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은 돌출적 존재, 무조건 매도는 말아야"

신준봉 2018. 2. 9.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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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김병익이 보는 미투 논란
도덕과 예술은 배반하는 경우 많아
SNS 폭로 따른 세상 속류화 걱정
원로 문학평론가 김병익씨가 고은 시인의 성추문 파문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는 ’행적은 단죄하되 시인의 예술까지 매도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중앙포토]
최영미 시인의 폭로로 촉발된 고은(85) 시인의 과거 성추문 파문이 거세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단골 거론되는 시인의 명망이 소셜네트서비스(SNS) 상의 성역 없는 고발행렬로 하루 아침에 침몰하는 모양새다. 시인의 폭로된 행적 자체는, 제기된 내용이 사실일 경우, 윤리·도덕적으로 옹호되기 어렵다. 하지만 감정에 치우친 단죄는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한다. 정치적, 도덕적인 올바름이 지배하는 멸균 공간에서 과연 의미 있는 문학작품이 생산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문학과지성사를 설립한 ‘문지 4K’ 중 한 사람인 문학평론가 김병익(80)씨가 8일 이번 파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는 “미투 운동에 동의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존경할 만한 것을 할퀴어 가치가 전도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자신의 진의가 왜곡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Q : 고은 시인의 성추문 파장이 크다.

A : “내가 늙고 보수적인 사람이라 그런지, 뛰어난 예술가들의 업적은 존중하되 그들의 약점이나 실수는 보호하는 사회적 미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치 없던 일이 생긴 것처럼 새삼스럽게 까발리는 게 과연 좋은 일인가 싶다. 고은 선생은 옛날부터 술좌석에서 시끄럽고 난잡스러웠다. 그건 새로운 얘기도 아니다. 갈수록 세상이 속류화되는 것 같다.”

Q :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거론된 분이라 사람들의 충격이 큰 것 같다.

A : "예술에서 도덕적 청렴함이 반드시 플러스가 되는 건 아니다. 뛰어난 예술가들은 스스로의 약점, 욕망, 좌절 같은 것 때문에 예술이 오히려 깊어질 수 있다. 잘못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깊게 하고,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사례를 뛰어난 예술가들에게서 많이 본다. 실수나 좌절감, 혹은 주체할 수 없는 욕망 때문에 스스로 성찰하고 깊이 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고, 그런 고통을 통해 만들어진 작품에서 한 작가의 위대성이 드러난다. 미투 운동과 관련해 가령 출판사 사장이 책 내준다고 꾀어 여성 문인을 어떻게 했다면 그건 문화권력을 이용한 거니까 지탄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예술가의 광기와 열망, 좌절감이나 감정의 분류(奔流)에 의해 발생한 어떤 사태에 대해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그의 문학까지 비난한다든가 사회적으로 공개 힐난하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Q : 예술가가 면책의 존재는 아니다.

A : "과거 프랑스의 극작가 장 주네(1910~ 86)는 남색질, 도둑질, 강간을 저질렀다고 고백했다. 그런데도 사르트르는 장 주네를 세인트 주네라고 부르며 그에 대한 700쪽 분량의 연구서를 썼다. 고은 시인이 잘했다는 게 아니다. 예술과 도덕은 같이 가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로 배반하는 경우가 더 많다. 도덕적 비판이 한 사람의 예술이나 업적을 할퀴어 찢어버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Q : 시인의 문학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됐다.

A : "그는 젊어서 여러 차례 자살을 기도할 만큼 세계의 허망함을 깊이 느꼈고, 1970년대 중반 유신 시절 반정부 투쟁을 지휘했다. 그런 모습이 시인의 본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우회적으로 시인의 내면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최영미 말대로 수돗물 틀면 쏟아지듯 숱한 시를 썼는데, 단박에 깨닫는 불교의 돈오(頓悟)적 일갈이 섬광처럼 번득이는 시도 많다. 타작도 많지만 시에 대한 열정, 그것을 드러내는 형식의 분방함을 높이 평가한다. 얌전한 한국 시단에서 돌출적인 존재이고 시의 역사에서 존중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Q : 그렇더라도 일탈을 눈감아야 한다는 데 동의하기 어렵다.

