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인사이드] 세 살 '정서장애' 여든까지.. 제때 돌봐야 극단선택 막는다

남혜정 2018. 2. 3.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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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아동·청소년 정신건강 '빨간불'/선진국들 대책 마련 고심/"완벽주의 성향에 많이 나타나" 분석/경쟁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인식 때문/SNS로 생긴 상대적 박탈감도 한몫/영국 5∼16세 10명 중 1명이 질환/왕실이 앞장서 자선재단 설립 운영/학생 정신건강 상태 확인·정보 공유/우울증 시달리던 10대들 잇단 자살/美, 위기센터·교과과정 만들어 관리/호주는 관련 분야에 950억원 지원

“우리 아이들의 정신건강 문제를 지금부터 잘 관리해야 한다.”

케이트 미들턴 영국 왕세손빈은 지난달 23일(현지시간) 런던 브랜트의 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위한 정신건강 증진 프로젝트인 ‘정신 건강학교’(Mentally Healthy Schools)를 발표하며 이같이 말했다. 아이 때 발생한 문제를 잘 풀어야 성인이 돼서 겪을 수많은 난관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영국 왕실재단 지원으로 시작된 이번 프로젝트는 영국 내 정신건강 문제 해결과 정신질환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개선하기 위한 ‘헤즈 투게더’(Heads Together) 운동의 일환이다. 헤즈 투게더는 2016년 5월 윌리엄 왕세손 부부와 해리 왕자가 합심해 만든 자선재단이다.

◆“어린 시절 정신건강 문제, 어른까지 이어져”

1일 영국 하원이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치매를 제외한 정신건강 문제를 겪고 있는 성인 상당수가 어린 시절부터 정신질환에 시달린 것으로 나타났다. 구체적으로 문제가 된 성인의 50%는 15살 이전부터, 75%는 18세 이전부터 정신 질환을 앓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에 정신 건강학교는 학생들의 정신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정신건강 증진을 도모하기 위해 웹사이트를 통해 여러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특히 해당 사이트가 다루고 있는 1500여개 이슈들은 품질 보증단이 평가하고 재검토한 내용이다. 일선 학교에서 이런 내용을 시범 운영하고 있는데, 올봄에 각 이슈에 대한 성과가 공개될 예정이다.

전 세계 각국도 아동·청소년의 정신건강 문제에 대한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상당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는 정신건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관리하고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하고 있다.

◆갈수록 악화하는 아동·청소년의 정신건강 문제

구체적으로는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아동·청소년이 늘면서 이들의 정신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미국에서는 지난달 11일 오하이오주 페리 지역의 학교에 다니는 15세 소년이 자살했다. 15세 소년의 부모는 “아들이 죽기 전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했다”며 “나중에 보니 아들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상황이 알려졌지만 학교가 묵살했고, 결국 우리도 구체적인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18세 소녀가 목숨을 끊은 이후 반년 동안 14~18세 학생 6명이 자살했다고 영국 데일리메일은 보도했다.

미 버지니아주 아멜리아카운티에서는 17세 소녀가 남자친구와의 결별에 상심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소녀는 남자친구에게 “다시 만나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협박하고는 충동적으로 목숨을 끊었다.

지난달 초에는 호주의 14세 소녀가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8세 때 카우보이 모자를 판매하는 기업 ‘아쿠부라’의 광고 모델을 한 소녀는 인터넷으로 오랫동안 괴롭힘을 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아이들의 정신건강이 온전치 못하다는 학계 보고도 이어지고 있다. 영국 정신건강재단(MHF)에 따르면 5∼16세 아동·청소년 10명 중 1명이 정신 질환을 갖고 있고, 이 가운데 70%는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비영리기구인 미국정신건강(MHA)이 발간한 연례보고서 ‘2018 미국의 정신건강 현황’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18%인 4300만명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고, 960만명은 자살충동을 경험한 것으로 조사됐다. 12∼17세 인구의 11.93%가 식욕부진과 수면장애 등 우울증 관련 질병을 겪었고,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사례가 갈수록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박적 완벽주의는 독이 된다”

