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혜영이 만난 정치]"대통령과 브리핑 내용 상의 안 해..난 행복한 대변인이었다"

구혜영 기자 2018. 1. 31.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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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청와대 떠나는 박수현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이 사의를 표명한 지난 25일 서울 중구 돈의문 박물관 마을 앞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새로운 세상이 솟아올랐던 지난해 5월, 서울 삼청동 청와대에도 봄날이 스며들었다. 문재인 정부 첫 청와대 ‘입’으로 임명된 박수현 대변인(54)이 춘추관 단상에 섰다. 일성은 “따뜻한 소통”이었다.

8개월이 흘렀다. 박 대변인은 ‘친절한 수현씨’로 통한다. 청와대 2진 출입기자들 전화도 잘 받는다. 당 대변인 때도 출입처를 떠난 기자들에게 밥 한끼라도 챙겼다. 90도 각도로 몸을 숙여 인사하는 습관도 여전하다.

청와대 참모는 국정과 대통령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하는 자리다. 하지만 정치의 본질이 사랑이라 해도, 그 사랑이 지배와 복종을 뜻하는 게 아니라면 균형감각을 갖춰야 한다. 자기 극대화와 영속성을 좇는 권력의 속성 때문이다. 참모들이 때로는 한발 앞서, 때로는 뒷걸음을 해서라도 대통령과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까닭이다. 박 대변인은 8개월 동안 내부 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가 가장 아파하는 기사만 브리핑했다.

박 대변인은 오는 2월2일 청와대를 떠난다. 지난 25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이른 ‘퇴임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 기사는 바로 보도되지 못했다. 경남 밀양 화재참사로 퇴임 인터뷰 기사가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다. 추가 내용은 이후 전화 인터뷰로 채웠다. 박 대변인 후임에 김의겸 전 한겨레 기자가 선임됐다. 박 대변인은 “홀가분하다”고 했다. 청와대를 출입하는 김지환 기자가 인터뷰 정리를 도왔다.

청와대 대변인은 세상과 청와대를 연결하는 통로다. 박 대변인은 임명 첫날 무거운 걸음으로 언론과 마주했다. 돈과 인사로 언론을 통제했던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잔영이 짙었다. ‘솔직하게 다 알리자’는 다짐이 유일한 돌파구였다.

- 청와대 첫 대변인, 어떤 자리였나.

“출근 첫날 문재인 대통령이 두 가지를 말했다. 하나는 공주에서 출퇴근하는 성실함을 빼앗아 미안하다는 것, 또 하나는 모든 회의에 참석하라는 것이었다. 모든 회의에 들어가니 국정을 압축적으로 과외받은 느낌이다. 당 대변인 땐 실수해도 주워 담을 수 있었다. 청와대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차원이 다른 긴장을 하게 된다. 솔직한 것 이외엔 방법이 없었다.”

- 무척 힘든 생활이었을 것 같다.

“전 정부엔 대변인 전속 속기사가 있었다던데 나는 100% 수기로 기록했다. 볼펜으로 글씨를 쓰니 물집이 생겼다. 나중엔 뼈까지 아팠다. 아침에 뜨거운 물로 마사지했다. 대통령 말을 기록하지 않으면 역사를 흘려보낸다는 생각에 힘을 냈다. 그만둘 때가 되니 치아 전체가 아프다. 이를 앙다물고 메모하는 습관이 생겼다. 전문 용어는 빈칸으로 놓고 문 대통령에게 ‘뭐라고 하셨나요’라고 묻기도 했다.”

- 대변인 생각과 달라서 어려웠거나 감정 절제가 힘든 때는 없었나.

“국민소통수석, 비서실장, 대통령에게 사전 브리핑을 하거나 내용을 미리 알린 적이 한번도 없다. 자율권이 보장된 행복한 대변인이었다.”

- 청와대 대변인 8개월, 스스로 점수를 매긴다면.

