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단독] 평생 당하고 '#미투'도 못해..대한민국 82년생 김지영

김효혜 2018. 2. 22. 17:45
음성재생 설정 이동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별도의 데이터 요금이
부과될 수 있습니다.
성별
말하기 속도
번역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회 곳곳 스며든 성희롱·성추행..#미투가 어려운 이유
김지영 씨가 기억하는 생애 첫 성희롱의 기억은 동네 또래 남자애들에게 당했던 '아이스케키'다. 남자애들은 김지영 씨의 뒤에 몰래 와서 치마를 들추고는 "속옷 봤대요"라며 놀려댔다. 김지영 씨가 새빨개진 얼굴로 엄마에게 쫓아가 이르면 "걔가 너 좋아해서 그러나 보다" 하는 답변이 돌아왔다. 어린 김지영 씨는 자신을 좋아하는데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른들은 대수롭지 않다 했고, 김지영 씨도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김지영 씨는 인문계 여고에 진학했다.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택했는데, 모든 학생이 일본어 선생을 싫어했다. 일본어 선생은 체벌할 때 꼭 학생들을 책상 위에 꿇어앉힌 뒤 30㎝ 자로 허벅지를 때렸다. 수업 시간 일본어 선생의 시선은 늘 책상 밑으로 향해 있었고, 김지영 씨를 비롯한 학생들은 일본어 시간이 되면 교복 치마 밑에 체육복을 껴입었다. 어떤 학생은 일본어 선생이 목덜미를 만졌다고 했고, 어떤 학생은 일본어 선생이 등을 쓰다듬으며 속옷 끈을 만졌다고 했다. 그 선생님의 별명은 '헨타이(일본어로 변태)'였다.

무난히 대학을 졸업한 김지영 씨는 한 중견기업의 사무직으로 입사했다. 첫 교육을 받던 날, 저녁 회식 자리에서 김지영 씨는 상사에게 "다리가 이쁘니 치마를 자주 입으라"는 말을 들었다. 김지영 씨는 상사에게 술을 따르며 웃었다. 3차 노래방에서 그 상사는 김지영 씨에게 블루스를 추자고 했다. 김지영 씨는 그에게 반쯤 끌어안긴 채 블루스를 췄다. 상사의 손이 허리와 엉덩이께로 내려올 때면 몸을 비틀어 피했는데 그야말로 진땀이 났다.

오지랖 넓은 남자 직원들은 가끔 조언처럼 "옆 부서 A씨처럼 눈웃음도 좀 치고 섹시한 옷을 입어라. 그래야 남자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말을 하곤 했다. 그 남자 직원들은 술자리에서는 "몇 명이랑 자봤어? 지영 씨가 의외로 잠자리에서 적극적인 것 아니냐"며 웃었다. 그녀가 표정을 굳히면 남자 직원들은 "농담인데 뭘 그러냐…"며 눙쳤다.

82년생 김지영 씨. 그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교육받고 자란, 평범한 여성일 뿐이다. 그런 그녀가 지난 30여 년간 겪은 숱한 성희롱과 성추행은 사회 통념상 모두 '그럴 수 있는 일들'로 치부됐다. 그러니 불쾌하고 불편하고 모멸감이 들고 상처를 받더라도 참아야 했다. 김지영 씨는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배웠다. "나 하나만 참으면, 모두가 편해지는 일"이었다.

대한민국 여성은 대부분 평범한 삶 속에서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를 만큼 많은 성희롱과 성추행을 겪어왔다. 대법원에 따르면 강간과 추행 등 성범죄로 형사 기소된 사건은 2012년 2789건에서 2016년 5618건으로 5년 새 2배 넘게 늘었다.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만큼 심각한 성범죄가 1년에 5000건 넘게 발생하고 있다는 뜻이다.

특히 2013년 친고죄가 폐지된 직후 기소 사건 수가 급증했다. 친고죄란 피해자의 고소·고발이 있어야만 기소할 수 있는 범죄를 말하는데, 성범죄가 친고죄였던 과거에는 피해를 당하고도 고소를 하지 않은 피해자가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당수 성범죄 피해자가 고소에 나서지 않은 것은 대부분 자신의 피해를 알리고 가해자가 처벌받도록 하는 과정에서 '2차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용기를 내 문제를 제기하더라도 권력 관계에 의해 조직적으로 무마되거나 은폐되는 일이 많다.

또 대부분의 성범죄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아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번번이 입증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가해자들은 시치미를 떼거나 더러는 피해자를 '꽃뱀'이나 '꼬리 친 여우'로 몰아갔고, 일부는 명예훼손이나 무고로 역고소를 하기도 했다. 피해자에 대한 낙인효과 때문에 성범죄 신고율은 다른 중범죄에 비해 훨씬 낮다.

2016년 여성가족부의 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성범죄 피해자의 경찰 신고 비율은 2.2%가량에 불과하다. 그만큼 드러나지 않은 범죄가 훨씬 많다.

김보화 한국성폭력상담소 산하연구소 울림 책임연구원은 "사회 전체에 만연한 피해자를 향한 의심은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부여하고, 피해자에게는 비난과 두려움을 초래함으로써 성폭력 신고 자체를 포기하게 한다"며 "특히 범죄자가 제대로 처벌을 받지 않으면 적극적으로 신고할 수 없고, 이는 더 높은 성폭력과 재범 발생의 원인이 된다"고 말했다.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받는 경우도 드물다. 형사 기소 사건 수가 급증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전체 성범죄 가운데 형사재판에 넘겨지는 기소율은 높지 않다. 법무연수원의 2016 범죄백서에 따르면 성범죄 중 가장 죄질이 무거운 강간 사건만 해도 기소율이 52.62%에 불과하다. 강간 사건의 불구속률(2016년 경찰범죄통계 기준)은 91.26%나 된다. 성범죄 용의자 대부분이 애초에 '구속'되지 않고, 절반 가까이가 '불기소'로 풀려난다는 얘기다.

낮은 확률로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이뤄진다 해도 피해자는 다시 한번 낙인에 노출된다. 성범죄를 당한 여성은 평생에 걸쳐 '안타깝지만 결혼시장에선 끝이 났다'는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 그러나 국가에서 이런 인식을 바꾸려는 노력은 거의 하지 않는다. 피해 수습과 2차 피해 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는 사실상 거의 없다. 이에 대해 여성가족부 담당자는 "2차 피해에 대한 제도적 장치가 없다는 게 문제임을 인식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 중"이라고 말했다.

■ <용어 설명>

▷ 82년생 김지영 : 지난해 출간돼 50만부 이상 팔려나간 조남주 작가의 소설 제목이자, 소설 속 주인공이다. 최근에는 우리 주변의 평범한 30·40대 여성들을 상징하는 용어로 통용되고 있다.

[김효혜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검색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