아동·청소년의 정신건강이 황폐해지는 이유는 완벽주의적 성향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미국심리학회(APA)가 지난해 12월 발간한 ‘심리학회보’에 따르면 밀레니엄 세대로 불리는 젊은 세대가 완벽주의적 성향 탓에 정신건강에 문제를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18∼25세의 미국·영국·캐나다 대학생 4만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는데, 응답자의 대다수가 ‘다차원적인 완벽주의’ 성향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자신과 타인, 사회가 용인하는 기대치를 모두 충족하는 목표를 세우고, 이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는 부류다. 대체로 상대방을 평가할 때에도 엄격한 잣대를 적용한다.

연구자들은 “이런 완벽주의적 성향은 식이장애, 불안, 우울증 등 젊은층의 정신질환자 증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며 “1980년대 신자유주의가 등장하면서 경쟁에서 살아남는 개인이 더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사회 분위기가 이들의 가치관에 영향을 준 것 같다”고 분석했다.

스마트폰을 이용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도 젊은 세대의 정신건강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등에서는 불가능한 목표를 달성하는 사람들이 너무 흔한 것처럼 평가되고 있다. 대부분 과장이라고 인지하면서도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다는 설명이다. 연구자들은 “완벽주의는 더 이상 장점이 아니라 우리를 절망으로 이끄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신건강 문제, 재정 및 인력 지원 절실”

아동·청소년의 정신건강 문제에 대해 영국 왕실뿐만 아니라 정부도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특히 영국 정부는 지난해 12월 ‘유아 및 청년의 정신건강을 위한 변혁’이라는 제목의 예비보고서(녹서·Green Paper)를 발표하고, 아동·청소년 정신건강을 위한 정책을 제안했다.

녹서에는 학교에서 정신건강 문제 등을 전반적으로 관리하는 책임자를 지정하고, 정신질환 치료 기간을 대폭 줄이는 내용 등이 담겼다. 이를 통해 중증 정신질환 학생뿐만 아니라 초기 혹은 경미한 증상의 정신건강 문제를 호소하는 학생들까지 수혜범위를 넓히겠다는 게 골자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부족한 인력과 재원을 고려하지 않은 허황된 제안”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미국도 주별로 다양한 해결방안을 고려 중이다. 텍사스주 댈러스경찰청은 지난달 29일부터 정신건강 문제만을 다루는 새 팀을 구성, ‘긴급 통합 그룹 관리’(RIGHT Care)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기존 경찰관이나 구급요원이 아니라 특수훈련을 받은 구급요원, 지역병원의 행동건강 전문가, 사회복지사 등이 행동건강 상담소로 파견돼 정신건강 문제에 종합적으로 대처하겠다는 것이다.

뉴욕도 오는 7월1일부터 학교 교과과정에 정신건강 커리큘럼을 추가한다. 아이들에게 스트레스나 불안 등을 느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등을 가르친다

노스캐롤라이나주도 올해 청소년 중심의 정신건강 위기센터를 처음으로 열었다. 이 센터는 중증 정신질환으로 입원이 필요한 6~17세 아동·청소년들을 위한 맞춤형 치료를 제공한다.

호주도 아동·청소년의 정신 건강 증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맬컴 턴불 호주 총리와 그레그 헌트 연방 보건장관은 지난달 7일 성명을 통해 청소년 정신건강 서비스에 1억1000만호주달러(약 950억원)를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지난해 10월 발간한 정신건강관련 보고서에 따르면 호주는 출산 전후 산모의 정신건강을 전반적으로 관리해왔다. 부모의 정서상태가 아이의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부모 관리 역시 아동의 정신건강 향상에 중요한 부분이라고 보고서는 설명했다.

남혜정 기자 hjna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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