“90점 주겠다. 기자들 전화를 국민 목소리로 듣겠다고 했는데 저도 사람인지라 화가 난 적도 있었다. 또 야당 대변인 논평을 꼼꼼히 보겠다고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 같다. 각각 5점씩 뺐다.”

문 대통령은 소통의 민주주의를 중시하는 지도자다. 권력의 힘이 총구가 아닌 말에서 나온다는 것을 강조한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의 입 역할만으론 부족하다. 그만큼 대통령을 잘 알아야 한다. 박 대변인은 문 대통령을 ‘선하면서도 실용적인 리더’라고 평가했다.

- 곁에서 지켜본 문 대통령은 어떤 지도자인가.

“경청하되 결단이 빠르다. 리더십으로 보면 선하면서 실용적이다. 북한 도발 직후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문 대통령이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4기를 배치하자고 하니 외교안보라인은 중국과 외교 문제가 생긴다고 걱정했다. 문 대통령이 대통령 지시라고 발표하라고 했다. 개혁을 추진해야 하는 상황에서 다른 진영에 발목 잡히지 않겠다는 실용적 판단이었다. 재난 현장에서 대통령이 유족들의 항의를 견디는 걸 보고 선한 리더십을 느꼈다. 신뢰가 쌓이면 정치가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 물러나는 마당에 문 대통령 단점도 짚어달라.

“잠을 잘 안 주무신다(웃음). 문 대통령 생일(24일)에 뉴미디어비서관실이 영상으로 찍은 수석들의 축하인사 대부분이 ‘잠 좀 주무시라’는 간청이었다. 매일 아침 9시10분 언론 보도 내용을 브리핑할 때면 대통령 눈이 항상 충혈돼 있다. 대변인이 보고를 하면 대통령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신문을 미리 다 보고 오신 거다. 내가 관저에 신문 넣지 말라고까지 했다.”

- 야당을 직접 비판하는 등 대통령 언어가 대결 지향적일 때도 있다.

“문 대통령의 타협 없는 원칙은 민주주의 가치다. 이 부분이 어긋나면 ‘원칙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협치와 관련해 참모들이 ‘할 만큼 했는데 쉽지 않다’고 보고하면 ‘더 진심으로 대화하라’고 지시한다.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가 청와대와 여야 원내대표 간 회동을 거부했다고 보고 하니 ‘최대한 설명 드리라’고 했다. 설득이라는 표현도 안 쓴다.”

- 강한 지지층 문화가 정치에 미친 영향을 평가한다면.

“강성 지지층은 다른 진영에도 있다. 이행기를 넘긴 뒤 건전한 공론장이 만들어져야 한다. 이 과정은 인위적으로 할 수 없다. 문 대통령도 이런 현상을 바람직하다고 보진 않지만 양쪽 다 국민 목소리인 만큼 듣고 인내하자고 생각한다. 정치권이 지혜롭게 받아들여야 건강한 공론장으로 가는 이행기를 줄일 수 있다. 이른바 ‘문파’는 문재인 개인에 대한 지지라기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키지 못했다는 진보진영의 반성에서 발생한 현상이다. 이를 사회현상으로 받아들일 때 강성 지지층 문화가 건강하게 자리 잡을 수 있다.”

‘결정 뒤 통보만 하는 청와대’(여당 관계자), ‘국무회의보다 수석·보좌관 회의가 더 중요한 청와대’(야당 관계자). 정권교체 후 국정 정상화를 위해 청와대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 덩치 큰 청와대에 가려 여의도 정치가 보이지 않았다는 비판도 적잖았다.

- 대선 공약이었던 ‘민주당 정부’ 슬로건이 집권 후 사라졌다는 지적도 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없는 상황에서 무너진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우는 민감한 이슈를 다루다 보니 청와대로 집중된 면이 있었다. 문 대통령도 총리·부처 중심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대통령이 하던 임명장 수여식이나 부처 업무보고도 총리에게 맡겼다.”

