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세이프가드 대처 땜질식 조치"
WTO 제소·관세보복 등
전문가들 반응 회의적
"美 CIT 제소 검토해야"
[아시아경제 안하늘 기자] 미국 정부가 최근 세탁기, 태양광 제품에 대해 세이프가드 조치를 취한 것은 미국의 정치적 환경을 감안했을 때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음에도 우리 정부와 기업은 이에 선제적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세이프가드 조치 이후 내놓은 대응책도 대부분 한계가 분명한 '땜질식' 조치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심지어 우리나라보다 무역 적자 폭이 훨씬 큰 일본에 대해서는 미국이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고 있어 국내 통상 전략 자체가 방향성을 잃은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31일 정부와 업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는 미국의 세이프가드 조치에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세이프가드 협정에 의한 보상요구 ▲관세 보복 등 3가지 대응책을 내놨다. 또 이를 이날부터 개최하는 한미 FTA 개정협정의 협상 카드로 활용할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정부의 계획에 회의적인 반응이다. 우선 WTO에서 승소를 거뒀다 하더라도 미국이 이를 이행할 지 미지수라는 것이다. 2013년 2월 미국 정부가 한국산 가정용 대형세탁기에 반덩핌 및 상계관세를 부과했을 때 우리 정부는 이를 WTO에 제소했다. 결국 2016년 9월 승소했지만 강제 이행 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미국 정부는 이를 따르지 않고 있다.
세이프가드 협정 규정을 근거로 보상을 요구하겠다는 계획도 이번 미국의 세이프가드 조치에는 해당 사항이 없다는 지적이다. WTO 세이프가드 협정에는 '절대적 수입량 증가'를 이유로 부과한 조치에 대해서는 상대국이 초기 3년 간 보복을 취할 수 없다는 제한 규정을 두고 있는데, 이번 미국의 세이프가드 조치는 3년 동안 취하는 것으로 마련 돼 있다. 또 우리 정부가 무역 보복을 취할 경우 트럼프 정부는 이를 빌미로 또 다른 분야로 무역 제재를 확대하거나 이 결과가 한미 안보협력관계에도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렇듯 미국은 관련 협정문을 세세하게 연구한 뒤, 11월 열리는 중간 선거를 앞두고 자신의 지지층인 러스트벨트(미국 중서부-북동부의 쇠락한 제조업 지대)의 노동자를 결집하기 위해 세이프가드 카드를 꺼낸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공세에 대응한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조치는 현지에 건설 중인 생산 공장을 조기에 가동, 무역 보복의 피해를 최소화 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건비가 신흥 시장에 비해 월등히 높은 미국에 생산 공장을 짓는 것은 장기적으로 불필요한 투자라는 지적이다. 트럼프 정권이 통상 기조를 바꾼다거나,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가 승리하면서 자유 무역 기조로 돌아설 경우 미국 내 건설한 생산 공장은 골칫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학계에서는 미국 국제무역법원(CIT) 제소를 기업들에게 권장하고 있다. 사법부 우위 전통이 지배하는 미국의 헌법구조상 대통령이 사법부(CIT)의 판정을 이행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WTO의 조치와 달리 과거 불공정 조치에 대한 피해 보상 소송도 제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다.
하지만 우리 기업들은 지난 20여년간 CIT을 통해 승소한 건이 1~2건에 그친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국내 기업과 정부의 통상 문제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한 것이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우리 정부는 기업의 해외 진출을 도와주는 것보다는 정부 대 정부 협상을 주 업무로 보고 있으며, 기업들도 해외 통상 업무에 대해선 로펌에 외주를 주는 경우가 많다"며 "반면 일본에서는 기업과 정부의 공조 사례가 많고, 기업들도 사내 변호사 제도를 완전히 구축하면서 최근 들어 CIT에서 승소율이 상당히 높다"고 말했다.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부총장은 "LG경제연구원에서도 통상 분야를 담당하는 사람이 1명에 그칠 정도로 기업들이 통상 문제 만큼은 정부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다"며 "우리나라보다 무역 적자를 큰 규모로 기록하는 중국, 일본과는 미국이 관계가 원만한 상황에서 왜 우리가 타깃이 됐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반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하늘 기자 ahn708@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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