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권력으로 유린.. '왕'들의 추악한 뒷모습

송은아 입력 2018. 2. 22. 19:44 수정 2018. 2. 22.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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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유린 당한 고통의 시간.. 성폭력 공동 대응 나섰다 / 미투 운동 동참 확산/문화계 거물들 성추행 뻔뻔한 변명/"다 배우는 과정" 주변선 침묵 강요/ 용기 내 항의하면 되레 질책·비난 / 연극계선 성폭력 반대 단체 출범/ 피해 공유·법적 대응 등 행동나서

“이 정도일 줄 몰랐다.” 문화계 성폭력 실태에 대한 충격이 가시지 않고 있다. 고은 시인부터 이윤택·오태석 연출까지 ‘거장’으로 추앙받던 이들의 뒷모습은 참담했다. 그러나 ‘미투(나도 당했다)’ 운동은 경악과 함께 희망도 쏘아올렸다. 혼자 견뎌온 성폭력 경험을 털어놓는 피해자들이 늘고 있고, 연극계에서는 성폭력 공동 대응을 위한 첫발을 내디뎠다.

문화계 성폭력 가해자를 고발하는 ‘미투’운동으로, 그동안 숨죽였던 성폭력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왼쪽부터 성추행·성폭행 가해자로 지목된 연출가 이윤택, 시인 고은, 연출가 오태석, 배우 조민기, 밀양연극촌장 하용부.

◆힘 없는 피해자… 주변의 침묵과 자책

이제까지 드러난 문화계 성폭력 피해 사례에는 주요 공통점이 있었다. 가해자들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극단 신진 단원·연극 지망생·학생 등 사회적 약자를 노렸다. 피해자를 돕는 손길은 거의 없었다. 주변인들은 성추행을 외면하거나 눈을 감았다. 배우 조민기는 청주대 연극학과 학생들이 지켜보는 회식과 연습 과정에서 ‘왜 그렇게 기운이 없냐, 어제 00이랑 한판 했냐’ 식으로 숱하게 성희롱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항의하거나 제지하지 못했다.

이윤택의 성폭력을 알았던 연희단거리패 단원들 역시 결국 침묵을 선택했다. 연희단거리패 전 단원 A씨는 22일 인터넷 커뮤니티인 연극·뮤지컬 갤러리에 공연 세 시간 전 이윤택이 전신 노출 연기를 요구해 거부하자 강제로 속옷까지 벗겼다고 폭로했다. 이윤택은 고참 남자 배우를 불렀고, A씨는 두 사람 앞에서 몇 분 동안 서 있어야 했다. A씨는 “그 선배님이 도와주기를 바랐다. 매우 강압적인 모습에 한마디라도 해줄거라 생각했는데 (그 선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배우 B씨는 대학로 회식자리에서 ‘축축한 선생의 손’에 성추행 당했으나 이를 무시하는 동석자들을 보며 자신이 투명인간 같았다고 표현했다. 성추행에 대한 그릇된 인식, 알아도 나설 수 없는 수직적 권력 구조와 그물망처럼 얽힌 인맥이 이들을 방관자로 만들었다.

피해자들이 오히려 비난의 화살을 맞거나 보복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A씨는 공연에서 잘렸고 이후 수년간 이윤택으로부터 ‘쟤는 정신이 이상한 애’라고 매도당해야 했다. 수차례 조민기의 만행에 대해 주변과 상담한 송씨 역시 “‘그 자리에는 왜 갔느냐, 왜 가만히 있었느냐’하는 물음과 질책 뿐이었다”며 “‘네 몸은 네가 잘 간수해라’ ‘그러니까 네가 조심해라’라는 충고들이 비수처럼 꽂혔다”고 밝혔다. 

