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식간에 9000억원 모은 텔레그램..'주주 자본주의' 가고 '코인 자본주의' 오나
텔레그램·코닥 등도 코인 발행 나서
우리 정부는 "사기 우려 있다" ICO 금지
전문가들 "막으면 해외서 발행, 국부 유출"
전 세계 10억 명의 이용자를 거느린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이 19일(현지시간) 8억5000만 달러(약 9000억원)의 투자금을 유치했다. 통상 회사가 이렇게 거액의 돈을 끌어오려면 주식이나 채권을 발행한다. 하지만 이 회사는 주식·채권 대신 '그램스'라는 코인, 즉 암호화폐를 발행했다. 증시에 주식을 내놓고 주주들의 투자금을 모으는 IPO(initial public offering·기업공개)를 본 따 이렇게 암호화폐로 자금을 모집하는 행위를 ICO(initial coin offering·암호화폐 공개)라 한다. 기업 운영을 잘 해 발행한 코인의 가치가 올라가면 투자자가 이를 팔아 이익을 얻는 것은 주식과 같다.
해외에서는 ICO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국내 기업들은 사정이 다르다. 정부가 지난해 9월 말 ICO 금지 방침을 밝혔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는 "ICO가 사기 위험이 있고, 좋은 사업 모델이라면 주식 공모 등 공개된 시장에서 얼마든지 자금 조달이 가능하다"는 점을 금지 이유로 들었다. 현재 주요 국가 가운데 ICO를 정부가 금지하겠다고 밝힌 나라는 한국과 중국 정도다.
법무법인 태평양 이재인 변호사는 "지난해 정부는 '12월까지 금지 법안을 만들겠다'고 밝혔으나 아직 법안의 초안도 마련되지 않은 상태"라며 "현재 누구든 발행하거나 거래해도 불법이 아니지만 정부가 금지 방침을 밝히면서 관련 시장이 크게 위축된 상태"라고 설명했다.
코인을 발행한다고 항상 투자금을 모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ICO를 하려면 기업은 발행 목적과 규모, 운용 계획을 담은 백서(White Paper)를 먼저 발행해야 한다. 투자자들은 백서에 밝힌 사업목적을 보고 이를 잘 수행할 기업이라는 믿음이 확고하면 코인 구입에 나서게 된다. 디지털 사진의 투명한 거래 시스템 구축을 표방한 코닥이 '코닥 코인'을 발행한 게 대표적이다.
정보기술(IT) 전문가들은 ICO 금지가 실효성이 없다고 지적한다. 박수용 서강대 컴퓨터공학과 교수는 "ICO 시장은 아직 초기단계여서 '돈이 되는' 비즈니스 모델이 얼마든지 많이 있다"며 "국내 기업들이 코닥처럼 특정 생태계 선점에 나서야 하나 정부 눈치를 보느라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업 모델만 명확히 제시하면 삼성코인·LG코인·네이버코인·카카오코인이 얼마든지 등장할 수 있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암호화폐에 대한 정책을 수립할 때 ICO 제도에 대한 검토도 병행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법무법인 테크앤로의 구태언 변호사는 "IPO는 국내 증시로 한정되지만, ICO는 전 세계를 상대로 하는 코인 세일즈"라며 "원화는 전 세계에서 한국 영토 내 몇천만 명이 쓰는 데 그치지만 만일 한류 유통 생태계를 비즈니스 모델로 앞세운 강력한 코인이 등장하면 실물화폐(원화) 보다 더 영향력 있는 디지털 암호화폐를 보유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태희 기자 adonis5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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