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옆에서 가난한 사람이 사는 방법

2018. 2. 22.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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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권혁란의 스리랑카 한국어 교실

브리프가든. 제프리 바와 형제의 정원이다. 말인가 염소인가 개인가 무어라도 예술작품. 권혁란 제공

세계적으로 유명한 트로피컬 모던 건축가 제프리 바와가 스리랑카 사람이라는 것을 안 것은 스리랑카로 떠나기 바로 전이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칸달라마 같은 최고급 호텔부터 스리랑카 국회의사당 같은 관공서, 시마 말라카 같은 현대식 사원에서 루후나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멋지고 훌륭한 곳에는 다 이 사람 이름이 붙어 있었다. 생전 처음 발 디딘 스리랑카에서의 첫 합숙소도 바와가 지은 농업연수원이었고, 스리랑카에서의 마지막 여행지도 그가 살았던 루누강가라는 이름의 정원이자 집이기도 했다.

트링코말리 고기잡이. 온종일 저렇게 많은 사람이 고기를 잡아 함께 나눠 먹어야 한다. 권혁란 제공

건축여행을 슬슬 다니다 보니 그의 건축물이 친환경적이면서도 자못 예술적이어서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궁금해 화보를 찾아보았다. 거기 나온 바와의 사진을 보곤 어디가 스리랑카 사람인가, 싶었다. 하얀 피부, 커다란 안경,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매, 세련된 옷차림. 외모가 서양인이나 진배없었다. 알고 보니 스리랑카의 피가 20~30% 섞인 버거족, 즉 서양인과 스리랑카인의 혼혈이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엄청난 부잣집 아들이었다. 내가 주로 만나는 스리랑카 남학생이나 어부나 농부인 이웃하고는 단 한 군데도 닮은 것이 없었다. 나는 바와가 지은 건물을 보러 다니면서, 스리랑카 일반인들의 삶과는 아주 다른 경험을 한 셈이었다. 내 주변의 스리랑카 사람들은 바와를 전혀 몰랐고 그가 지은 곳을 가보지도 못했고 그 사람처럼 돈 걱정 없는 부자도 아니었으니까.

그물을 던지고 물에 들어가 고기를 몰아 그물을 걷어오는 방식의 고기잡이. 하루의 양식이다. 권혁란 제공

가난한 지역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생님은 진짜 부자”라는 소리를 듣고 살다가, 어쩌다 콜롬보로 오게 되면 같은 나라인가 싶을 정도인 부자들을 볼 수 있었다. 숲속 오지에 살고 생선 한 토막씩 사서 먹으며 어쩌다 맥도날드나 피자헛이라도 갈라치면 덜덜 떠는 내 학생들은 상상도 못 할 입성을 한 세련된 젊은이가 많았다. 한 집에 외제차가 6대인 집도 있고, 다들 아이들을 영국이나 인도로 유학을 보내고, 집에서도 싱할라어 대신 영어를 상용하는 집도 부지기수라 했다. 빈부 격차가 말도 못할 만큼 큰 셈인데, 오랜만에 만난 한국 여자들끼리 호숫가에 있는 호텔 정원이나 산책하자고 간 길에선 더 놀랄 만한 풍경도 마주쳤다. 너른 호텔 로비에 잘 차려입은 스리랑카 젊은이들이 가득 차 있었다. 슈트 정장을 말끔하게 빼입은 남자들과 찰찰 흐르는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긴 머리를 찰랑거리는 여자들이 영화 속처럼 멋들어진 몸짓으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영국 명문 대학에서 공부한 사람들의 동문 모임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그들이 하도 세련되고 여유로워 보여서 오랜만의 도시행이라 가방을 둘러메고 땀을 뻘뻘 흘리며 새까맣게 탄 우리가 좀 가엾어 보일 정도였다. 그들은 우리가 사는 시골에서처럼 외국인을 보고 반색하거나 싱할라어로 말해도 전혀 신기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의 어설픈 싱할라어를 듣다가 “그냥 영어로 하지 그래. 영어로 해야 알아듣겠어”라고 면박을 주기도 했다.

자, 시나몬을 만들어볼까. 초빙되어 온 시나몬 스틱 장인, 가난한 삶이어도 참 당당했던 아저씨. 권혁란 제공

부자는 가난한 자를 멀리하고 배척한다. 자명한 이 사실을 겪은 것은 도시의 유숙소. 한국으로 치자면 타워팰리스 정도일까, 콜롬보 잘사는 동네에 봉사자 70여명이 사용하는 유숙소가 있었다. 꽤 넓고 좋은 아파트였으니 4인 가족 위주의 입주민들에게 한국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게 싫기도 했으리라. 어느 날, 아파트 주민들이 모두 지문등록을 하고 등록되지 않은 이들은 엘리베이터조차 누를 수 없게 해놓았다. 우리는 경비원이 엘리베이터 층수 버튼을 눌러주어야만 집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주민들이야 편해졌다 해도 경비원은 무슨 죄인지. 일일이 손가락을 넣어주다간 지문 다 닳겠다 싶었다. 부자 입주민들에게 우리는 얼마나 가까이하기 싫은 사람들이었을까. 그나마 봉사자였으니 다행이지 돈 벌러 왔다면 꽤 서러웠을 것이다.

지금은 거의 다 한국 지방 오지에 사는 학생들. 자부심과 맷집으로 잘 견디길. 권혁란 제공

세상 어디에나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다. 가난하면 쉽사리 차별과 배제를 당한다. 그러니 잘사는 한국 사람들에게 ‘돈 벌러 온 이주 노동자들도 누군가의 귀한 자식이니 너무 무시하지 말라’고, ‘비록 공장에서 일하지만 대학 나온 사람도 많으니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부탁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차라리 스스로 맷집과 자존심을 키워서 당당하게 살라고 격려해줄 수밖에.

권혁란 전 페미니스트저널 <이프> 편집장, 코이카 스리랑카 한국어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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