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민의 정치 인사이드]주류 교체 전쟁, '명분' 쥔 대통령..보수는 어떤 '무기'로 맞설까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 2018. 2. 15.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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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진보·보수의 진검승부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한국인들이 설이나 추석에 정치 얘기를 실제로 얼마나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꽤 많이 할 거라는 굳은 생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이 ‘추석 효과’니 ‘설 효과’니 하면서 그럴듯하게 설명해왔기 때문에 그런 가설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예 정치 얘기를 꺼내지 않는 집도 있을 텐데, 생각해보면 나름 합리적인 선택이다. 어차피 생각이 같으면 같으니까 할 필요 없고, 생각이 다르면 다르니까 할 필요가 없다. 사랑하는 가족이 만나 남의 일로 싸울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한국인들이 설이나 추석에 그 먼 길을 힘들게 와서 고작 하는 일이 “세상에 믿을 놈은 ‘우리’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라는 비아냥이 있지만, 우리만 그러는 건 아닌 모양이다. 데이비드 베레비는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에서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부족적 사고방식’은 본질적이고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뇌에 의한 마음의 산물이며 상황에 따라 좌우되는 인식의 문제일 뿐이라고 갈파했다. 그의 뛰어난 통찰은 ‘비슷한 사람들이 한패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한패가 되고 나서 비슷해진다’는 대목에 있다. ‘우리’는 한패이므로 ‘이견 없이’ 하나로 뭉쳐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들’과 싸울 수 있다.

무리짓기가 우리만의 것은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유난히 우리에 집착한다. ‘우리’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가족과의 싸움을 넘어, 온 나라를 ‘하나의’ 생각으로 일치단결시키기 위해 ‘피를 부르는’ 사상투쟁을 벌여온 수백년의 역사가 있다. 한국 철학을 연구한 일본의 오구라 기조는 (단 한 권의 책으로 한국을 일격에 ‘아웃’시키기 위해 쓴)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1998)의 후기에서 “이 책은 무엇보다도 한국에 대한 찬탄과 비판의 책이다. 이 책의 제목에 두 가지가 모두 들어 있다. 찬탄은 ‘철학’이라는 말에, 비판은 ‘하나’라는 말에 담겨 있다”고 썼다. 그는 이 책에서 “한국은 ‘도덕 지향성 국가’이다 (…)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한국인이 언제나 모두 도덕적으로 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도덕 지향성’과 ‘도덕적’은 다른 것이다. ‘도덕 지향성’은 사람들의 모든 언동을 도덕적으로 환원하여 평가한다”고 도발적으로 시작했다. 그는 한국과 일본의 2002년 월드컵 유치경쟁을 예로 들었다. “한국은 줄곧 ‘일본에는 메시지가 없다’고 주장했고, 일본은 줄곧 ‘공동개최는 전례가 없다’고 주장했다. 메시지란 대의명분이다. 메시지가 없는 자가 세계를 바꿀 수는 없다. 이것이 한국의 주장이다” “한국은 ‘월드컵을 한국(과 북한)에서 열면 남북통일과 동아시아의 평화에 기여한다’라는 장대한 기상과 대계의 의지가 넘치는 제언을 했다 (…) 이에 반해 일본은 불쌍할 정도로 소박하고 감각 지향적이었다. ‘한국이 일본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을 압도함으로써 일본인의 망언을 봉쇄한다’라는 것이 한국인의 바람이었던 데 반해, ‘세계 일류의 플레이를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것이 일본인의 욕망이었다. 일본인은 자기의 사적 욕망이 공적인 메시지가 될 수 있다고 오해하였고, 한국인은 사적인 욕망을 공적인 도덕으로 은폐하지 않으면 자기는 존재할 수 없다고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치컨설턴트로서 정치 캠페인의 목적을 ‘사적 욕망을 공적 이미지로 전환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해온 나로서는 오구라 기조의 날카로운 지적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 한국은 ‘국가’나 ‘민족’ 같은 거창한 대의 앞에 ‘개인’의 소박한 욕망은 결코 정치의 목적이 될 수 없는 ‘우리’의 나라다.

그의 아픈 공격은 계속된다. “조선 혹은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 여기에서 철학이란 ‘리’를 말한다 (…) ‘리’란 무엇인가? 보편적 원리이다 (…) 이 보편을 격렬한 논쟁에 의해 거머쥔 자가 권력과 부를 독점한다 (…) 여기에서 우리는 도덕을 지향해야 할 자들이 왜 돈과 권력을 둘러싼 암투에 기꺼이 가담하는지를, 그리고 그와 같은 싸움의 강렬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 ‘도덕 지향성 국가’인 한국에서 도덕의 최고 형태는, 도덕이 권력 및 부와 삼위일체가 된 상태라고 여겨지고 있다.”

