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 당시 박정희 대통령 마산지역 특전여단 투입 지시"

박정양 기자 2018. 2. 20. 12:00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1979년 10월 부마민주화항쟁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위수령에 의한 병력출동 명령에 의거하지 않고 마산지역에 특전여단 투입을 지시했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20일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위원회의 부마항쟁 진상조사보고서(초안)에 따르면, 부산지역 비상계엄과 마산지역 위수령에 의한 병력 출동 명령은 모두 헌법과 법령이 정한 적법 절차를 무시하고 발동됐으며 두 지역 모두 명령이 있기 전에 군이 출동해 시위를 진압하고 시위대를 체포했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위원회 진상조사보고서 발표

(서울=뉴스1) 박정양 기자 = 1979년 10월 부마민주화항쟁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위수령에 의한 병력출동 명령에 의거하지 않고 마산지역에 특전여단 투입을 지시했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부마항쟁은 1979년 10월16일부터 10월20일까지 부산과 마산에서 유신 체제에 대항한 민주화운동이다. 16일 부산대 학생들의 유신철폐구호와 함께 시작됐으며 18,19일 마산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됐다.

20일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위원회의 부마항쟁 진상조사보고서(초안)에 따르면, 부산지역 비상계엄과 마산지역 위수령에 의한 병력 출동 명령은 모두 헌법과 법령이 정한 적법 절차를 무시하고 발동됐으며 두 지역 모두 명령이 있기 전에 군이 출동해 시위를 진압하고 시위대를 체포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위수령에 의한 병력출동 명령에 의거하지 않고 마산지역에 특전여단 투입을 지시한 것으로 밝혔다.

또 계엄사 합동수사단은 배후 세력을 조사하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부마항쟁의 배후로 북한과 야당, 김영삼 등을 연계시키기 위해 7개의 주요 사건에 대한 허위진술을 자백받고자 한 정황도 드러났다.

7개 주요 사건은 Δ부산대 데모 주모자 이진걸 사건 Δ동아대 데모 주동자 이동관 사건 Δ신민당 한의명 사건 Δ통일당 권삼쾌 사건 Δ남민전 사건 Δ불순 종교인 사건 Δ양서협동조합 사건 등이다.

또 당시 마산경찰서장이 기자회견에서 시위의 배후에 불순세력이 개입된 징후가 농후하다며 사제총과 화염병을 사용했다고 했으나 위원회 확인한 결과 사제총 사건은 배후세력을 확정하기 위해 조작된 것으로 결론내렸다. 화염병 사용 역시 확인할 수 없었다.

부마항쟁 당시 연행자 대부분은 연행·체포 과정에서 폭행을 당했고 전원 불법 구금 상태로 조사를 받았다. 조사 과정에서는 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했다. 연행자수는 당초 알려진 1563명에서 부산여대 학생 56명과 시민 126명이 추가되어 1800여명으로 추정된다는 게 위원회 설명이다.

위원회는 부마항쟁 관련자 및 유족 여부 심사를 벌여 피해 신고자로 접수된 180명 가운데 153명이 부마민주항쟁 관련자로 인정됐다고 밝혔다.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긴급조치에 의한) 가혹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국민, 특히 학생들의 유신 체제에 대한 저항은 더욱 거세어졌고 급기야 부산·마산사태로까지 발전했다"며 "유신 체제 7년 동안 이 체제에 대한 도전과 항거는 온 국민의 생각 속에 팽배해 있었고, 10월의 부산·마산사태가 그 좋은 증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부마항쟁 당시 사망자로 알려진 고(故) 유치준씨가 유족측 주장대로 경찰 진압에 사망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결과도 나왔다.

부마항쟁 당시 사망설을 확인한 결과 당시 사망자로 알려진 유치준씨는 유족의 주장대로 경찰의 진압에 의한 사망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진술이나 객관적 자료가 없었다.

유일하게 발견된 검찰의 검시사건부에는 사인이 뇌출혈(지주막하출혈)로 기재되어 있어 부마항쟁 사망자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부마항쟁 관련 단체와 피해자 가족 등은 유씨의 사망은 경찰과 군의 강경 진압 때문이라고 주장해 왔다.

위원회는 부마항쟁이 1970년대 학생과 재야 중심의 민주화운동에서 벗어나 민중항쟁의 지평을 열고 유신체제를 붕괴시켰으며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의 연결고리가 된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기술했다.

위원회는 지난 3년간의 활동 결과를 발표하기 위한 보고회를 오는 23일 부산광역시의회에서 개최한다.

pjy1@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