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과 회견한 이윤택.. 이 표정, 이 손짓까지 연습하고 나왔다

송혜진 기자 2018. 2. 22.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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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근들, '제왕의 짐승짓' 뻔히 알고도 침묵의 카르텔
"고은 사태때 '선생님도 불안' 예견.. 사건 터지자 회의
침묵·방조, 심지어 1년전 같은 폭로엔 무마 나섰다"
단원 모아 예상질문 주고받아
"선생님 표정이 안 불쌍해요" 다시 표정지으며 "이건 어떠냐"
극단 상임연출자 고발 글 올려

여배우를 성 노리개 삼다시피 했던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 이윤택(66)씨의 범죄적 행동 뒤에는 침묵하거나 방조하고, 심지어 '원만한 해결'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최영미 시인이 고은 시인의 성추행을 고발했을 때 '이윤택 사태'를 준비했고, 이씨의 성추행 사실이 폭로되자 기자회견 리허설을 함께하며 적극적으로 도왔다는 추가 폭로가 나왔다. 1년 전에도 같은 폭로가 있었으나 극단 대표가 나서서 무마했다고 추가 폭로자는 주장했다.

괴로운 듯 감은 두 눈도, 겸허히 모은 두 손도 모두 리허설을 거쳤다. 연극연출가 이윤택씨가 지난 19일 기자회견을 열어 사과한 것을 두고 연희단거리패에서 상임 연출을 맡았던 배우 오동식씨는“단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리허설한 것”이라고 21일 폭로했다. /장련성 객원기자

연희단거리패에서 상임 연출을 맡았던 배우 오동식씨는 21일 페이스북에 '나는 나의 스승을 고발합니다'라는 글을 올려 이씨가 기자회견을 하기 전까지 과정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2월 6일 문학계의 미투 운동을 시작한 여성 시인의 인터뷰가 방송되자, 다음 날 극단 대표와 선배 연극인이 '불안한데… 미리 연락해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스럽게 이야기했다"고 했다. 그때 이미 이씨 성추행에 대한 폭로를 예견했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 12일 이씨의 성추행 논란과 관련된 기사가 처음 보도되자 이씨와 김소희 연희단거리패 대표 단둘이 회의를 했고, 극단 수뇌부는 언론과 소셜미디어를 지켜보며 대처 방안을 상의했다고 말했다. 이윽고 14일 이씨의 성추행이 공개 고발되자 이씨와 단원들은 부산으로 내려가 회의를 열었다고 오씨는 말했다.

/일러스트=김성규

오씨는 "극단 회의에서 이씨는 폭로 글을 올린 사람에 대해 모욕적 언사를 써 가며 '우리를 의도적으로 공격하는 것'이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배우 김보리(가명)씨의 성폭행과 임신, 낙태 주장이 나온 뒤 극단 대표가 사실인지 묻자 이씨가 "그 일은 이미 그녀의 엄마와 이야기가 됐다. 그 여자애는 이상한 아이라 워낙 개방적이고 남자와 아무렇지도 않게 잔다"고 했다고 주장했다.

이씨는 회의에서 공개 사과를 결정한 후 변호사에게 예상 형량을 물었고 "노래 가사를 쓰듯이, 시를 쓰듯이" 사과문을 만들었으며 단원들과 함께 기자회견 리허설을 했다고 오씨는 말했다. 리허설 당시 김 대표는 "선생님 표정이 불쌍하지 않아요. 그렇게 하시면 안 돼요"라고 말했고 이에 이씨가 다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이건 어떠냐"고 말했다는 게 오씨 주장이다. 일부 단원이 "성추행 말고 성폭행 제보가 있는데 사실이냐" "낙태는 사실이냐"고 질문했고 이씨는 "사실이 아니다"고 대답하는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예상질문을 한 단원은 "낙태는 인정하면 안 된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김소희 대표는 21일 본지에 "'진심 어린 사과를 하지 않으면 얼굴에 다 드러난다. 진심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다"며 "내 의도가 왜곡됐으며 오히려 내 입장이 반대로 전달됐다"고 말했다. '사과 리허설'을 폭로한 오씨는 그러나 1년 전에도 한 배우가 이씨의 성추행을 소셜미디어에 고발했으나 김 대표가 원만한 타협을 권유해 글이 삭제됐다고 주장했다.

오씨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적어도 극단 대표와 중견 단원 한 명은 이씨를 적극적으로 도왔고 나머지 단원들은 침묵 또는 방조한 셈이다. 오래전부터 계속돼 온 이씨의 범죄행위를 다들 알면서도 침묵했고, 만천하에 공개된 뒤에도 '침묵의 카르텔'을 지켰다.

지난 18일 서울예대의 한 여학생은 경남 지역 B극단 조모 대표에게 성추행당한 사실을 학교 게시판에 폭로했다. 그는 이 글에서 "극단 대표가 내게 자주 안마를 시키거나 물수건으로 몸을 닦게 했다"며 "그러나 이 사실을 안 어른들 아무도 말리지 않았고 '원래 그런 사람이고 별문제 아니니 그냥 넘어가라'고 했다"고 썼다.

'침묵의 카르텔'은 연극계만의 일이 아니다. 12년 전 영화사에서 일하다가 이직했다는 김모씨는 "촬영감독이나 영화사 간부가 성희롱·성추행한 일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고민 끝에 선배들에게 털어놨지만 하나같이 '폭로해봤자 너만 이상한 애 된다. 가만있는 게 낫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통영지청 서지현 검사가 성추행당한 사실을 폭로하자 "나도 성추행당한 적 있다"며 응원했던 더불어민주당 이재정 의원 역시 변호사 시절 성희롱 피해를 호소한 후배에게 "현명한 선택을 하라"고 종용한 사실이 밝혀졌고,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도 비슷한 일을 당한 동료 교수에게 "학교 망신이다. 그냥 덮자"고 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김명화 연극 평론가는 "제왕적 권력을 지닌 이에게 잘 보이기 위해선 버텨내야 한다는 정신무장과 자기 세뇌가 침묵의 카르텔을 강화하는 기형적 구조를 만든다"고 했다. 김소희 연희단거리패 대표는 "문제가 생겼음에도 극단 내의 일로 축소시키고 피해자에게 더 상처를 준 점이 부끄럽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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