오구라 기조의 놀라운 통찰은 조선 시대 지식인의 이미지 유형(선비, 사대부, 양반)으로 오늘날 한국 정치의 부도덕을 신랄하게 비판한 바로 이 대목이다. “유교에서는 도덕과 권력과 부는 이상적으로는 삼위일체여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이 삼위일체는 절망적일 정도로 불가능에 가깝다. 왜냐하면 도덕은 권력과 부와 결합되는 순간 (…) 쉽게 부도덕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도덕 쟁탈전이 전개된다. 이것은 도덕을 내세워 권력을 잡은 세력이 얼마나 도덕적이지 않은가를 폭로하는 싸움이다.”

‘선비’는 권력과 부를 가까이하는 것을 거부하고 오로지 학문의 세계에 침잠하여 이상(도덕)을 추구하는 자다. 역사상 선비 이미지의 대표적 인물은 이퇴계이고, 현대 정치에서는 1970~80년대의 ‘재야 지식인’들이다. ‘사대부’는 관료이자 지식인이다. 권력을 지향하지만 부와는 선을 긋는다. 조선에서는 ‘사림’이나 ‘신진사류’ 등이 주자학을 받들면서 수구세력과 전면전을 벌였는데 이들이 전형적인 사대부의 이미지다. 인물로 말하면 이율곡이 대표적이다. 1990년대 김영삼·김대중에 의해 발탁된 ‘개혁파 정치인’들이 현대판 사대부라 할 만하다. ‘양반’은 도덕과 권력에 부까지 거머쥔다. 기득권의 상징으로 오늘날 대부분 정치인의 원형이다.

‘물질적 권위’와 ‘정신적 권위’를 모두 다 갖겠다는 것이 한국의 0.1%가 사는 독특한 방식이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에 대해 ‘정권’을 잡은 것이 아니라 ‘이권’을 잡았다는 신랄한 비판이 있었지만 이런 비판은 보수 정권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뿌리 깊은 문화다. 지금은 선비도 없고, 사대부도 없다. 돈과 권력을 가진 배부른 양반들이 도덕까지 지배하는 시대다. 정치는 비즈니스가 되었다. 학자, 기자, 법조인, 종교인, 작가, 시민운동가도 이제는 정신적 권위에 만족하지 않고, 권력과 부를 좇는다. 정체성이 약하니, 윤리도 염치도 없다. 사회를 향한 ‘통찰’도 없고, 자신을 향한 ‘성찰’도 없으면, ‘현찰’만 챙기기 마련이다. 모두가 ‘직’만 좇을 뿐, ‘업’을 지키지 않는다.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은 많으나 (정치를 하는) 정치인은 보기 어렵다.

한국에서는 ‘리’의 중추로부터 배제되는 쪽은 ‘리’를 장악하는 쪽에 의해 가혹하게 지배받는다. 그러므로 지금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가 벌이는 ‘리’의 쟁투는 대한민국 최초로 주류 교체를 걸고 벌이는 진검승부다. 비주류의 선봉에 선 문재인 대통령은 두 개의 역사적 전쟁을 동시에 치르고 있다. 안으로는 ‘적폐청산’의 ‘리’를 들고 ‘대한민국의 주류 교체’라는 큰 전쟁을 치르고 있고, 밖으로는 ‘한반도 평화’의 ‘리’를 들고 국가의 명운이 걸린 생존 싸움을 하고 있다. 이 정도의 전선을 동시에 맞은 대통령은 문재인이 처음이다. 둘 다 위험한 전쟁이다. 하나라도 패배한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성공할까? 두 싸움 모두 국민적 지지가 관건이다. 여론은 일단 유리하다.

전례 없이 전력이 강화된 상대를 맞아, (김대중, 노무현에게 정권을 빼앗겼을 때도) 주류였던 (전통적) 보수는 반격에 성공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 정권을 잃은 것이 아니라 (세상을 지배하는 대의명분인) ‘리’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보수의 사상·이념·비전·이론·정책이 국민적 동의를 잃고 있다. 매력 있는 인물도 없는데, 조직은 사분오열됐고, 메시지는 설득력이 약하다. 지역·이념·세대·계층의 전선에서 보수는 주류에서 비주류로, 상수에서 변수로 전락하고 있다. 정치의 기본적인 네 가지 전선, 즉 혁신 대 기득권, 새로움 대 낡음, 미래 대 과거, 통합 대 분열에서 보수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뒷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고객이 갖기를 원하나, 자기들은 만들 수 없는 것’을 파는 시장에서 보수는 ‘고객이 갖고 싶은’ 매력 있는 상품이 (과거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고, (설사 있다 하더라도) 자기들보다 더 잘 만드는 경쟁사가 있는 몰락한 회사 신세다. 예컨대 스마트폰 시장에서 삼성과 애플에 고객을 다 뺏긴 노키아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는 여전히 ‘자기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믿고 있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세상이 자기를 어떻게 보느냐’인데.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혁신은 없다.

