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당장, 나머지 파일들을 열어라

임지봉 |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 2018. 1. 28.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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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자유민주주의는 우리 헌법의 기본원리 중 하나다. 헌법 교과서들은 이 자유민주주의의 구성요소 중 하나로 예외 없이 ‘사법권 독립’을 든다.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가 직무수행에 있어 누구의 지시나 명령에도 구속되지 않고 독립해서 심판해야 한다는 헌법 제103조 말이다. 자유와 인권 보장의 최후보루인 법원의 판사가 재판에 있어 독립적인 재판을 할 수 없다면, ‘자유’민주주의에서 말하는 국민의 ‘자유’의 보장은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헌법 제27조는 또한 ‘재판받을 권리’를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다. 그리고 헌법재판소는 ‘재판받을 권리’ 속에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포함됨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의 공용컴퓨터에 저장된 일부 파일들에 대한 추가조사위원회의 조사보고서가 큰 파문을 낳고 있다. 이 파일들 속의 문건에 의하면, 법원행정처에 비판적인 법관들은 핵심그룹과 주변그룹으로 분류됐다. 각각 12명과 10명의 판사들을 이 그룹에 포함시켜 반대자의 낙인을 찍었다. 2015년에 각급 법원 법관들로부터 사법행정의 주요 현안에 대한 의견을 청취하기 위해 사법행정위원회를 만들면서, 그 위원 후보로 추천할 판사들의 성향·평판을 뒷조사해 빨강·파랑·검정으로 분류한 문건 리스트도 발견된다.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법관은 빨강, 유력한 후보군은 파랑, 나머지 판사들은 검정으로 구분됐다. 그 판사들이 누구와 친하고, 어떤 학회에 가입해 어떤 활동을 하는지도 적혀 있다. 법원행정처 심의관을 거친 판사 등을 ‘거점법관’으로 삼아서, 소속 법원 법관들의 동향을 주기적으로 파악한 문건도 있다. 그 판사의 “성격과 스타일, 재판 준비태도, 일과 관련된 가정사”까지 파악되고 보고되었다.

특히 이 문건들에 거점법관 등을 통한 “비공식적 정보수집 사실이 드러날 경우 ‘법관 사찰’ ‘재판 개입’ 등 큰 반발이 예상되므로 철저한 보안 유지 필요”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이런 사찰이 큰 문제라는 점을 법원행정처 스스로 알고 있었다는 자백이다.

이 문건들은 판사들의 성향이나 동향 파악에 그치지 않고 대응방안까지 적고 있다. 법원의 정책에 비판적인 판사들에 대해 “고립화 분위기를 조성”한다든가, 판사회의 의장 경선에 출마한 법관의 인적 사항과 세부 동향의 파악에서는 “다른 판사의 선출을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한다는 대응방안까지 제시되고 있다. 섬뜩하다. 이러한 사법행정권 남용도 문제지만 그 이후 이 사안이 불거졌을 때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법원행정처가 이를 축소하고 은폐하려 했던 과정들은 또 어떠한가. 사찰문건이 법관 뒷조사만 했을 뿐, 불이익은 주지 않아 문제될 것이 없다는 주장도 들린다. 아니다. 조윤선 전 장관의 항소심 판결에서 법원도 리스트에 오른 인사들에게 실제 불이익을 줬느냐와 관계없이 그러한 문건을 작성한 것 자체가 범죄임을 인정한 바 있다.

일부에서는 이번 사태를 판사들끼리의 세력다툼이나 법원 내의 내부갈등쯤으로 치부하려는 시각도 있다. 성급한 양비론도 주장된다. 아니다. 이 사안은 엄연히 권한을 남용한 가해자와 이로 인해 사찰당하고 배제된 피해 법관들이 존재하는 사안이다. 이런 법관사찰이 치명적인 것은 ‘법관의 독립’ 훼손을 넘어 결과적으로 국민들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침해될 수 있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시국사건의 경우 판사의 가치관, 세계관, 인권감수성이 재판의 결과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전국의 3000명에 가까운 판사들의 보직 지정권과 근무지 지정권을 한 손에 틀어쥔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가 유죄나 중형의 선고가 내려지기를 원하는 사건들이 많이 가는 재판부에, 소위 진보적인 판사들은 배제하고 어떤 판단을 할지 예측 가능하고 안전한 보수적인 판사들만 앉힌다면, 그래서 유죄와 중형이 선고되는 데 영향을 준다면, 국민 입장에서 완벽하게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받았다고 흡족해할 수 있겠는가.

빙산의 일각만 드러났을 뿐, 열지 못한 파일들이 수두룩하다. 나머지 파일들을 열고 철저한 진상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법원행정처가 정권과 관련된 중요사건들에 대해 청와대에 재판부 동향 보고만 했는지,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재판 개입에까지 나아갔는지도 이 파일을 열어야 알 수 있다. 이 사안은 상처받은 ‘사법권 독립’의 치유를 통해 헌법상의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내느냐 마느냐의 문제이고, 더 중요하게는 국민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확보해내느냐 마느냐의 문제이다. 사법권을 사법부에 위임한 주권자 국민들의 명령이다. 지금 당장, 나머지 파일들을 열어라.

<임지봉 |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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