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평생 당하고 '#미투'도 못해..대한민국 82년생 김지영
김지영 씨는 인문계 여고에 진학했다.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택했는데, 모든 학생이 일본어 선생을 싫어했다. 일본어 선생은 체벌할 때 꼭 학생들을 책상 위에 꿇어앉힌 뒤 30㎝ 자로 허벅지를 때렸다. 수업 시간 일본어 선생의 시선은 늘 책상 밑으로 향해 있었고, 김지영 씨를 비롯한 학생들은 일본어 시간이 되면 교복 치마 밑에 체육복을 껴입었다. 어떤 학생은 일본어 선생이 목덜미를 만졌다고 했고, 어떤 학생은 일본어 선생이 등을 쓰다듬으며 속옷 끈을 만졌다고 했다. 그 선생님의 별명은 '헨타이(일본어로 변태)'였다.
무난히 대학을 졸업한 김지영 씨는 한 중견기업의 사무직으로 입사했다. 첫 교육을 받던 날, 저녁 회식 자리에서 김지영 씨는 상사에게 "다리가 이쁘니 치마를 자주 입으라"는 말을 들었다. 김지영 씨는 상사에게 술을 따르며 웃었다. 3차 노래방에서 그 상사는 김지영 씨에게 블루스를 추자고 했다. 김지영 씨는 그에게 반쯤 끌어안긴 채 블루스를 췄다. 상사의 손이 허리와 엉덩이께로 내려올 때면 몸을 비틀어 피했는데 그야말로 진땀이 났다.
오지랖 넓은 남자 직원들은 가끔 조언처럼 "옆 부서 A씨처럼 눈웃음도 좀 치고 섹시한 옷을 입어라. 그래야 남자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말을 하곤 했다. 그 남자 직원들은 술자리에서는 "몇 명이랑 자봤어? 지영 씨가 의외로 잠자리에서 적극적인 것 아니냐"며 웃었다. 그녀가 표정을 굳히면 남자 직원들은 "농담인데 뭘 그러냐…"며 눙쳤다.
대한민국 여성은 대부분 평범한 삶 속에서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를 만큼 많은 성희롱과 성추행을 겪어왔다. 대법원에 따르면 강간과 추행 등 성범죄로 형사 기소된 사건은 2012년 2789건에서 2016년 5618건으로 5년 새 2배 넘게 늘었다.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만큼 심각한 성범죄가 1년에 5000건 넘게 발생하고 있다는 뜻이다.
특히 2013년 친고죄가 폐지된 직후 기소 사건 수가 급증했다. 친고죄란 피해자의 고소·고발이 있어야만 기소할 수 있는 범죄를 말하는데, 성범죄가 친고죄였던 과거에는 피해를 당하고도 고소를 하지 않은 피해자가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당수 성범죄 피해자가 고소에 나서지 않은 것은 대부분 자신의 피해를 알리고 가해자가 처벌받도록 하는 과정에서 '2차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용기를 내 문제를 제기하더라도 권력 관계에 의해 조직적으로 무마되거나 은폐되는 일이 많다.
2016년 여성가족부의 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성범죄 피해자의 경찰 신고 비율은 2.2%가량에 불과하다. 그만큼 드러나지 않은 범죄가 훨씬 많다.
김보화 한국성폭력상담소 산하연구소 울림 책임연구원은 "사회 전체에 만연한 피해자를 향한 의심은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부여하고, 피해자에게는 비난과 두려움을 초래함으로써 성폭력 신고 자체를 포기하게 한다"며 "특히 범죄자가 제대로 처벌을 받지 않으면 적극적으로 신고할 수 없고, 이는 더 높은 성폭력과 재범 발생의 원인이 된다"고 말했다.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받는 경우도 드물다. 형사 기소 사건 수가 급증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전체 성범죄 가운데 형사재판에 넘겨지는 기소율은 높지 않다. 법무연수원의 2016 범죄백서에 따르면 성범죄 중 가장 죄질이 무거운 강간 사건만 해도 기소율이 52.62%에 불과하다. 강간 사건의 불구속률(2016년 경찰범죄통계 기준)은 91.26%나 된다. 성범죄 용의자 대부분이 애초에 '구속'되지 않고, 절반 가까이가 '불기소'로 풀려난다는 얘기다.
낮은 확률로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이뤄진다 해도 피해자는 다시 한번 낙인에 노출된다. 성범죄를 당한 여성은 평생에 걸쳐 '안타깝지만 결혼시장에선 끝이 났다'는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 그러나 국가에서 이런 인식을 바꾸려는 노력은 거의 하지 않는다. 피해 수습과 2차 피해 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는 사실상 거의 없다. 이에 대해 여성가족부 담당자는 "2차 피해에 대한 제도적 장치가 없다는 게 문제임을 인식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 중"이라고 말했다.
■ <용어 설명>
▷ 82년생 김지영 : 지난해 출간돼 50만부 이상 팔려나간 조남주 작가의 소설 제목이자, 소설 속 주인공이다. 최근에는 우리 주변의 평범한 30·40대 여성들을 상징하는 용어로 통용되고 있다.
[김효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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