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시 한수] 서베리아에서 살아남기

전새벽 2018. 2. 9.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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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새벽의 시집 읽기(1) 현역 때는 틈틈이 이런저런 책을 통해 필요한 정보들을 얻었다. 인터넷 사용법부터 블록체인에 이르기까지. 은퇴 후에는 조금 다르다. 비트코인과 인공지능보다는 내 마음을 채워줄 따뜻한 말 한마디가 더 필요하다. 어쩌면 시 읽기가 그것을 도와줄지도 모른다. 중장년층에 필요할 만한, 혹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시를 소개한다. <편집자>
남극 세종기지에서 보다 더 춥다는 서울. 서울 중구 청계천변 바위에 얼음이 얼어붙어 있다. [사진 뉴스1]
서울에 새 별명이 생겼다. ‘서베리아(서울+시베리아)’란다. 시베리아만큼 춥다는 얘기다. 얼마 전에는 남극 세종기지에서 돌아온 연구원이 “한국이 더 춥다”고 SNS에 글을 남겨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원고를 쓰는 지금도 바깥에는 귀를 도려낼 듯한 찬바람의 기세가 매섭다.

고독하면 더 춥단다. 토론토 대학의 한 연구진이 밝혀냈다. ‘고독함’이 실제로 사람의 체온을 떨어트린다고 말이다. 요즘 같은 날씨에 고독했다가는 얼어 죽기 십상이라는 얘기다. 그러니까 우리 고독한 사람 특유의 ‘쿨함’ 뽐내는 건 여름으로 살짝 미루어두고, 올겨울은 어떻게든 고독함을 밀어내자.

그런데 어떤 것을 밀어내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아야 하는 법, 그렇다면 고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먼저 알 필요가 있겠다. 당최 고독이란 무엇인가? 시 읽기를 통해 배운다.

뜯어먹기 좋은 빵. 노혜경 지음.
공원길을 함께 걸었어요 나뭇잎의 색깔이 점점 엷어지면서 햇살이 우릴 쫓아왔죠 눈이 부시어 마주보았죠 이야기했죠 그대 눈 속의 이파리는 현실보다 환하다고

그댈 사랑한다고 말하기가 어려워 나뭇잎이 아름답다고 했죠 세상 모든 만물아 나 대신 이야기하렴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그러나 길은 끝나가고 문을 닫을 시간이 있죠

그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기 위하여

나뭇잎이 아름답다고 했죠

- 노혜경, <고독에 관한 간략한 정의> 부분, 시집 <뜯어먹기 좋은 빵(세계사, 1999)> 수록

시인은 함께 걷는 이에게 애틋함을 느꼈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끝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쑥스러웠는지 어쨌는지 애꿎은 나뭇잎 타령하다 산책은 끝났다.

이것을 가리켜 시인은 ‘사랑에 관한 간략한 정의’라 하지 않고 ‘고독에 관한…’이라고 했다. 그는 결국 고독해진 게다. 왜? 사랑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렇게 되어 버렸다.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 오츠 슈이치.
1천 명 환자의 임종을 지킨 일본의 호스피스 전문의 오츠 슈이치가 쓴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에 따르면, 사람들이 죽기 전 가장 많이 하는 후회는 이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했더라면.'

어려운 일은 아니다. 돈이 드는 것도, 특별한 장비나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구두로도 필담으로도 눈빛이나 스킨십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참 많은 사람이 그 말을 못한 것을 후회하며 죽는 모양이다.

오늘 당장 사랑하는 사람한테 말을 걸 일이다. 가서 사랑한다고, 참 고마운 일이 많노라고 정확히 말할 일이다. 겸연쩍다는 이유로 나뭇잎이라던가 그런 얘기나 했다간 끝내 얼어 죽고 말 테니.

이곳, 서베리아에서 말이다.

■노혜경 시인

「-1958년 부산 출생 -1991년 「현대시사상」

으로 등단 -시집 <뜯어먹기 좋은 빵>, <말하라, 어두워지기 전에> 등 출간」

전새벽 회사원·작가 jeonjunhan@naver.com
비트코인의 탄생과 정체를 파헤치는 세계 최초의 소설. 금~일 주말동안 매일 1회분 중앙일보 더,오래에서 연재합니다. 웹소설 비트코인 사이트 (http://news.joins.com/article/22335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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