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벗겨진 거장·문화계 속살..발길 돌리는 대중

배영윤 기자 2018. 2. 20.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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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해체·공연장 폐쇄, 문학관 건립 및 관련 행사 줄줄이 재검토..문화계 권력구조 개선돼야
성추행에 이어 성폭행 논란에 휩싸인 연극 연출가 이윤택이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30스튜디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있다. 이날 이윤택은 성폭행 의혹에 대해 "인정할 수 없다"며 "성관계는 있었으나 강제적으로 이뤄지지는 않았다"고 부인했다./사진=이기범 기자


"이윤택 때문에 연극 자체에 대한 흥미가 떨어진다. 성폭력으로 얼룩진 판에서 만들어진 작품을 볼까봐"(누리꾼 A씨)"작품은 인간과 분리될 수 없다.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인간이 덜 된 이의 작품을 훌륭하다 할 수 없다"(누리꾼 B씨)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 고은 시인 등에 대한 성폭력 논란이 불거지면서 이들 작품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는 대중들이 늘고 있다. 오랜 기간 사랑을 받아온 작품들을 창작해온 한 분야의 거장이기에 사회적으로 적잖은 충격을 안겼다.

비난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이들과 관련된 행사, 문화 공간도 축소되는 분위기다. 비단 연극과 문단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의견이 모아지면서 부정적인 시각들이 문화계 침체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거장들 잇따른 성추문에…오랜 전통 극단 해체, 문학관 건립도 '오리무중'=김수희 극단 미인 대표가 과거 성추행 피해 사실 폭로를 계기로 연극계에도 미투(me too, '나도 당했다'는 의미로 성범죄 피해 사실 폭로 캠페인) 운동이 확산됐다. 가해자로 '연극계 거장'으로 꼽히는 이윤택이 지목됐다. 추가 폭로가 빗발치면서 논란이 증폭됐다. 이 전 감독은 지난 19일 기자회견을 열고 공식 사과했지만 '진정성이 없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이 전 감독이 예술감독으로 있던 연희단거리패는 결국 해체됐다. 김소희 연희단거리패 대표는 "우리가 어떻게 노력한다고 풀릴 만큼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 해체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거장의 성추문으로 30년 이상 역사를 자랑하는 극단이 한순간에 사라리게 됐다. 극단이 운영하던 경남 밀양연극촌과 부산 가마골소극장도 폐쇄 수순을 밟게 됐다. 특히 밀양연극촌은 1999년 개장 이후 수많은 연극인과 우수한 작품을 배출하며 연극 활성화에 기여한 곳이다.

서울도서관이 상습 성추행으로 논란을 빚고 있는 고은 시인의 전시공간 '만인의 방' 운영을 두고 철거를 고심하고 있다. 사진은 20일 서울 중구 서울도서관에 마련된 시인 고은의 삶과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상설 전시 공간 '만인의 방'. 2018.2.20/뉴스1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보다 앞서 논란이 된 '문단 내 미투' 운동에는 문학계를 대표하는 고은 시인이 거론됐다. 최영미 시인이 계간지 '황해문화' 2017년 겨울호에 발표한 시 '괴물'이 촉매제가 됐다. 문단 뒤풀이 자리에서 성추행을 일삼는 한 시인을 'En선생'으로 표현했다. 지난 2016년 10월 문예지 '21세기 문학' 가을호에 '질문 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던 김현 시인의 글도 다시금 회자됐다. 이후 수많은 문인들의 추가 폭로와 지지가 이어졌다.

서울도서관 내에 조성한 고은 시인의 삶과 작품을 조명한 전시 공간 '만인의 방'을 철거해야 한다는 항의가 빗발쳤다. 서울도서관 관계자는 "'만인의 방'은 내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조성한 것으로 '만인보' 속 독립운동가 관련 자료 중심으로 꾸민 것이지 작가 한 사람에 초점을 둔 공간이 아니다"라면서도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해 3·1운동이 좀더 부각될 수 있도록 공간을 재편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은 시인은 지난 2013년부터 창작 공간으로 거주중인 수원시 '문화향수의 집'도 떠나기로 했다. 고은재단 측은 "지난해 5월 광교산 주민들의 반발(퇴거 요구)을 겪으면서 수원시가 제공한 창작공간에 거주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고 이주를 준비해 왔다"며 "시인은 더 이상 수원시에 누가 되길 원치 않는다는 뜻도 전했다"고 밝혔다.

수원시는 고은재단 측 의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또한 올해 하반기 계획했던 고은 시인 등단 60주년 기념 행사는 전면 재검토하기로 했다. 수원시 장안구에 건립을 추진중이었던 고은문학관 사업도 사실상 불투명해진 상태다.

◇얼룩진 문화계, 구조 개선·인식 전환 필요…"문화계 건강성 증거 의견도"=연이은 거장들의 성추문 논란에 당사자의 작품 비판을 넘어 문단·연극계 전체를 비방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국작가회의 소속 한 문인은 "과거 신경숙 작가 표절 시비 때도 소설 독자들이 상당히 떨어져 나간 것으로 안다"며 "이번 일로 문단 사회가 현실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시선이 생기고, 당분간 시집이나 시가 독자들과의 거리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개인의 문제를 문단 전체의 문제로 확대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면서도 "문단 전체의 불신을 초래하는 문제 발생 시 문인협회나 작가회의 등 단체에서 명확한 태도와 확실한 논의가 있어야 할 필요성에 많은 문인들이 공감한다"고 덧붙였다.

문화예술계는 한 명의 작가나 연출가 등 한 사람을 'ㅇㅇ계 대표'나 '거장'으로 칭하면서 맹목적인 신화를 만들고 권력을 부여한 구조적인 문제를 점검해봐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또 다른 문인은 "이 일로 독자들이 느낄 배신감에 충분히 공감한다"면서도 "고은 시인이 문학계 대표로 여겨지는 건 맞지만 문화계 전부는 아니며, 대표는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단 내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한 시인은 "피해자 증언 등으로 문학계 전반이 위축될 거라고 보지 않는다"라며 "그정도로 문학 독자들의 사리분별이 떨어지지 않으며 오늘날의 독자들은 훨씬 더 예민하고 깨어있다"고 말했다. 이어 "젊은 문인들, 등단을 목표로 하는 예비 문인들이 문단 내 성폭력 등과 같은 문제에 가장 활발히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을 볼 때 오히려 한국 문단이 건강하게 성장하는 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 점검, 가해자의 사과와 처벌 이후 구조적인 차원에서의 문제점들을 점검하고 인식의 전환을 꾀할 때 새로운 변화와 발전의 순간과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배영윤 기자 young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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