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가 비난받는 유일한 범죄 '성폭력'

박보희 기자 2018. 2. 10.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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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 [Law&Life-말할 수 없는 이유 ①] "'당했다' 말해봤자 불이익만".."성범죄 입증 못하면 '무고죄'라는 판결은 문제"


"나도 당했다."

'미투'(Me Too) 열풍이다. 서지현 통영지청 검사가 안태근 전 검사장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뒤 곳곳의 성추행 피해자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 등 외국의 '미투'와는 차이가 있다. 여전히 자신의 이름을 숨긴 익명 폭로가 대부분이라는 점에서다.

적잖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폭로 후 2차 피해를 입는다. "왜 이제야 털어놓느냐. 다른 목적이 있는 것 아니냐"는 식의 비아냥이다. 성폭력은 피해자가 비난받는 거의 유일한 범죄다.

◇2명 중 1명 "당해봤다"… "말해봐야 달라질 것 없어 '침묵'"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윤정숙·박미숙 연구원이 지난 1월 펴낸 '성희롱(성추행·성폭행 포함) 실태 분석과 형사정책적 대응방안 연구보고서'에 담긴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1150명)의 45%가 성희롱 피해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 가운데 54%는 특별한 대응을 하지 않았다. 사내기구에 신고한 이들은 11.9%, 외부기구에 신고한 이들은 8.3%에 불과하다. 5%의 응답자는 회사를 그만뒀다.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이들은 그 이유를 △가해자와의 관계를 생각해서(45.6%) △대응을 해도 달라질 것 같지 않아서(36.3%) △신고하면 직장에서 불이익을 받을 것 같아서(30.6%)라고 답했다. 회사는 계속 다녀야 하는데 말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고 오히려 불이익을 당할 것 같아 참았다는 얘기다.

직장 내 성희롱은 '남녀고용평등법'을 적용, 조직의 조치와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법 제14조는 직장내 성희롱이 발생할 경우 행위자 징계 등 조치를 하고 피해자에게 해고 등 불리한 조치를 못하도록 정해뒀다. 사업주가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500만원 이하 과태료를, 피해자에게 불리한 조치를 했을 경우 3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문제는 현장에서 제대로 된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15년 발표한 '성희롱 2차 피해 실태 및 구제강화를 위한 연구'에 따르면 인권위에 접수된 성희롱 진정·상담 사례 68건 중 26건은 성희롱 발생을 기관 책임자에 알렸지만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피해자에 대해 나쁜 소문이 돌거나 협박을 받은 사례가 15건, 피해자가 회사를 그만둔 사례가 10건, 피해자가 징계나 해고를 당한 사례도 17건에 달했다.

직장내 성희롱 사건을 맡은 경험이 있는 A 변호사는 "사업주가 분리조치를 했지만, 알고보니 부서만 바뀌었을 뿐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해 피해자와 가해자가 마주칠 수 밖에 없는 사례도 있었다"며 "회사가 책임을 피하기위해 형식적으로 대응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고소했지만 혐의 입증 어려워…무고·명예훼손 역고소 당하기도

사내에서 해결하지 못한 피해자가 의지할 곳은 사법기관이다. 하지만 '언어적' 성희롱은 형사처벌 대상이 아니다. 강제추행이나 성폭행 등은 형사처벌 할 수 있지만 입증 책임은 결국 피해자에게 넘겨진다. 직접 증거나 목격자가 없는 경우, 또 목격자가 있어도 불이익 등을 우려해 나서지 않을 경우 입증은 어렵다.

사법기관의 인식도 걸림돌이다. 윤정숙·박미숙 연구원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교직원 회식 자리에서 여교사에게 술따르기를 강요한 사건'에 대해 남성의 77%, 여성의 90.5%가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답했다. 2006년 대법원은 이를 성희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두 연구원은 "사법기관과 일반인의 성희롱 판단 사이 간극이 존재할 수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며 "대법원은 성희롱을 '건전한 상식과 관행에 비춰 일반적인 사람이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행위'라 했지만 설문조사를 보면 일반인의 인식과 판결이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피해자가 피해를 입증하지 못하면 화살은 피해자에게 돌아온다. 가해자로 지목됐지만 증거 부족으로 불기소처분, 무죄 판결을 받은 이는 무고나 명예훼손 등으로 피해자를 역고소하기도 한다. 무고는 '상대가 형사처벌을 받게할 목적으로 허위사실을 신고하는 죄'다. 실제 성추행으로 고소당했지만 증거부족으로 무혐의결정을 받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무고로 고소해 유죄를 받아낸 사례도 적지 않다. 일반인에 비해 성폭력에 관대한 인식을 가진 법원의 '무죄' 판단이 '성범죄 피해자'를 '무고 가해자'로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성폭력 피해자 변호 경험이 많은 B변호사는 법원의 '이중 잣대'를 지적했다. B 변호사는 "범죄 혐의입증을 못했다고 무고인 것은 아니다"며 "실제 일어난 일이라도 입증을 못하면 무죄가 나올 수 있는데 '성범죄가 입증되지 않으면 무고'라는 식의 판결이 나오는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범죄 혐의 입증을 못했다고 무고죄라고 한다면 어떤 범죄 피해자가 신고할 수 있겠느냐"며 "성범죄에 엄격한 잣대를 적용한다면 무고 역시 엄격하게 판단해야 한다. 성범죄를 막기 위해서는 피해자가 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보희 기자 tanbbang15@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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