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지원 5번 신청하다 '녹다운'.. 한 스타트업 대표의 좌절기

임현우 2018. 2. 12.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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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출 작아서, 신용 낮아서, 공대 출신 아니어서.. 줄줄이 거절
"회수 가능성만 따져.. 갓 창업한 초기 기업에는 그림의 떡"

[ 임현우 기자 ]


“정부의 창업 지원금을 받아보려 여기저기 뛰어다니다 어찌나 진이 빠지던지요.”

잘 다니던 금융회사를 관두고 2년여 전 핀테크(금융기술) 스타트업을 창업한 A 대표. 그는 최근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모인 한 토크 콘서트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정부의 창업 지원금 제도 때문에 고생했던 얘기를 털어놨다. A 대표의 ‘뺑뺑이 경험담’을 듣던 동료 창업자들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거의 비슷한 경험을 지금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① 신용보증기금, 신용등급 낮아서 거절

법인을 세운 직후 A 대표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신용보증기금이었다. 바로 딱지를 맞았다. 창업 초기자금을 조달하면서 제2금융권에서 대출받았던 이력이 문제였다. 심사 담당자는 “제2금융권 대출 등으로 신용등급이 떨어지면 결격사유”라고 했다. “금융사에서 일했다는 분이 왜 신용 관리를 이렇게 했느냐”는 타박까지 들었다.

“제2금융권 대출을 받고 싶어 받았겠습니까. 직원들 월급이 밀리게 생겨 어쩔 수 없었거든요. 어떤 용도로 받은 건지 물어보기라도 했다면 좋았을텐데….”


② 기술보증기금, 매출이 없어서 실패

다음으로 기술보증기금의 문을 두드렸다. 첫 질문은 ‘특허가 있느냐’였다. 한 건을 갖고 있다고 답했다. 두 번째 질문은 ‘매출이 얼마나 되느냐’였다. 이제 막 시작한 회사에 매출이 나올리 없었다. 세 번째 질문은 ‘공대 나왔느냐’였다. 아니었다. 기보 담당자는 “매출이 입증돼야 하고, 대표가 엔지니어 출신이어야 한다”며 지원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상담하는 동안 계속 ‘거절의 근거’를 찾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른 창업 멤버들은 어떤 경력이 있는지, 사업모델에 어떤 기술이 반영되는지는 묻지 않더군요.”

③ 중소기업진흥공단, 예약 잡기부터 빠듯

이번엔 중소기업진흥공단의 예비창업자 대상 지원자금을 신청해보기로 했다. 여기선 상담 예약을 잡기부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전화나 인터넷 예약은 불가능했다. 오전 6시부터 줄을 서 기다렸다가 번호표를 뽑아야만 창구 담당자와 마주앉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서류를 내고 최종 심사까지 올라가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곳에서도 제2금융권 대출 이력이 발목을 잡았다.

“예비창업자를 위한 지원이었지만 심사자들은 회수 가능성을 가장 우선시했습니다. 정부 자금이고 엄연히 대출이라는 이유에서였죠.”


④ 서울산업진흥원, 빽빽한 계약서에 포기

서울산업진흥원의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에서는 최종 심사의 문턱을 넘었지만, A 대표는 지원을 받지 않기로 했다. 계약서가 어찌나 빼곡한지 읽기가 버거울 정도였고 ‘독소조항’으로 느껴지는 대목도 곳곳에 눈에 띄었다. 상환전환우선주(RCPS) 등의 조건도 부담스러웠지만 무엇보다 모든 사업 진행 상황을 진흥원 측에 수시로 보고해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민간 벤처캐피털은 초기 종잣돈만 투자한 단계에서는 세세한 것에 간섭하지 않는다”며 “경영 간섭이 너무 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스타트업이 지원을 원하는 이유는 본업에 집중하고 싶어서잖아요. 자칫하면 서비스 개발보다 서류 작업에 매달리게 될 것 같아 포기했습니다.”

⑤ 중소기업청, 기존 직원 인건비론 못써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중소기업청의 선도벤처연계기술창업 지원사업에 도전했다. 다행히 심사를 통과해 1억원가량을 받았다. 그러나 A 대표는 “이 자금이 실제로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사용처에 이런저런 제한이 많았던 탓이다.

당시 이 회사는 서비스 출시를 앞두고 10여명의 직원을 뽑아둔 상태였다. 하지만 선도벤처 지원자금은 이미 채용한 직원의 인건비로는 쓸 수 없었다. 인건비로 지출하려면 신규 채용을 해야 했다. 그것도 계약직은 안 되고 정규직만 인정됐다. 결국 다른 사용처를 찾아내 회계처리를 무사히 마치긴 했지만, 정작 필요한 곳에 쓸 수 없다는 점이 못내 아쉬웠다고 했다.

“초기 IT 스타트업에 가장 절실한 문제는 인건비거든요. 고용 창출을 장려하려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직원을 필요 이상으로 뽑으면 나중에 감당할 자신이 없었어요.”


힘들어하던 A 대표를 ‘구원’해 준 것은 한 엔젤투자자였다. 사업계획서를 훑어본 그는 첫 미팅이 끝난 후 34시간 만에 5억원을 입금해줬다. A 대표가 구상한 사업모델에 자신도 오래 전부터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이 투자를 유치하고나서는 정부 지원을 받기도 한결 수월해졌다. A 대표는 벤처기업 인증에서 가점을 받을 목적으로 과거 탈락했던 중진공의 창업지원자금을 다시 신청했는데, 곧바로 통과했다.

그는 “내가 경험한 모든 정부기관은 ‘국민 세금이기 때문에 함부로 운용할 수 없다’는 논리를 강조했다”며 “회수 가능성을 최우선으로 따지다보니 갓 창업한 기업에는 사실상 도움이 안 됐다”고 꼬집었다. 정부 지원이 어느정도 검증된 스타트업에 집중되면서 ‘받는 곳이 계속 받는’ 부작용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지원금이 눈먼 돈처럼 쓰이는 일을 막으려면 철저한 심사가 필요하다는 점은 A 대표도 동의한다. 그러나 같은 기관에서도 어느 직원을 만나느냐에 따라 거절 사유가 달라지기도 하는 등 납득하기 어려운 일을 여러 차례 겪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에 이어 문재인 정부의 ‘혁신성장’ 기조에 맞춰 스타트업 지원 예산은 해마다 늘고 있다. A 대표는 “투자금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초기 기업이 체감하는 어려움은 2~3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고 했다.

A 대표의 회사는 다행히 서비스 출시 이후 가입자를 늘리며 차근차근 성장하고 있다. 그는 이날 토크 콘서트에서 “스타트업 하기 여전히 힘든 환경이지만, 까인다고 절대 좌절하지 말자”며 동료들에게 기를 불어넣었다. 자신의 씁쓸한 경험담이 ‘먼 옛날 얘기’가 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것이 A 대표의 바람이다.

임현우 기자 tardis@hankyung.com

≪이 기사는 스타트업·테크 전문 사이트 ‘엣지’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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