- 주문 말고 민주당 정부 실행을 위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이 있나.

“30일 장차관 워크숍에서 부처 중심 시스템 국정을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평소에도 당·정·청 회의 실질화를 당부한다.”

- 대통령과 여당 지지율이 하락세다.

“20대, 30대에 기성세대 시각으로 옳고 그름을 강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일팀은 남북관계 개선 때문에라도 환영할 거라 예상했는데 아니었다. 이런 자세로 청년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한 데 대한 통렬한 반성을 했다. 세대별로 세밀한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고 자성하는 계기가 돼서 현재 지지율 하락을 약이라 여긴다.”

- 개헌 우선순위는 시기인가 내용인가.

“시기가 먼저다. 개헌 내용은 합의된 것만 해도 된다.”

- 청와대를 광화문으로 이전하는 공약은 언제쯤 실현되나.

“개헌안에 행정수도 이전 내용이 담기면 청와대도 이전 가능하다. 문 대통령은 개헌 상황을 보고 추진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하고 있다.”

비사(秘事)가 궁금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요청했다. 그러나 생각만큼 내밀한 뒷이야기는 없었다. 박 대변인은 “국익, 상대국과의 약속 때문에 밝힐 수 없는 것 빼곤 다 브리핑했다”고 말했다.

-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의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방문 배경을 말해달라.

“파병 장병을 격려하는 계기에 UAE 왕세제를 예방한 건 아니었다. 양국의 특별한 갈등 요소를 조율하러 갔다. 나도 모르는 게 있었다.”

- 집권 초 인사 논란 이유가 무엇인가.

“새로운 시대상이 이유라면 이유였다. 국민 눈높이가 높아졌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후보자 본인 고사와 가족 반대였다. 미국처럼 신상은 비공개로 하고 정책은 공개하는 것으로 청문회 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청와대의 인사 검증 노력, 시스템이 약했다고 보진 않는다.”

- 촛불민심을 국정 최고 가치로 삼았던 문재인 정부가 이와 배치되는 후보를 내세운 건 또 다른 문제다.

“(박성진 후보의 경우) 창조과학 논란을 보고했더니 대통령은 종교가 장관 업무와 큰 관계가 있느냐고 했다. 개인 생각을 통제할 순 없으니 그 자리에 적합한지 국민들이 판단하도록 호소하라고 했다.”

- 문 대통령이 외국 정상과 통화하거나 회담에 배석했을 때 일화를 듣고 싶다.

“마크롱 대통령이 주요 20개국(G20) 회의 후 프랑스에 들러달라고 요청했다. 문 대통령이 실무선에서 논의해 보겠다고 답했더니 마크롱 대통령은 하루만 들르는 게 왜 안되냐고 재차 요청했다. 문 대통령은 통화한 뒤 굉장히 기분 좋아했다. 지난해 7월 ‘기업인들과 대화’ 첫날 나도, 참석자들도 긴장했다. 일정을 마치고 모두들 일어서려는데 내가 ‘잠깐 앉아 보세요’라고 했다. 브리핑 전, 중요 발언에 밑줄 쳐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박수를 받았다. 둘째날은 첫날만큼 대화가 격렬하지 않아 바로 브리핑하려 했는데 이번엔 문 대통령이 참석자들에게 ‘잠깐 앉아 보세요’라고 했다. 그땐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쳐두지 않아 당황했다. 발표 뒤 또, 감사하게도 박수를 받았다.”

공직은 ‘외롭고 높고 쓸쓸한’ 자리다. 정치적 결단, 정무적 판단에 파묻혀 산다. 물러날 때쯤이면 인간적 고뇌가 깊어지는 게 순리다. 박 대변인은 퇴임 이후 6월 지방선거 출마라는 홀로서기에 나선다.

- 전병헌 전 정무수석 후임 정무수석을 제안받았는데.

