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늦기 전에.." '제주 4·3 사건' 70년 한 풀리나

김미희 2018. 2. 16.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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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데스크] ◀ 앵커 ▶

요즘 제주도에서는 4·3 사건 70주년을 맞아 유해발굴도 다시 하고 명예를 회복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합니다.

김미희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 리포트 ▶

제주시 조천읍의 한 해안가 마을.

감자밭이었던 도로 옆 '옴팡밭'은 당시 8살이던 고완순 할머니가 마을 어른들과 함께 끌려왔던 곳입니다.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유로 군인들은 어른 아이 구분없이 주민 300명 대부분을 여기서 살해했습니다.

[고완순/제주 4·3 생존자] "기관총 사격이 막 쏟아 붓는 거에요. 막 머리에 안 맞으려고 개미처럼 기다 보니까 피가 벌겋게 손에 묻은 거에요."

16살 농사꾼이었던 현창용 씨는 단 한 번에 끝난 군사재판에 20년간 수감됐습니다.

[현창용/제주 4·3 수형자] "좌도 모르고 우도 모르는 때인데…내 인생 망친 것 진짜로 내가 왜 잡혔는지 잡힌 이유가 무엇인지 지금도 몰라요."

1948년 4월3일 이후 제주도에서 이런 식으로 살해된 사람은 대략 3만여 명.

당시 제주 도민의 십분의 일 수준으로, 희생자 절반이 20대에서 40대였고 스무 살이 안 된 사람도 27%나 됐습니다.

생존자들은 트라우마와 빈곤에 시달렸습니다.

[허길자/제주 4·3 유족] "밖에 나무 품팔이해서 가면 돈 있는 집가면 돈 좀 주고, 돈 없는 집 가면 쌀 좀 떠줘서 그걸 가져다 또 끼니 살고…"

'빨갱이 가족'이란 낙인이 찍혀 공직 진출이나 취업도 어려웠습니다.

[김명원/제주 4·3 유족] "간부 후보생 시험을 내가 쳤어요. 쳐서 다 합격했는데 면접시험에서 제가 떨어져 버렸어요."

아이가 노인이 될 때까지 계속된 70년간 아픔.

진상조사보고서까지 나왔지만 이념갈등으로 정식 명칭도 갖지 못했습니다.

[박명림/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국가를 위한 헌신과 국가에 의한 희생은 국민 된 관점, 생명을 갖는 인간의 관점에서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화해와 상생'의 길을 통해 명예를 회복하자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습니다.

군인 경찰에 희생된 피해자 가족과 무장대에 보복 살해된 경찰 가족이 함께 추모식을 갖기도 합니다.

[배광시/제주 하귀리 주민] "시대가 그렇게 했고 또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해서 그렇게 됐는데 그 아픔을 왜 우리가 지금까지 지고 갑니까…"

봄이 되면 제주공항 근처 유해발굴이 10년 만에 재개됩니다.

[강창옥/제주 4·3 유족] "이 공항을 몇 번 돌아다녔는지도 몰라요. 지금 20년 전까지만 해도 그 자식이라고 말도 못 하고 다녔어요."

배보상금 지급과 군사재판을 무효로 하는 특별법 개정안이 발의된 가운데 다음 달부터 전국에서 '4·3 바로 알기' 행사가 대규모로 열릴 예정입니다.

MBC뉴스 김미희입니다.

김미희기자 (bravemh@imb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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