A : "내 의견에 동의해달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에 대한 사회적 비판을 멈추어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너무 벗겨서 드러내기보다는 알면서도 모른 척 지나가는 그런 관대함이랄까, 그런 것도 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너무 시시콜콜 다 드러내고 폭로하고 비난하면 세상이 좀 살벌해지고 여유가 없어지는 것 같다. 우리가 이렇게 일거수일투족 조심하다 보면 과연 뭘 할 수 있을까 싶다.”

Q : 페이스북 같은 SNS는 ‘즉결심판’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효과가 즉각적이다. 순기능은 물론 역기능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A : "SNS든 인터넷이든 그게 좋다 나쁘다, 를 말하기 전에 그런 문화, 문명으로 가는 걸 피할 수는 없다. 아날로그 시대와 달리 디지털 시대에는 가볍고 다급하게 소문이 나돌고 그것 때문에 영웅과 피해자가 쉽게 뜨고 진다. 이번 일도 아마 몇 주 지나면 슬그머니 없어지고 말지 모른다. 세상이 빨라지고 경쾌해진 만큼 도덕적인 판단이나 심리적인 발언도 그만큼 다급해지고 경솔해질 수 있는데, 나 같은 아날로그 세대는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Q : 과거에 비해 세상이 달라졌다.

A : "달라져야 하고, 많이 달라졌다. 갈수록 옛날처럼 여성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거고, 그래서 점차 양성평등의 사회로 나아가지 않을까. 그런 방향에 대해 나는 찬성한다. 다만,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렇다고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가치까지 마구 할퀴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 페이스북 달구는 고은 논란

「 시인 이승철
시인 이승철
문단에 만연한 성추행이라니 (…) 메이저 출판사와 무소불위의 평론가들의 묵계를 강조하면서 그녀(최영미)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남발했다 (…) 남자의 성적 욕망이란게 얼마나 무서운가. 그리고 그 욕망의 피해자가 받는 고통은 또 얼마나 지속적이고 치유 불가능한가. 그걸 최영미 발언을 통해서 확인해본다. 허나 미투 투사들에 의해 다수의 선량한 문인들이 한꺼번에 도매금으로 매도되는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시인 류근
시인 류근
암울했던 시대에 그가 발휘했던 문학적 성취와 투쟁의 업적은 여기서 내려놓고 이야기해야겠지. 그의 온갖 비도덕적인 스캔들을 다 감싸 안으며 오늘날 그를 우리나라 문학의 대표로, 한국문학의 상징으로 옹립하고 우상화한 사람들 지금 무엇 하고 있나 (…) 위선과 비겁은 문학의 언어가 아니다 (…) 눈 앞에서 보고도, 귀로 듣고도 모른 척한 연놈들은 다 공범이고 주범이다.
시인 임동확
시인 임동확
한 원로시인이 ‘괴물’로 둔갑했다 (…) 하지만 (일반인들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신들이 최소한 시인이라면 여기에 쉽게 ‘부화뇌동’하지 말라. 그러니까 적어도 시인은 ‘진실’을 단정하고 확정짓는 자들이 아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 ‘진실’이 무엇인지 묻는 자에 속한다.
시인 이철경
시인 이철경
이번 일로 대다수 시인이 독자에게 또다시 혹독한 지탄을 받지 않을까 심히 우려되지만 터질게 있으면 터트려야 합니다.

문학평론가 김명인

문학평론가 김명인
강자의 명예가 중하면 약자의 명예도 똑 같이 중한 세상이 되었다. 아니 더 나아가 약자의 명예가 더 무거운 세상이 되었다. 그 동안 받은 고통의 중압까지 쳐서 계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판이 바뀌는 중이다. 이제는 누구도 함부로 다른 존재를 사물화하거나 타자화할 수 없는 세상이 오고 있다. 」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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