“정무수석을 제안받은 지 3일째 되는 날 윤영찬 국민소통수석, 임종석 비서실장에게 하겠다고 했다. 이후 청와대 참모들이 ‘박 대변인이 빠지면 충남지사 선거 판이 달라진다’고 하더라. 이틀 정도 더 고민한 뒤 정무수석 제안을 반납했다.”

- 청와대의 6·13 지방선거 의미는.

“나라다운 나라, 국민이 체감하는 삶의 변화 등 개혁정책 추진 동력을 확보하는 계기다. 중간평가로 보진 않는다.”

- 청와대 밖을 나선 뒤 정치인 박수현의 길은 어디를 향하나.

“착한 정치인이 되고 싶다. 선천성 뇌성마비를 앓았던 아이를 하늘로 보낸 뒤 사회복지 전문 국회의원이 돼야겠다는 마음으로 정치를 시작했다. 사회적 약자들을 가로막는 벽을 반드시 깨겠다.”(박 대변인은 충남지사 선거에 도전한다.)

- 절친이자 동지인 안희정 지사의 향후 역할을 조언한다면.

“당 대표에 도전하더라도 배지를 달아야겠다는 식의 정치공학은 버려라, 그냥 배낭 하나 메고 나서라고 조언했다.”

■청와대 대변인의 24시 - 새벽 5시30분 출근…매일 오전회의만 4차례
새벽 5시30분, 오늘도 어김없이 전화벨이 울린다. 관사에서 약 1㎞ 떨어진 청와대까지 서둘러 출근길에 나섰다. 빨리 걸으면 5분여 거리지만 기자들 전화에 응대하다 보면 10분을 훌쩍 넘긴다. 대변인실, 국민소통수석실, 비서실장 주재 현안점검, 대통령 티타임 등 매일 오전회의만 4차례다. 국무회의와 외부인사 접견이 있는 날은 청와대 본관과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여민1관(약 500m 거리)을 수시로 오간다. 대변인 메모가 청와대 공식 메시지다. 한 마디도 흘릴 수 없어 매 순간 긴장한다. 오전 11시 무렵 춘추관 브리핑을 마친 뒤에야 겨우 한숨 돌린다. 곧바로 점심시간이다. 하지만 오늘도 편안하게 밥 먹긴 어려울 것 같다. 오후에 장차관 워크숍이 있어 식사를 건너뛸까 했지만 직원들이 어느새 도시락 그릇에 구내식당 밥을 챙겨왔다. 오후에도 대통령 외부행사, 현안회의 배석, 춘추관 브리핑 등 줄줄이 회의다. 만찬 행사가 없으면 저녁 7시쯤 약속 장소로 향한다. 하루 24시, 다를 것 없는 일주일이다. 청와대 본관을 지날 때면 녹지원과 상춘재 옆 계곡길을 만난다. 흐르는 냇물에 숨 가쁜 일상을 흘려보냈던 기억도 까마득하다. 언젠가 대통령이 농담처럼 꺼낸 반려견 마루와 토리 이야기가 생각났다. 관저 입구 오른편 앞에 토리 집, 뒤에 마루 집이 있다. 순서상 출근 땐 마루, 퇴근 땐 토리와 먼저 인사한다. 그런데 둘 다 “먼저 안아주지 않으면 삐져서 고개를 돌린다”는 것이다. 대변인을 그만둔다고 생각하니 하나같이 그리운 풍경이다. 청가회 2대 회장은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이 맡기로 했다. 한달에 한번 30여명이 모여 미사를 하던 청와대 소강당도 눈에 밟힌다. 어젯밤, 숙소 입구 낡은 시멘트 계단을 하염없이 오르내렸다. 출근 첫날 고향 어머니와 누이 생각에 한칸 한칸 눈물로 올랐던 그 계단. 흔들리며, 흔들려가며 폭풍처럼 보낸 8개월을 새겼다. 떠난 뒤에도 오래도록 이곳을 서성일 것 같다.

<구혜영 기자 kooh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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