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안 깨는 약' 디설피람의 반전

글 정재훈(약사) 2018. 2. 2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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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깨는 약은 없다. 다시 물어봐도 대답은 똑같다. 그런 약은 없다. 숙취해소 음료는 식품이며 약이 아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약간의 효과가 있을지는 몰라도 약으로 승인받을 정도로 두드러진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술 안 깨는 약은 실재한다. ‘디설피람’이라는 약이다.

우리가 술로 섭취하는 알코올은 주로 두 종류의 효소에 의해 분해된다. 1단계로 작용하는 알코올 분해 효소와 여기서 생겨난 아세트알데히드를 해독하는 2단계 알데히드 분해효소이다. 숙취가 일어나는 정확한 원인이 뭔가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중간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유독 성분인 아세트알데히드가 뇌와 여러 기관에 영향을 주는 것이 중요한 원인 중 하나라는 데 많은 전문가들이 동의한다. 술 안 깨는 약은 이러한 현상을 거꾸로 이용한 것이다. 디설피람을 복용하면 아세트알데히드 분해 효소를 막아서 음주를 고통스러운 경험으로 만들어준다. 술을 조금만 마셔도 머리가 아프고, 얼굴이 빨개지며, 심장이 더 빨리 뛰고, 구역, 구토를 경험하기도 한다. 심하게는 혈압이 떨어지거나 호흡곤란을 느낄 수도 있다(일부 항생제를 복용 중에도 이런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술과 섞어서 좋을 약은 거의 없지만, 이런 약을 복용 중일 때는 특별히 더 음주를 피해야 한다). 알코올의존증 치료 중인 사람들의 경우에는 금주에 도움이 되는 부작용이다. 술을 마시지 말아야겠다는 의지가 강한 아침녘에 약을 먹고 나면, 저녁에 술을 마시려는 유혹이 강해져도 약 복용 중에 술을 먹으면 느낄 고통이 떠올라 음주를 포기할 거라는 이론이다. 이런 생각이 화려한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디설피람은 1949년 남용을 막는다는 의미를 지닌 ‘안타부스(Antabuse, ‘반대’라는 뜻의 ant와 ‘남용’이란 뜻의 abuse의 합성어)’라는 상품명으로 출시되었다.

한국인 10명 중 1명, 술 안 깨는 유전자 갖고 있다

여기서 잠깐 멈추어 생각해보자. 사실 우리 주위에는 디설피람이라는 약을 복용하지 않아도, 술만 마시면 머리가 아프고 얼굴이 빨개지며 구역·구토를 경험한다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술 안 깨는 약의 기능을 유전자 속에 미리 장착하고 태어난 사람들이다. 비유하자면 한국인 열 명 중 한 명은 태어날 때부터 술 안 깨는 약을 매일 복용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며, 나머지 아홉 중 넷은 술 안 깨는 약을 반 알 정도 먹고 있는 셈이다. 술에 대해 지나치게 관용적이고 서로 음주를 권하는 사회에서 억지로 음주량을 늘리게 되는 수가 많지만, 술 안 깨는 유전자를 내장한 사람들이 음주를 계속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아세트알데히드는 그냥 얼굴만 빨개지고 머리가 아프게 만드는 물질이 아니라 공인된 1군 발암물질이다.

아세트알데히드는 세포의 DNA를 파괴해서 암 유발 위험을 높인다.

게다가 아세트알데히드가 간에서만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술을 마시면 우리의 입안과 장 속에 살고 있는 미생물도 알코올을 아세트알데히드로 분해하여 위험을 가중시킨다. 아세트알데히드는 엽산도 망가뜨린다. 엽산은 DNA와 RNA의 합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비타민으로, 부족하면 손상된 DNA의 복구에 문제가 생기고 암 유발 위험이 커질 수 있다. 이에 더해 알코올 자체도 자극성이 있어 위와 목의 점막을 손상시킨다 (도수가 센 술을 마시면 목이 화끈해지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이때 손상된 세포가 복구하려는 과정에서 자칫하면 암세포가 생겨날 수 있다.

얼굴 빨개지는 사람, 식도암 위험 6~10배 높아

2010년 미국국립알코올남용·중독연구소는 술을 마신 뒤 얼굴이 잘 빨개지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같은 양의 술을 마시더라도 식도 암에 걸릴 위험이 6~10배 높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연구팀은 얼굴이 빨개지는 사람이 음주를 자제하기만 해도 식도암 발병률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문제는 지나친 음주가 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는 사실은 막연히 알고 있지만, 식도암을 비롯한 각종 암의 위험이 증가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최근 들어 세계보건기구와 각국 정부기관이 앞장서 알코올의 발암 위험을 홍보하는 데 주의를 기울이는 이유다. 기왕 암 이야기가 나온 김에 다시 술 안 깨는 약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불행히도 디설피람은 음주 충동을 줄여주지 못하므로 단독으로 사용해서는 별 효과가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약에 항암 효과가 있다는 뜻밖의 사실이 밝혀졌다.

1971년 38세의 전이 유방암 환자가 디설피람을 복용하면서도 술을 끊지 못해 결국 술에 취해 창문에서 추락사하고 말았다. 그런데 부검 결과 골수에 약간의 암세포만 남고 뼈로 전이된 대부분의 종양이 사라졌던 것이다. 심한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사망 직전까지 10년 동안 항암치료를 중단하고 디설피람만 투여한 상황에서 이런 결과가 나왔으니 치료진이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술 안 깨는 약 디설피람의 항암 효과에 대한 과셔터스톡학자들의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약이 정확히 어떤 식으로 항암 효과를 나타내는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었고, 암치료에 이 약을 응용하려는 연구도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다.

뜻밖에 항암 효과 밝혀졌지만…

첫 사례 발표로부터 46년이 지난해 12월에 마침내 디설피람의 항암 효과에 대한 주목할 만한 소식이 들렸다. 덴마크·체코·미국 다국적 연구팀이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한 대규모 연구에서 디설피람에 항암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연구진에 따르면 디설피람을 계속 복용한 암환자의 사망률이 복용을 중단한 환자들에 비해 34% 낮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렇게 효과가 나타나는 이유는 동물실험을 통해 확인되었다. 디설피람과 구리 복합체가 암세포가 노폐물을 제거하는 과정을 방해해 불필요한 단백질이 축적되고, 결과적으로 암세포가 사망에 이른다는 것이다. 다행히 이런 청소 방해 효과는 정상세포보다 암세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알코올 중독 치료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잊혀져가던 약에 다시금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긴 했지만 디설피람이 기적의 암치료제가 될 가능성은 낮다. 연구자들도 암 자체의 치료보다는 전이 암환자의 생존 연장에 도움이 될 것인지를 알아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앞으로 좋은 소식이 들리기 바랄 일이다. 하지만 지금도 좋은 소식이 하나 있으니, 지나친 음주를 피하는 것만으로도 암 위험을 낮출 수 있다는 것이다.

정재훈 과학·역사·문화를 아우르는 다양한 관점에서 약과 음식의 이면에 숨겨진 사실을 탐구하는 데 관심이 많은 약사다. 현재 대한약사회 홍보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방송과 글을 통해 약과 음식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대중에게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정재훈의 식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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