은 1895년이다"며 "19세기 들어 인류의 수명이 대폭 늘어나며 중년이라는 개념이 발명됐다"고 했다. 미국 시카고대 리처드 슈웨더 인류학 교수도 중년을 '세계 이곳저곳에서 서로 다르게 만들어진 문화적 허구'라고 정의했다. 인류의 평균수명이 50대 초반에 불과할 때는 '청년기'와 '노년기'로만 인생의 단계가 나뉘었는데, 그 틈에 언제부턴가 갑자기 중년이 끼어들었다는 것이다. 이 굴러들어온 돌 중년은 의학 기술 발달과 함께 그 몸집을 불리더니 이제 박힌 돌 청년기와 노년기보다 덩치가 커져 나이 관념 전체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재작년 KBS 예능프로그램 ‘언니들의 슬램덩크’에 출연한 배우 라미란(43)이 힙합에 도전한 모습. / KBS

"제가 생각하는 신체 나이는 마흔, 얼굴은 서른 중반, 문화 취향은 '2030' 같아요. 나이가 정말 헷갈리네요." 중2 아들을 둔 '워킹맘' 한모(41)씨는 힙합 마니아다. 지칠 때면 플레이리스트에서 힙합 음악을 재생하고, 아들과 종종 신곡을 공유한다. 한씨는 "예전엔 부모 자식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가 별로 없었다. 심수봉의 트로트를 좋아하는 엄마와 서태지를 좋아하는 딸이 대화하긴 어려웠으니까. 이젠 우리 사회의 문화가 섬세해지고 다양해지면서 아이와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 장르가 생긴 것 같다. 세대 차가 줄어드니 물리적 나이도 자연히 잊게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전통적인 연령 분류라면 '중년'에 해당하는 나이지만 "중년이란 생각은 안 든다"고 했다.

중년과 노년의 경계도 모호하다. 부산에 사는 자영업자 이정식(64)씨는 "지하철을 타면 내가 노약자석에 앉아도 되는지, 젊은 사람들이 자리를 내어주면 앉아야 하는지 거절해야 하는지 헷갈린다"며 "이 정도 나이면 중년인지 노년인지 나도 모르고 주변 사람들도 모른다"고 했다.

실제로 설문 결과 중년 즈음부터 나이 혼란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40대부터 자신의 나이를 본래 나이보다 평균 10세 이상 낮춰서 생각하는 이들이 절반 이상이었다. 40대 응답자(208명) 중 53.85%가 '내 나이는 30대'라고 생각했고, 20대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9.13%에 달했다. 50대 응답자(204명) 중 47.06%가 자신을 40대로 생각했고, 30대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20.1%나 됐다. 60대 응답자(200명) 중에서는 37%가 자신을 50대라고 생각했고, 자신이 40대(33.5%), 30대(7.5%)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았다.

20대 청년과 60대의 응답을 비교하면 그 차이가 확실히 느껴진다. 20대 응답자(207명) 중 70%가 '내 나이는 20대'라고 답했지만, 60대는 14.5%만이 자신이 60대라고 생각했다.

나이 속이는 사람들

몸과 마음은 천천히 늙는데 나이는 속절없이 매해 그 수를 더하니 애석하다. 실제로 설문 응답자 절반인 50%가 '현재 내 나이가 불만족스럽다'고 답했다. 심리적 나이가 실제 나이를 따라가지 못하니 자연스레 나잇값 하고 싶지 않아 나이를 속인다.

서울에 사는 주부 추모(61)씨는 "모임에 나가서 나이가 환갑을 넘었다고 하면 '정말이냐? 그렇게 보이지 않으신다'고 말하는데 칭찬이겠지만 한편으로는 나잇값 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해석돼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고 했다. 추씨는 "과거와 비교하면 몸도 마음도 40대 정도인 것 같은데, 환갑이라는 숫자에 값을 부여하는 순간 무기력해지는 기분이 들어 나이를 속인다"고 했다.

실제 설문 응답자의 33%가 '남에게 나이를 속인 적이 있다'고 답했다. 특히 '나이를 낮춘 적이 있다'고 답한 응답자의 연령대는 40대(25.5%)가 가장 많았고, 50대(21.6%), 60대(18.5%) 순이었다. 10대(8.1%), 20대(10.2%)와 비교된다. 자신의 나이를 낮춰 말함으로써 나이 혼란에 대처하는 것으로 보인다.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회가 변하면 '경제는 1년, 정치는 5년, 의식은 100년이 걸려야 바뀐다'는 말처럼 나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의식이 변화를 뒤따라가지 못하니 나이를 속이는 식으로 개개인이 대처하는 것"이라고 했다. 윤 교수는 "은퇴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신체적·정신적으로 에너지 넘치는 베이비붐 세대의 대규모 은퇴가 이뤄지면, 이를 기점으로 우리 사회에 나이에 관념에 큰 충격이 올 것"이라고 했다.

나이 혼란이 불러온 연령차별주의

"이제 세상은 인종차별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가 하는 말을 흘려 넘기지 않는다. 그런데 나이 든 사람을 쓸모없는 존재로 치부하는 말을 듣고 놀란 눈으로 돌아보는 사람은 없다."

'나는 에이지즘에 반대한다'의 저자인 미국의 사회활동가 애슈턴 애플화이트는 '연령차별주의(Ageism)'가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가 됐다고 주장한다. 연령차별주의란 나이대에 맞는 생각과 행동이 있다는 고정관념을 바탕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행위다. 애플화이트는 "장수 사회가 되면서 나이의 관념이 뒤바뀌었는데, 사회는 여전히 과거의 낡은 나이 관념으로 사람들의 행동을 옥죈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노래와 춤. 젊어진 40~50대들은 트로트 대신 힙합을 듣고, 노래교실 대신 요즘 인기를 끄는 랩 학원에서 거친 가사를 쏟아낸다. 60대 이상에게는 술을 팔지 않고 춤을 추는 공간인 이른바 '콜라텍'이 인기다. 서울 영등포구의 한 콜라텍 관계자는 "지난 설 연휴 동안 넘치는 끼와 에너지를 발산하려는 중·노년 덕분에 평소보다 손님이 몰려 하루 1000명 넘게 찾아왔다"고 했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은 싸늘한 편이다. 서울 영등포에 사는 최모(67)씨는 "취미 생활로 춤을 추고 싶어 가는 콜라텍인데, 나잇값 못 하게 춤추러 다닌다며 이상하게 바라볼까 봐 젊은 자식들에게는 얘기할 염두도 못 낸다"고 했다. 설문에서도 이런 심적 갈등이 드러난다. '나이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이나 행동을 못하는 등 차별을 받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42%가 '그렇다'고 답했다.

김석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나이 관념이 바뀌어 은퇴하고도 30년 넘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 시대에 과거처럼 무조건 욕망을 참고 숨기기를 강요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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