위기를 극복하려면 ‘위기에 동의하는가?’ ‘원인을 아는가?’ ‘해결책이 있는가?’ 세 질문 모두에 ‘그렇다’라는 답이 있어야 하는데 아직은 그런 절박감이 보이지 않는다. 만약 오늘 여론조사에서 ‘정권교체에 동의하는가?’ ‘야당이 대안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두 질문 모두에 ‘아니다’라는 답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이길 수가 없다.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을 놓고 ‘좋아해서 찍는다’ ‘필요해서 찍는다’ ‘상대가 싫어서 찍는다’라는 선택을 묻는다면 이것 역시 지금은 민주당이 압도적일 것이다. ‘(안보를 맡길 만큼) 강한가?’ ‘(정책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가?’ ‘(약자와 서민을) 돌봐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도 민주당에 대한 지지가 높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동안 보수 정당을 지지하고, 보수 후보를 찍어온 ‘중도 보수’가 동맹에서 이탈하고 있는 것이 결정적 위기다. 안철수와 유승민의 바른미래당이 지방선거에서 (중도 보수의 지지를 놓고 경쟁하는) 자유한국당을 주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상황이라 반민주 연대도 쉽지 않다. 보수의 적자가 목표인 유승민과 자신이 정치하는 두 가지 이유가 다당제 실현과 자유한국당 소멸에 있다는 안철수의 신념이 일치하기 때문에 분열된 보수로서는 (적어도 지방선거에서는)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에 맞서기가 버겁다.

‘한반도 평화’와 ‘대한민국의 주류 교체’의 주역이 되려는 문재인 대통령이 원대한 꿈을 이루려면 두 가지를 해내야 한다. ‘영남주류교체’와 ‘정권재창출’이다. 정권재창출에 실패하면 어떤 후과가 있는지는 문재인 대통령의 머리와 뼈에 깊이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영남의 비주류였던 노무현과 문재인의 오랜 숙원은 영남의 주류가 되어 그 기반으로 대한민국의 주류를 바꾸는 것이다.

다시 맞이하기 어려운 절호의 기회가 왔다. 쫓기는 적에게 숨 돌릴 틈을 주지 말라는 것이 병법의 기본이다. 대한민국 정치의 상수였던 TK와 광주·전남이 정치의 변수로 바뀐 틈을 타 PK와 충청이 정치의 중심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지난 대선의 주요 주자들이 두 곳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PK와 충청은 이미 주인이 바뀌었고,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대구도 치열한 3파전 구도라면 누가 승리할지 알 수 없다.

‘보수의 심장’ 대구가 흔들리고 있다. 자유한국당의 홍준표 대표가 “서울시장은 (민주당에) 내줘도 대구시장을 내주면, 자유한국당은 문을 닫아야 한다”며 배수진을 치자 바른미래당과 민주당도 “그렇다면 자유한국당의 문을 닫게 해주겠다”고 호응했다. 바른미래당 유승민 대표는 “영남 보수는 한국당이 과연 자기들을 떳떳하게, 자랑스럽게 대표하는 정치세력이냐에 대해 회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자유한국당과 보수적자의 정면승부를 선언했다. 이번 대구시장 선거는 그저 하나의 단체장 선거가 아니다. 자유한국당의 존폐를 뛰어넘어 수백년간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해온 (보수적) ‘리’의 본거지가 무너지는 것이다. ‘한반도 평화’와 ‘적폐청산’의 ‘리’로 무장한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에 한국의 보수가 무슨 ‘리’로 맞설 것인가. 대구시장 선거는 ‘리’와 ‘리’가 최후에 충돌하는 한국의 아마겟돈이다. 이번 지방선거의 최전선은 대구다.

▶박성민 1991년 설립한 정치컨설팅그룹 ‘민’의 대표이자, 한국의 대표적인 정치컨설턴트다. 30년 이상 선거를 치르면서 익힌 감각과 예리하고 독창적인 시각을 평가받고 있다. 정치게임에서 승리하는 법칙을 담은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긴다> <정치의 몰락> 등을 썼다.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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