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스타일] 나만의 아지트가 필요해 .. '케렌시아' 열풍

유지연 2018. 1. 30.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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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소파 등으로 만든 나만의 공간
투우 경기 직전 소가 숨 고르는 곳
바쁜 내일 준비하는 재충전 효과

가수 자이언티의 노래 ‘꺼내 먹어요’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쉬고 싶죠, 시끄럽죠, 다 성가시죠, 집에 가고 싶죠.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을 거야.’ 적어도 이 가사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집은 그냥 집이 아니다. 바쁘게 일상을 누비다 잠시 숨을 고르는 은신처, 바로 ‘케렌시아’다.

TV 대신에 음악·조명시설 갖춰

김현경씨는 가구를 아늑하게 배치하고, 형광등 대신 은은한 간접 조명을 설치해 거실을 자신만의 아지트로 만들었다. [변선구 기자]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사는 성명수(패션업체 바이어·33) 김현경(승무원·29)씨 부부의 거실에는 소파가 없다. 대신 1인용 의자 여러 개를 두고 작은 TV와 오디오, 러그 등으로 아늑하게 꾸몄다. 아내 김현경씨는 “안락하고 조용한 ‘아지트’같은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며 “출장이 잦은 데다 밖에서 사람을 많이 만나는 직업이다 보니 집에서 만큼은 조용히 지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말했다. 실제로 김씨 부부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바로 이 거실이다. 작은 TV는 잘 켜지 않고 주로 음악을 들으며 1인용 의자에 기대 휴식을 취한다.

서울 마포구 아파트에 지난 12월 말 입주한 엄제일(보험사 상무·48)씨는 집 안에 독특한 공간을 마련했다. 가족끼리는 ‘숨겨진 방’이라고 부르는 공간으로 카페 겸 서재, 가족실로 꾸민 방이다. 흰 벽처럼 보이는 미닫이 문을 열면 마술처럼 집 안의 다른 평범한 공간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의 방이 나타난다. 이 공간만 노출 천장에 회색빛 벽, 어두운 바닥을 써서 카페처럼 꾸몄다. 조용하게 사색할 수 있는 방으로 조명의 조도를 낮추고 가구 컬러도 차분하게 맞췄다. 엄제일씨는 “아이가 어렸을 때 시립 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경험을 살려 우리 가족이 가장 좋아했던 공간을 집 안에 구현한 것”이라며 “숨겨진 방 안에 있으면 밖의 소리가 잘 안 들릴 정도로 집중도가 높다”고 했다. 각자 퇴근 후 이 공간에서 자신만의 활동을 하는 것이 요즘 엄제일씨 가족의 일과다.

엄제일씨 가족의 ‘숨겨진 방’ 전경. 집안의 다른 부분(아래 사진)과는 완전히 달리 카페처럼 꾸몄다. [사진 아파트멘터리]
엄제일씨 가족의 ‘숨겨진 방’ 전경(위 사진). 집안의 다른 부분과는 완전히 달리 카페처럼 꾸몄다. [사진 아파트멘터리]
자신만의 치유·사색 공간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가장 가깝게는 집에 이런 공간을 마련한다. 바로 케렌시아(Querencia)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의 『트렌드 코리아 2018(미래의창)』에 등장한 단어로 투우장의 소가 마지막 일전을 앞두고 잠시 숨을 고르는 자기만의 공간을 의미한다.

인테리어 시공업체 아파트멘터리의 윤소연 대표 역시 케렌시아 트렌드에 공감한다. “요즘 집 인테리어 의뢰를 받을 때 많이 듣는 단어가 안정감, 휴식”이라며 “집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 이상으로 본질적인 휴식을 원하는 이들이 많다”고 전했다.

정서적 만족감 주는 인테리어 추구

원래 집은 쉬는 공간이라고? 보다 적극적 휴식 공간이라는 점이 이전과 다르다. 개인의 선호와 취향이 반영된 공간을 만들고 싶어 하고 여기에 비용과 시간을 투자한다는 얘기다. 엄제일씨 가족처럼 개성 있는 공간을 꾸미거나 김현경씨 부부처럼 정서적 만족감을 주는 인테리어를 추구하는 것도 특징이다. 아파트멘터리 윤 대표는 “화분을 가득 채운 베란다를 꾸미거나 방 하나를 만화방처럼 만드는 경우도 있다”며 “다른 공간을 포기하더라도 집 안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채운 색다른 공간을 만들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서울대 소비자학과 전미영 교수는 “단순히 쉬는 공간이라기보다 누군가의 방해 없이 자신에 집중·몰입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다 보니 케렌시아는 집에만 국한된 공간은 아니다. 현대인들이 휴식과 재충전을 할 수 있는 모든 곳이 케렌시아가 된다. 단골 카페, 취미 공방, 수면 카페, 요가원 등이 될 수도 있다. 심지어 출근길에 늘 버스 뒷자리에 앉아 안정감을 느끼는 경우라면 버스 뒷자리가 나만의 케렌시아가 된다.

일터에도 케렌시아는 있을 수 있다. 바로 자신의 책상이다. 책상을 좋아하는 인테리어 소품으로 꾸미는 것도 일종의 케렌시아 만들기에 해당한다. 책상 인테리어를 즐긴다는 의미의 ‘데스크테리어족(deskterior族)’이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핵심은 자기 집중이다. 집 안이든, 밖이든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말한다.

사무실에서도 자기만의 책상 꾸미기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자신만의 동굴에 해당하는 케렌시아에는 경쟁 사회에서 회피하려는 욕구와 함께 초연결 사회에 부담을 느끼는 현대인의 심리가 반영되어 있다”며 “늘 스마트폰을 가까이하면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지나치게 노출된 것에 피로감을 느끼는 이들이 원하는 단절의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덩달아 케렌시아 관련 인테리어 용품도 인기다. 대표적으로 조명이다. 주로 휴식을 취하는 저녁에 유용한 은은한 조명기구가 인기다. 방 안에 편안한 안락의자를 놓는 경우도 많다. 러그·향초 등 편안한 공간을 만드는 소품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

신세계백화점 생활팀 조재훈 바이어는 “2016년 4월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에 입점한 조명 전문 매장의 매출이 초반 월 3000만원 수준에서 현재는 6000만~7000만원 수준으로 2배나 성장했다”며 “이 외에도 1인용 안락의자나 리클라이너 소파, 고급 침구 및 고가 침대 등 휴식 관련 상품의 성장세가 눈에 띄게 높다”고 전했다.

번 아웃(burn-out 소진·탈진) 시대, 단절과 휴식의 가치가 올라가고 있다. 현대인들을 위한 안식처, 케렌시아가 인테리어 트렌드는 물론 주거문화, 나아가 공간 비즈니스의 핵심으로 거론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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