 

 

특히 연극계에서는 연기 수업을 빙자한 성추행이 이뤄져도 ‘배우가 되는 과정’으로 치부되곤 했다. 배우 김모씨는 지난 18일 소셜미디어(SNS)에 올린 글에서 “누군가 ‘아까 선생님이 이 부분을 이렇게 만지셨어’ 말하자 다른 동기가 불같이 화를 냈다. 가르치시다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렇게 반응하면 되겠느냐는 거였다”고 전했다. A씨도 그를 연희단에 추천한 선배에게 하소연하자 ‘여배우로서 그거 하나 못 견뎌서 나오냐. 여배우가 벗는 게 뭐가 큰일이냐. 넌 배우로서 자격이 없는 거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이윤택 연출가가 예술감독을 지낸 서울 종로구 연희단거리패의 30스튜디오 문이 닫혀 있다.
이재문 기자

피해자들은 결국 가해자에게 사과받기보다 스스로 자책하며 후유증에 괴로워했다. 송씨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자리에서 뿌리치지 못한 내 탓이라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A씨 역시 연희단거리패를 나온 후 “제가 잘못했고, 제가 배우로서 자격이 없다 자책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후 2년간 정신적 충격으로 연극이 있는 대학로에 갈 수가 없었고, 영화·드라마도 못 볼 정도였다. 배우 김씨는 “성범죄의 가장 더러운 부분은 언젠가 피해자가 자책하게 되는 점”이라며 “그날 입은 청바지가 타이트했나, 너무 밝게 웃으며 대답을 했나, 그런 의문들로 나도 한동안 괴로웠다”고 적었다. 이윤택의 성폭행을 폭로한 김모 배우는 “대학로를 지나가다 연희단거리패의 포스터를 보는 순간… 며칠간 몸살에 시달리거나 우울한 마음이 찾아와 더 나를 질책하고 그 때 조금 더 잘 대처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찾아온다”며 “그 당시 신고하지 못했던 바보같았던 저에게 많은 질책을 하였다”고 전했다.

◆연극인·피해자 힘 합쳤다… 양지로 나선 목소리들

고통스런 목소리들이 모인 ‘미투(나도 당했다)’ 운동이 몰고온 파도는 거셌다. 서지현 검사·최영미 시인에 이어 숨죽였던 성폭력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연희단거리패뿐 아니라 연극 학원·대학로·학교에서 성추행을 당한 이들이 봇물 터지듯 고발을 이어가고 있다. 배우 우모씨는 지난 20일 SNS에 대학 시절부터 뮤지컬 학원 원장, 선배 배우, 무대 제작감독 등으로부터 겪은 성희롱 경험을 공유했다. 배우 박모씨는 지난 21일 남성으로서 겪고 목격한 선배 배우들의 성희롱을 털어놓으며 ‘미투’ 운동에 동참했다.

문화계뿐만이 아니다. 서혜진 한국여성변호사회 이사는 “서 검사가 나선 이후로 다른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며 “직장인 등 다양한 직업·연령대의 피해자들이 ‘나도 얘기하고 싶다’며 상담해온다”고 말했다. 서 변호사는 “주변 도움을 기대할 수 없던 피해자들이 정말 오랫동안 고민해오다 이제 큰 용기를 내고 있는 것”이라며 “이번에는 과거와 다르리란 희망을 가지고 ‘미투 운동이 오래 가겠죠? 변호사님 이거 일회적인 거 아닐 거예요’라고 얘기한다”고 전했다.

피해자들이 폭로를 넘어 공동대응에 나서는 움직임도 본격화되고 있다. 문화계 성폭력 피해자와 연극·법조인·여성계 관계자 등 130여명은 21일 대학로 극단 ‘고래’ 연습실에서 ‘연극인 회의’를 열어 피해 사실을 공유하고 법적 대응 등 대처 방안을 모색했다. 이들은 ‘성폭력 반대 연극인 행동’을 출범시키고 “권위주의 문화와 위계에 의한 폭력, 그리고 모든 성차별과 성폭력 문제까지 폐단의 고리를 끊어내고자 한다”며 “상담 창구를 만들고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에 단호히 대처하겠다”고 발표했다. ‘미투’를 지지하는 관객들도 25일 오후 3시부터 서울 대학로에서 집회를 열 예정이다.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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