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그랬지]③"너나 가져라"했다는 여의도

정다슬 2018. 2. 18.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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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 도는 오래된 이야기 중 하나가 "1층 여성 휴게실 파우더룸 쪽 자리에서 잠을 자면 가위에 눌린다"는 것이었다.

여의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국회의사당과 증권가지만 사실 여의도 발전을 가장 먼저 이끈 선두주자는 아파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여의도는 동쪽은 증권가, 서쪽은 국회의사당이 있는 돈과 권력의 상징적인 장소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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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정다슬 기자] 국회에 도는 오래된 이야기 중 하나가 “1층 여성 휴게실 파우더룸 쪽 자리에서 잠을 자면 가위에 눌린다”는 것이었다. 이 괴담은 실제 경험했다는 사람들의 증언이 더해지며 해를 이어 전해지고 있다. 이를 두고 몇몇 사람들은 “국회의사당 터가 본래 조선시대 궁녀들의 화장터라 풍수지리적으로 안 좋다”며 “그 귀신은 조선시대 궁녀의 넋”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 여의도가 궁녀들의 화장터였는지는 공식적인 문헌은 없다. 다만 여의도(汝矣島)의 원래 이름이 ‘너(汝)나 가져라’라는 뜻의 너섬이었다는 사실은 이곳이 모래와 바람만이 가득해 아무도 살고 싶지 않았다는 척박한 땅이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 (혹자는 ‘너도 섬이다’라는 뜻이라고도 한다)

여의도 개발을 위해 폭파되는 밤섬 [사진= 영등포구 포토소셜역사관 제공]
여의도 옆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 밤섬이 있다. 사실 이 섬은 1960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78가구 440여명이 거주하는 유인도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가 한강개발계획을 추진하면서 강폭을 넓히고 여의도를 개발하기 위해 밤섬 주민을 마포구 와우산 기슭으로 이주시키고 1967년 2월 10일 오후 3시에 밤섬을 폭파했다. 밤섬은 사라지고 그곳에서 채취된 돌과 자갈은 여의도 주위 제방도로인 ‘윤중제’를 닦는데 쓰였다.
△착공 13개월 만에 서울 여의도 시범아파트가 준공되었다.[사진=e영상기록관]
여의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국회의사당과 증권가지만 사실 여의도 발전을 가장 먼저 이끈 선두주자는 아파트였다. 여의도 확장공사가 끝나고 정부가 땅 분양을 하려고 했으나 당시만 해도 모래밭이던 이곳에 건물을 짓겠다는 사람들이 한 명도 없었다. 이에 서울시가 시범적으로 여의도에 고층 아파트 단지를 지어 보급한다는 계획을 세움으로써 1971년 우리나라 첫 고층(12층) 아파트인 시범아파트 1584가구가 지어진다. 시범아파트는 아파트로서는 처음으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됐고 스팀난방 등의 시설도 갖췄다. 당시 기존 아파트들이 사용했던 난방방식이 연탄난방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혁신적 변화였다. 모래사장뿐이던 여의도에 먼저 시범아파트를 짓고 입주자들의 수요에 따라 학교, 쇼핑센터, 라이프 시설이 갖춰지면서 여의도는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1975년 9월 1일 여의도에 있는 지금의 국회의사당이 준공되었다. 이전에는 중앙청 중앙홀, 태평로 시민회관 등이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었다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1967년 12월 27일 김종필 국회의장(당시 공화당)은 국회의사당 신축부지를 여의도로 결정하기로 한다. 본래 국회의사당은 지금의 태평로 서울시의회에 있었다. 그러나 너무 좁아 이전이 필요한 차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찍은 곳에 여의도였다. 일각에 따르면 그는 ‘정부를 견제하는 기관’인 국회를 청와대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뜨리길 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만 해도 국회의사당 터는 해발 190m 정도의 높이의 양과 말을 기르는 산인 ‘양말산’이었다. 윤중제 공사가 끝난 다음 해인 1969년 국회의사당은 기공해 6년 만인 1975년 8월 15일에 완공됐다. 또 남산에 있던 KBS는 1976년 12월에, 동양방송은 1980년에, MBC는 1982년에 여의도에 입성했다.

그렇다면 증권·금융가로서의 여의도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가장 큰 계기는 1979년 명동에 있던 증권거래소를 여의도로 옮긴 것이다. 이후 1982년 대우증권, 1985년 대신증권 등 주요 증권사와 투신·운용사들의 본사가 속속 여의도로 모여들었다. 물론 이 증권사들이 잇달아 본사를 옮기며 증권가로서 여의도의 위상은 많이 약화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여의도는 동쪽은 증권가, 서쪽은 국회의사당이 있는 돈과 권력의 상징적인 장소로 기억되고 있다.

정다슬 (yamye@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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